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박씨 행록(조선왕조실록) - 관향조 양정공 박령(朴齡) 졸기 및 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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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박씨 행록(조선왕조실록) - 관향조 양정공 박령(朴齡) 졸기 및 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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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박씨 행록

  관향조 <양정공(襄靖公) 박령(朴齡)의 졸기(卒記)> 세종실록 66권 세종 16년(1434년) 12월 24일 기록 >

원문(왕조실록) : ○前左軍都摠制朴齡卒。 齡字浩夫, 慶尙道義昌人也。 累遷判司宰、戶曹典書、判通禮、兵曹參議, 出爲江州鎭僉節制使、江華府使、江界節制使、慶源ㆍ朔州兵馬使、洪州牧使、黃海道都節制使、兼判海州牧事。 時太宗及上, 幸于海州等處, 齡與監司李叔畝郊迎, 序於監司之下, 太宗曰: “齡何以在監司之下?” 左右對曰: “監司雖嘉善, 是使臣也。 判牧事雖嘉靖, 是守令也。” 上曰: “齡乃舊臣也。” 賜坐監司之上, 賜御衣。 及還宮, 除資憲。 辛丑, 拜左軍都摠制, 齡勤儉有武藝。 及卒, 停朝市一日, 致弔致賻。 諡襄靖, 甲冑有勞襄, 寬樂令從靖。 中宮亦遣使致弔, 賜黃燭十丁, 以其戚連也。 有三子, 曰弘幹、弘信、弘智。
 
[번역문] <세종 16년 12/24 (정묘) 전 좌군 도총제 박령의 졸기>


“전 좌군 도총제 박영(朴齡)이 죽었다. 영(齡)의 자(字)는 호부(浩夫)이니 경상도 의창 사람이다. 여러 번 판사재(判司宰)ㆍ호조전서(戶曹典書)ㆍ판통례(判通禮)ㆍ병조참의로 옮기고, 나가서는 강주진 첨절제사ㆍ강화부사ㆍ강계절제사ㆍ경원삭주 병마사ㆍ홍주목사ㆍ황해도 도절제사 겸 판해주목사가 되었다. 그 때에 태종과 임금께서 해주 등처에 거둥하였는데 박령이 감사 이숙묘(李叔畝)와 더불어 들에서 영접하였는데, 서차가 감사의 밑에 있었다. 태종이 말하기를, “령은 어째서 감사의 밑에 있는가.” 하니,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감사는 비록 가선(嘉善)이나 사신이고, 판목사는 비록 가정(嘉靖)이나 수령 (守令)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영은 구신(舊臣)이다.” 하고, 감사의 위에 앉히고 어의(御衣)를 주고, 환궁한 뒤에 자헌(資憲)을 제수하고, 신축년에 좌군 도총제를 제수하였다. 령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무예가 있었다. 죽으매 조회와 저자를 하루 동안 정지하고, 조의를 표하고 부의(賻儀)를 보내었다. 시호(諡號)를 양정(襄靖)이라 하였는데, 갑주(甲胄)로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너그럽게 즐거워서 아름답게 쫒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 중궁도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황촉(黃燭) 열 자루를 내려 주었으니, 연척(連戚)인 때문이다. 세 아들이 있으니 박홍간(朴弘幹)·박홍신(朴弘信)·박홍지(朴弘智)이다.”


[편집자 주] 위의 왕조실록의 기록 중 세 아들은 오류이다. 사실 세 분이 아니라 네 분으로 박홍간(朴弘幹), 박홍직(朴弘直), 박홍신(朴弘信), 박홍지(朴弘智, 東智)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보첩에서는 네 분들은 2세 박손(朴蓀)의 아들이라고 전해져오고 있는데 성화보, 가정보 등에 나타난 기록 역시 2세 손(蓀)조의 존형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더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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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7년(戊辰2월26일 박령(朴齡)에게 치제하다>


원문(왕조실록): ○戊辰/賜祭于朴齡。 其文曰: 惟卿風神魁偉, 性行質直。 沈毅有勇, 才優將略。 兼通吏事, 早登仕籍。 遭遇列聖, 特蒙擢拔。 歷揚中外, 英聲煥赫。 分符數郡, 務存矜恤。 威惠竝著, 吏畏民服。 仗鉞諸鎭, 號令嚴肅。 臨機制敵, 屢著偉績。 予某嘉奬, 爰陞榮秩。 及使帝庭, 敷奏詳明。 眞稀世之良將, 而累朝之舊德。 頃緣沈綿, 投閑養疾。 意謂康復, 永爲喬木。 夫何一夕, 奄爾不淑! 訃音之至, 良深痛戚。 玆遣禮官, 伻陳菲薄。 靈其有知, 庶幾歆格。前此大臣致祭, 皆用敎書, 至是考古制, 始用祭文。


[번역]<박령(朴齡)에게 치제(致祭) 하다>

“박령(朴齡)에게 치제(致祭)를 내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경은 풍채(風采)가 크고 훌륭하며 성행(性行)이 질박 정직하였고, 침중(沈重)한 가운데 용기가 있고 그 재능이 뛰어났으며,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고 행정에도 능통하여 일찍부터 사적(仕籍)에 올라 열성(列聖)께 크게 인정 받고 특별히 발탁되어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아름다운 명성이 일세에 빛났도다. 두어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서는 힘써 백성을 애호하여 위엄과 은덕이 아울러 나타났고, 여러 진(鎭)의 장수로 나가서는 호령이 엄숙하고 임기(臨機)하여 적을 제어하여 누차 큰 공적을 세웠으므로, 내가 이를 가상하게 여기고 또 격려하기 위하여 이에 영화로운 품질(品秩)에 승진시켰던 것이며, 명나라에 사절로 보낼 때에도 진달함이 역시 상실(詳悉) 명백하였으니 참으로 희대의 양장(良將)이며 여러 왕조(王朝)의 덕 높은 원로가 아니었던가. 근래 병세의 깊음으로 인하여 한지(閑地)로 옮겨 요양해 오던 터이라 건강을 회복하여 길이 이 나라의 교목(喬木)이 되어 주리라 믿었더니, 어찌하여 하루 저녁에 덧없이 떠났단 말인가. 부음(訃音)이 이르니 실로 몹시 슬픈 마음 누를 길이 없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나를 대신하여 변변치 못한 것을 베풀었으니, 영령(英靈)이여 감동함이 있거든 흠향하기 바라노라.” 하였다. 이에 앞서 대관들에게 치제할 때는 모두 교서를 사용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비로소 제문(祭文)을 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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