시조 박혁거세 득성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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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박혁거세 득성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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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박(諱이름)혁거세(朴赫居世) 득성(得姓) 연원

박씨(朴氏)는 우리 민족 가운데서 가장 순수한 혈통을 이어온 토박이 씨족으로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알의 모양과 같은 표주박이라는데 인연한데서 연원을 두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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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유민들이 동해가 산 곡간에 흩어져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군주가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서 육부촌장이 알천에 모여 삼일동안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드리고 있던 서기전 69년 3월 1일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의 숲 사이에 오색 구름이 떠오르고 말 한 필이 꿇어 앉아 울고 있으며 신선이 엎드려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기이하여 그곳에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아니하고 박 같기도 하고 알 같기도 한 포가 있어 이를 헤쳐 보니 그 속에서 의형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 아이가 나왔다. 동천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고 일월이 청명하였다.”


BC 57년 4월 병진일(혹은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박(諱)혁거세(朴赫居世)왕이라 하고 박(朴)으로써 성을 정하였다.


밀성박씨(密城朴氏) 본관의 유래

밀성(密城)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제23대 왕, 재위기간:514~540)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때인 서기 995년(성종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하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성박씨(密城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제54대 왕, 재위기간:917~924)의 8대군 중 세자(世子)인 박언침(朴彦忱)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단일본관(單一本貫)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伐族)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朴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성박씨는 중시조(中始祖) 언침(彦忱)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本貫)을 밀성(密城)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 8세손 언상, 8세손 언인, 8세손 언양, 8세손 천익, 8세손 을재, 13세손 원광, 15세손 중미, 16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 되었다.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8세손 언부)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8세손 언상)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8세손 언인)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8세손 양언)
판도공파(版圖公派:8세손 천익)
좌윤공파(左尹公派:8세손 을재)
동정공파(同正公派:13세손 원광)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15세손 중미)
정국공파(靖國公派:15세손 위)
규정공파(糾正公派:16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 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 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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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사적(事跡)

기원전 57년(漢宣帝 五鳳元年 甲子) 4月 병진(丙辰)일 13세로 즉위(卽位)한 박혁거세는 왕호(王號)를 거서간 (居西干)이라 하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5년(戊辰)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삼았는데 마음이 어질고 행실이 착하시어 내조를 잘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왕과 왕비를 두 성인(二聖人)이라 하였다.
 

◆ 8년(辛未)에 태자 민(愍)이 태어났다.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변경을 침범하려 하였으나 시조의 신덕(神德)을 듣고 물러갔다.
◆ 17년(庚辰)에 왕과 왕비는 육부의 민정을 살피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토지를 잘 다루어 생산에 힘쓰도록 하였다.
◆ 19년(壬午)에 변한(弁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 하였다.
◆ 21년(甲申)에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이름 하였다.

◆ 26년(己丑) 금성에 궁궐을 세웠다.
◆ 30년(榮巳)에 낙랑이 침입하여 지방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판에 쌓아둔 것을 보고,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라 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 38년(辛丑) 二月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의 경기 충청 전라지방으로 파견하여 수교를 하였다.
◆ 61년(서기 4년 甲子) 3월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담암사(墓岩寺) 북쪽의 오릉(五陵)에 장사(葬事)하였다.
 

박씨 10대왕 연보(十代王年譜)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 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 BC69-AD3)은 사적(事蹟) 참조


※ 2대왕(代王)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BC4-23) : 諱(이름)는 민해(愍解)이며 시조왕의 아들이다.

◆ 元年(서기4년甲子) 7월에 왕위에 오르고 호를 차차웅(次次雄)이라 하였다. 낙랑(樂浪)의 군사들이 침입하여 금성(金城)을 겹겹으로 포위하므로 왕이 군사들에 게 타이르자 적들은 갑자기 물러갔다.

◆ 2년(서기5년乙丑)에 운제부인 김씨를 왕비(王妃)로 봉하고 운제왕후(雲帝王后)라 추존하였다. 계비로 석씨(昔氏)를 아루왕후(阿婁王后)라 하였다.

◆ 3년(서기 6년丙寅) 춘정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우고 친히 사시제(四時祭)를 받들다.

◆ 5년(서기8년戊辰) 1월에 석탈해(昔脫解)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맏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 7년(서기10년戊午) 7월에 석탈해에게 대보(大輔)라는 벼슬을 주고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 11년(서기 14년甲戌)에 왜인들이 병선(兵船) 100여척으로 해변에 침입하여 민가(民家)를 약탈하므로 왕은 육부의 군사를 뽑아 이들을 막았다.

◆ 16년(서기19년) 2월에 북명(北 溟:現江陵)사람들이 밭을 갈다가 예(濊:고조선부족국가)의 왕인(王印)을 얻어서 나라에 바쳐왔다.

◆ 19년(서기22 년壬午)에 역병이 창궐(猖獗)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 21년(서기24년甲申) 9월에 황재(蝗災)가 있었다. 이때 왕이 돌아가시 어 오릉원(五陵園)에 장사지냈다.


※ 3대왕(代王) 유리치리 이사금(儒理治理尼師今 24-56) : 諱는 치리(治理)이다.

◆ 원년(서기24년甲申) 9월에 즉위하여 왕호를 유리(儒理)라 하였다. 어머니는 운제왕후 김씨이며 왕비는 갈문왕(葛文王) 김일여(金日如)의 딸이다.
남해왕이 돌아가시자 태자 유리가 마땅히 즉위하여야 할 일인데 대보 탈해가 덕망이 높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사양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왕위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치아(齒牙)가 많다하니 시험을 해봅시다." 하고 떡을 물어 치아를 시험한 결과 유리(儒理)의 잇금(齒理)이 많은 고로 군신들은 곧 유리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시고 이름을 이사금(尼師今)이라 했다.


◆ 2년(서기 25년乙西) 2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대사(大敎)하였다.


◆ 5년(서기28년 戊子) 11월에 국내(國內)를 순행(巡幸)하다가 한 늙은이가 거의 얼어 죽을 지경(地境)이 된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고 음식(飮食)을 마련하여 먹인 후에 관리에게 명하여 곳곳마다 돌아다니면서 홀아비와 홀어미와 고독한 늙은이와 병들어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먹을 것을 내려 주었다. 이해에 민속(民俗)이 환강(歡康)하여 처음으로 도솔가(究率歌)를 지어 부르니 가악(歌樂)의 시초(始初)가 된다.


◆ 9년(서기32년壬辰) 봄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주고 열일곱 가지 벼슬을 만들었는데,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姓)을 이(李)라 하고, 고허부(高塘部)를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그 성(姓)을 최(崔), 대수부(大樹部)를 점량부(漸梁部)로 고치고 성(姓)을 손(孫), 간진부(于珍部)를 본피부(本彼部)라 하여 그 성(姓)을 정(鄭), 가리부(加利部)를 한기부(漢祗部)로 고치고 성(姓)을 배(裵), 명활부(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라 하여 성(姓)을 설(薛)이라 하였다.

<신라의 신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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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신라시대 골품제도에서 최고의 신분 계급은 성골과 진골이다. 특히 성골은 그 중 가장 높은 신분으로 왕족 중에서도 일부만 차지하였다.
6두품은 성골과 진골 다음 가는 계급으로 중앙 귀족, 최고의 신분 계급은 아니지만 차지하기 힘들다고 해서 일명 "득난"이라고도 한다.
5두품은 성골, 진골, 육두품 다음의 계급으로 4두품을 밑에 두고 있다. 왕경인으로 중앙관직에 임명되기 때문에 지배자 집단에 속한다.
4두품은 지방의 유력한 지배자들로 왕경으로 이주하여 중앙 귀족을 떠 받치는 광범위한 하급 관리에 속한다.
 


◆ 왕은 이미 육부를 정한 후에 가배(嘉俳)를 실시하였다.
육부를 두 패로 가르고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게 하여 칠월 십육일(經望)부터 날마다 큰 부(部)의 뜰에 모여 길쌈(續麻)을 하는데 밤늦게(二更)야 일을 파하고 팔월십오일에 이르러 공의 다소를 살펴서 진편에서는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위라 하였으니 이로 인연하여 팔월 십오일이 추석(秋夕) 명절이 되었다.


◆ 13년(서기36년 甲申) 8월에 낙랑(樂浪)에게 북변의 타산성(朶山城)을 함락(陷落) 당하였다.

◆ 14년(서기37년丁西)에 고구려왕 무휼(無恤:大武神王)이 낙랑을 쳐서 이를 멸망시켰다.


◆ 17년(서기40년庚子) 9월에 화려(華麗), 불내(不耐) 두 고을 사람들이 공모(共謀)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경(北境)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거사(渠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하서(河西)에서 이를 격파하여 패주시키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맥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 19년(서기42년壬寅) 8월에 맥국의 거사가 짐승을 사냥하여 바쳤다.
◆ 33년 (서기56년丙辰) 4월에 한 마리의 용(龍)이 금성(金城)의 우물에 나타나니 곧 폭우가 서북으로 부터 쏟아졌다. 5월에는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뽑혔다.


◆ 34년(서기 57년丁巳) 9월에 왕은 병환을 얻어 신음하며 신하들에게 말씀 하시기를,“탈해(脫解)는 그 몸이 국척에 연결되고 벼슬이 보신(輔臣)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짐의 두 아들은 그 재능이 훨씬 미치지 못하니 짐이 죽은 뒤에는 탈해를 즉위케 하라” 하며 유훈(遺訓)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오릉원(五陵園)에 장사하였다.


※ 5대왕(代王)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79-111):


◆ 원년 (서기80년 庚辰)에 유리왕의 둘째 아들로 즉위하여 왕호를 파사왕(婆娑王)이라 하였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金氏 史省夫人)으로 갈문왕 허루(葛文王許婁)의 따님이다.

◆ 2년(서기81년辛巳) 2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祭祀) 지내다. 3월에는 각주와 군을 돌면서 민심(民心)을 안정 (安定)시키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百姓)을 구제하고 죄수들을 사형 죄(死刑罪)를 제외하고 모두 사면(敎免)하였다.


◆ 3년(서기82년壬午) 1월에 왕은 창고가 비고 군기가 둔하여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만약 수재(水災)와 한재(早災)가 들고 변방으로 적이 침입하면 막을 수 있도록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전구를 마련하여 군비를 다듬어 불의에 대비토록 하였다.

◆ 5년(서기83년 甲申) 2월에 명선(明宣)을 이찬(伊湌)으로 삼고 윤양(允良)을 파진찬(波珍澄)으로 삼았다. 5월에 고타군주 안동(古廊郡主安東)이 청나라 소를 바쳐왔고 남신현(南新縣)에는 보리가 쌍 퉁가리로 되어 큰 풍년이 들었다.


◆ 6년(서기85년乙酉)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에 길원(吉元)을 아찬(阿湌)으로 삼았다.

​◆ 8년(서기87년丁亥) 7월에 왕은 백제와 가야에 인접한 가소(加召)와 마두(馬頭)의 두 성루(城壘)를 쌓아 변방을 지켰다.

◆ 11년(서기90년庚寅) 7월에 왕은 사자(使者) 10명을 고을에 파견하여 공사를 게을리 하여 전지를 황폐하게 한 주주와 군주를 파면시켰다.
◆ 14년(서기93년榮巳) 1월에 윤양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삼았다. 2월에 왕은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을 순행하여 친히 고령자를 위문하고 곡물을 하사 하였다.


◆ 15년(서기94년甲午) 2월에 가야의 적들이 마두역(馬頭域)으로 쳐들어와서 포위하므로 왕은 아찬 길원을 파견하여 이를 치계(駿啓)하니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적을 격파 하였다. 8월에 왕은 경주알천(慶州開川)에서 열병식(閔兵式)을 하였다.

◆ 17년(서기96년丙申) 7월에 폭풍이 불어 금성 남쪽의 큰 나무들이 뿌리채 뽑혔다. 9월에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방을 침입하므로 왕이 성주(城土) 가소(加召) 장세(長世)를 파견하였으나 적에게 피살되니 왕이 노하여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성을 쌓아 적을 패주시키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 18년(서기97년丁酉) 1월에 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정복하고자 하였는데 가야 임금이 사신을 파견하여 죄를 사과함으로 중지 하였다. 22년(서기101년辛丑) 2월에 궁성을 쌓아 월성(月城) 이라 이름 하였다. 7월에 왕은 월성으로 이주하였다.


◆ 23년(서기102년壬寅)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安康)과 실직곡국(恐直谷國)이 서로 지경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이의 판결을 청하였으나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금관국 수로왕은 연로하고 지식이 많으니 그를 불러 묻자” 하시고 곧 그를 초빙하였는데 수로왕은 의론을 바르게 하여 그들이 서로 다투는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도록 하였다. 왕은 육부에 명하여 모이게 하고 수로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오부에서는 이찬을 접빈주(接賓主)로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漢紙部)만은 벼슬이 낮은 자로 접빈주를 삼았다 하여 수로왕은 크게 노하고 종 탐하리(眈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 집빈주인 보재(保齋)를 죽이고 돌아갔다. 이때 탐하리는 도망하여 음즙벌국 타추간(陀鄒干)의 집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왕은 사자를 보내어 살인자 탐하리를 찾았으나 타추가 보내주지 않으므로 왕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음즙벌국을 정벌하니 타추는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이때 실직(悉直) 압독(押督:慶山) 두 나라도 항복하였다.


◆ 25년(서기104년 甲辰) 7월에 실직국이 모반 하므로 왕은 군사를 내어 이를 정벌하여 평정하고 그 무리들을 남쪽 변방으로 옮겼다.

◆ 26년(서기105년 乙巳) 1월에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청하였다.

◆ 27년(서기106년 丙午) 1월에 왕께서는 압독에 순행하여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3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8월에 왕은 마두 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징벌하였다.


◆ 29년(서기 108년戊申) 5월에 큰 물이 차고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므로 왕은 십도(十道)에 사자를 파견하여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비지국(比只國 : 昌寧) 다벌국(多伐國 : 大邱) 초팔국(草八國 :草溪)을 정벌 하였다. 30년(서기 109년己酉) 7월에 황재(陸災)로 곡식에 피해가 심하여 왕은 산천에 제사를 드려 재해를 빌었는데 곧 황재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33년(서기112壬子) 10월 왕이 돌아가시므로 오릉원에 장사(葬事)하였다.


※ 6대왕(代王) 지마 이사금(祗摩尼師今 在位 112-133):


◆ 元年(서기 112년 壬子)에 즉위하여 왕호를 지마왕(祗摩王) 이라하였다.
파사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며 비는 김씨 애례부인(金氏愛禮夫人)으로 갈문왕마제(葛文王 麻帝)의 딸이다.

◆ 2년(서기 113년 癸丑) 2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창영(昌永)을 이손으로 삼아 정사에 참여케 하고 옥권(玉權)을 파진찬으로 신권(申權)을 일김찬으로 순선(順宣)을 급찬(給湌)으로 삼았다. 3월에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하였다.

◆ 3년(서기 114년 甲寅) 4월에는 큰물이 지므로 왕은 죄수들을 보살펴서 죽을죄를 사하고 모두 놓아주었다.


◆ 4년(서기115년 乙卯) 2월에 가야가 남쪽변방을 침범하였다. 7월에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야를 정벌하러 일어섰다. 황산하(黃山河:낙동강하류)를 건널 때 가야 사람들은 숲속에 복병을 설치하여 기다리고 있을 즈음 갑자기 나타난 적의 복병에게 포위당했으나 왕은 군사를 격려하여 포위망을 뚫고 군사들을 돌이켜 물러 나왔다.


◆ 5년(서기116년 丙辰) 8월에 왕은 장병을 파견하여 가야로 쳐들어가게 하고 왕도 몸소 정병(精兵) 만 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 가야에 가니 응전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때마침 오랫동안 비가 오므로 왕은 군사를 돌렸다. 10년(서기121년辛酉) 1월에 익종(翌宗)을 이찬으로 흔연(昕連)을 파진찬으로 임권(林權)을 아찬으로 삼았다. 이월에 대증산성(大前山城:증산)을 쌓았다. 4월에 왜인들이 동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 12년(서기123년 榮亥) 3월에 왜국과 강화(講和)를 맺었다.


◆ 14년(서기125년 乙丑) 1월에 말갈(靺鞨)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북쪽변경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7월에도 대령책(大嶺桐·:大關嶺)을 습격하고 이하(泥河:江陵)와 덕원을 지나 계속 침략해 오니 왕께서 백제에 글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에서 오장군(五將軍)이 파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이켰다.
◆ 18년(서기129년 己巳) 가을에 이손 창녕이 죽어 파진찬 옥권을 이찬에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케 하였다.

◆ 21년(서기132년 壬申)에 왕이 돌아가셨다.


※ 7대왕(代王) 일성 이사금(逸聖尼師今 在位 134-154): 휘는 일성(逸聖)이다.


◆ 원년(서기133년 癸酉)에 즉위하였다. 왕은 유리왕의 장자이고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다. 비는 박씨로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원년(서기134년甲戌) 9월에 죄수들을 대사(大赦)하였다.

◆ 2년(서기135년 乙亥) 1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

◆ 3년(서기136년 丙子) 1월에 웅선을 이찬으로 삼아 내외 병마권(內外兵馬權)을 겸하게 하고 근종(近宗)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 4년(서기137년 丁丑) 2월 말갈이 군사를 일으켜 변경의 장령을 침입하여 오책(五權)을 태워버렸다.


◆ 5년(서기138년 戊寅) 2월에 정사당(政事堂)을 금성에 설치하였다. 7월에는 알천 서쪽에 대열(大閱 :군비검열)을 실시 하였다. 10월에 왕이 북변을 순시하시며 친히 태백산에 제사지냈다.

◆ 6년(서기139년) 8월에 말갈이 군사를 일으켜 장령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 7년(서기140년 庚辰) 2월에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비하였다.

◆ 9년(서기142년 壬午) 7월에 왕은 군신을 불러서 말갈 정벌을 의논 하였으나 이찬 웅선이 불가함을 말하므로 단념하였다.
◆ 10년(서기143년) 2월에 궁성을 수리하였다.


◆ 11년(서기144년 甲申) 2월에 왕께서 분부하기를,“一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二식량은 백성들이 가장 고귀하게 생각하는 것이니 모든 고을의 제방수리를 완전하게 하여 논밭을 널리 개척토록 하며 , 三백성들이 금, 은, 구슬, 옥을 쓰는 것을 금지토록 하라” 하였다.

◆ 12년(서기145년) 봄과 가을에 한재가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왕은 곡식을 지방으로 옮겨 구제하였다. 13년(서기146년丙戌) 10월에 압독(押督:慶山)이 모반하므로 왕은 군사를 내어 압독을 쳐서 평정하고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겼다.

◆ 14년(서기147년 丁亥) 7월에 왕은 군신들에게 명하여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장수가 될 재량이 있는 사람을 천거 하게 하였다.


◆ 15년(서기148년 戊子) 아도(阿道)를 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16년(서기149년己丑) 득훈(得訓)을 사찬(沙湌)으로 삼고 선충(宣忠)을 내마(奈麻)로 삼았다.

◆ 18년(서기 151년) 2월에 이찬 웅선이 죽어서 대선을 이찬으로 하고 내외 병마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 20년(서기153년) 10월에 궁성문(宮城門)이 재화를 입었다.

◆ 21년(서기154년 甲午)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 8대 아달라왕 이사금(阿達羅王尼師今 在位154-184):  


◆ 원년(서기154년 甲午) 2월에 즉위하여 왕호를 아달라왕(阿達羅王)이라 하였다. 일성왕의 장자로 어머니는 박씨로 지소례왕의 딸이다. 비는 박씨로 지마왕의 딸 내례부인(內禮夫人)이다. 3월에 계원(繼元)을 이찬으로 삼아 군국 정사를 맡았다.

◆ 2년(서기155년 乙未) 1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세사 지내고 죄수들을 대사하였다. 흥선(興宣)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 3년(서기156년 丙申) 계립령(鷄立嶺 :聞慶)의 도로를 개척하였다.

◆ 4년(서기157년 丁酉) 2월에 감물(甘勿 :密陽), 마산(馬山), 청도(淸道)의 세 고을을 설치하였다. 3월에 장령진(長嶺鎭 :江陵)으로 순행하시어 군사를 위로 하시고 모든 장병들에게 군복을 하사 하였다.


◆ 5년(서기158년 戊戌) 3월에 죽령(竹嶺 :충청. 경상도계)의 도로를 개척하였다. 왜인들이 수교하러 왔다.

◆ 7년(서기160년 庚子) 4월에 폭우로 알천이 넘쳐 금성의 북문이 허물어 졌다.
◆ 9년(서기162년 壬寅)에 왕은 사도성(沙道城 :盆德)으로 순행하시어 군사를 위로 하였다.

◆ 12 년(서기165년 乙巳) 10월에 아찬 길선이 모반 하다가 발각 되자 죽음을 두려워 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은 국서(國書)를 보내어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백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왕은 노하시여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가니 백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돌렸다.


◆ 14년(서기167년 丁未) 7월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서쪽의 두성을 습격하여 백성 천명을 잡아갔다. 8월에 일길찬 흥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고 왕은 군사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 :한강)로부터 싸움터에 이르니 백제는 크게 두려워 하여 사로잡아간 백성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 15년(서기168년 戊申) 4월에 이찬 계원이 죽어 홍선을 이찬으로 삼았다.

◆ 17년(서기170년 庚戌) 2월에 시조의 사당(祠堂)을 수리하였다. 10월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였다. 19년(서기172년壬子) 1월에 구도(仇
道)를 파진찬으로 구수혜(仇須分)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 사당에 제사 지냈다.

◆ 20년(서기173년 癸丑) 5월에 왜국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였다.

◆ 31년(서기184년 甲子) 3월에 왕이 돌아가시어 석탈해 왕의 손자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에게 양위 하였다.


※ 53대왕(代王)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 : 


원년 (서기912년 壬申) 4월에 김씨 효공왕(孝恭王)이 죽자 아들이 없음으로 국민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諱는 경휘(景庫)이고 아버지는 예겸(又謙)으로 정강왕(定康王)을 섬겨 대아찬(大阿湌)이 되었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며 비는 김씨로 헌강왕의 딸이다. 5월에 선고를 추존하여 선성왕(宣聖王)으로 삼고 어머니를 정화태후(貞和太后)로 비를 의성왕후(義成王后)로 삼고 아들 승영(昇英)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4년(서기915년乙亥) 6월에 참포(恭浦 :興海) 물이 동해물과 서로 싸워 물길이 20길쯤 높이 솟고 3일 만에 그쳤다.
◆ 5년(서기916년丙子) 8월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陝川)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승산이 없자 돌아갔다.

◆ 6년(서기917년丁丑)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신덕(神德)이라 시호하고 죽성(竹城:三陵園)에 장사하였다.


※ 54대왕(代王) 경명왕(景明王 在位917-923): 


원년(서기917년 丁丑) 7월에 아버지 신덕왕의 뒤를 이어 54대 왕에 즉위하였다. 휘는 승영(昇英)이고 비는 석씨(昔氏) 이다. 8월에 왕제 이찬 위응(魏潤)을 상대등(上大等)으로 대아찬 유염(裕廉)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 2년(서기 918년戊寅) 2월에 일길찬 현승(玄昇)이 모반 하다가 복주(伏課)되었다. 6월에 궁예의 밑에 있던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다.

◆ 4년(서기920년庚辰) 1월에 왕건과 수교하였다. 2월에 강주(康州) 장군 윤웅(聞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10월에 후백제 견훤이 보병과 기병 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함락하고 진례(進禮 : 금산)로 진격하므로 왕은 아찬 김률(金律)을 고려에 파견하여 원병을 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견훤이 곧 물러갔다.


◆ 5년(서기921년辛巳) 1월에 김률이 왕에게 말하기를, "신이 지난해에 사명을 받고 고려에 갔는데 왕건왕이 신에게 묻기를, ‘신라에 삼보(二寶)가 있다고 들었는데, 소위 장육 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과 성대(聖帶)라 하는데 상, 탑은 아직 있거니와 성대는 지금까지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하겠다.' 하므로 신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 군신들에게 묻기를, “성대 란 어떤 보물인가?" 하시니 아는 신하가 없다 하여 황룡사에 있는 90세 중에게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성대는 진평왕(眞平王)의 띠라 하는바 역대로 이를 전하여 남고(南庫)에 비장(秘藏)하고 있다 합니다.
하므로 왕은 날을 가려 제사를 드리고 성대를 찾아보니 금옥으로 꾸몄고 심히 길어서 보통사람들은 뛸 수가 없었다. 2월에 말갈의 별부 달고(別部達姑)가 북변을 침입하였는데 고려장군 견권진(堅權鎭)이 삭주(朔州 :春州)에서 기병을 거느리고 나가 이를 대파하고 필마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 6년(서기 922년壬午) 정월에 하지성(下枝城 :豊山)의 장군 원봉(將軍元逢)과 명주장군 순식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 왕건은 이들의 귀순을 우려하여 원봉의 본성(本城)을 순주(順州)로 하고 그에게 왕씨 성(姓)을 주었다, 이 달에 진보성(眞寶城)의 장군 홍술(洪述)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 7년(서기 923년)에 명지성(命旨城 :抱川)의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星,州)의 장군 양문(良文) 등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 8년(서기924년甲申) 8월에 왕이 돌아가시어 경명(景明)이라 시호하고 황룡사 북쪽의 삼릉원에 장사하였다. 왕이 팔공자(八公子)에게 분봉하였으니 장자(長子) 언침(彦忱)은 밀성대군(密城大君)으로 관(貫)을 밀양(密陽)이라 하고, 차자(次子) 언성(彦成)은 고양대군(高陽大君)으로 관(貫)을 고령(高靈)이라하고, 삼자(三子) 언신(彦信)은 속함대군(速咸大君)으로 관(貫)을 함양(咸陽)이라하고, 사자(四子) 언립(彦立)은 죽성대군(竹城大君)으로 관(貫)을 죽산(竹山)이라 하고, 오자(五子) 언창(彦昌)은 사벌대군(沙伐大君)으로 관(貫)을 상산(商山)라 하고, 육자(六子) 언화(彦華)는 완산대군(完山大君)으로 관(貫)을 전주(全州)라 하고, 철자(七子) 언지(彦智)는 강남대군(江南大君)으로 관(貫)을 순천(順天)이라 하고, 팔자(八子) 언의(彦儀)는 월성대군(月城大君)으로 관(貫)을 월성(月城)이라 하였다. 구자(九子) 교순(交舜)은 국상공(國相公)으로 관(貫)을 울산(蔚山)이라하였다.


※ 55대왕(代王) 경애왕(景哀王 在位 924-926)


◆ 원년:(서기924년 甲申) 8월에 경명왕(景明王)의 친아우 위응(魏膺)이 즉위 하였다. 비(妃)는 석씨(昔氏)이다. 9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수교하였다. 10월에 왕은 친히 나을 신궁에 나아가 제사 하시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 2년(서기925년 乙酉) 10월에 고울부(高鬱部: 永川)의 장군 능문(能文)이 고려에 항복 하였는데 왕건(王建)은 신라의 서울이 성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신라와의 수교를 생각하여 그를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 4년(서기926년 丁亥) 1월에 고려가 백제를 정벌할 때 왕은 군사를 내어 지원하였다. 3월에 황용사탑(黃龍寺塔)이 요동하여 북쪽으로 기울었다. 9월에 견훤이 고울부를 침범하므로 왕은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았다. 11월에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 가까이 쳐 들어왔다. 이 무렵 왕은 시조왕께서 창업하신 신라의 천년 사직(千年社稷)이 전란에 시달려 날로 기울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나아가 정성을 다하여 국가의 안위 (安危)를 기원하는 대제를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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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견훤(甄萱)이 군사를 풀어 장안의 공사 재물(公私財物)을 약탈하고 궁궐로 들어가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게 하였다. 군사들이 포석정을 습격하여 왕과 왕비는 물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에 이르기까지 수난을 당하였다. 견훤은 왕을 죽이고 김부를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삼으니 이가 곧 신라의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이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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