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덕사사실 遠德祠事實, 원덕사 상향축문 遠德祠常享祝文, 원덕사지서 遠德祠誌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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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사사실 遠德祠事實, 원덕사 상향축문 遠德祠常享祝文, 원덕사지서 遠德祠誌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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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사사실 遠德祠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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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원덕사 사실


원덕사는 밀성대군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으로 19중시조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다.
충청북도 이원면 용방3길 88-35, 중구봉 아래에 있으니 즉 승지 박인령(仁齡 : 밀성군 척의 후손)묘소 아래 재실의 남쪽이다.
뒤에는 선산 곽씨의 세거촌이 있고 앞으로는 적벽상에 임하였으니 그 근원이 남쪽으로 무주 금산 등으로 부터 동쪽으로는 상주 영동군 등에서 시작되어 심천강(深川江)에 이르러 금강에 합류하여 들어간다.
남쪽으로 월이산(月伊山)이 있으니 높고 우뚝하며 바위가 우둘우둘하여 산세가 매우 웅장 준엄 하고 북쪽으로 용문서당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며, 수옹(睡翁) 신조(申祚)의 유허비와 우암 송시열의 배태실(胚胎室)이 있다.
서쪽으로 옥천읍이 삼십리요 이원역이 십리이다. 신라기원 1977년 임술년, 서기 1922년 봄에 멀고 가까운 박씨 후손들이 합의하여 사원을 짓고 같은 해 동지달, 즉 11월에 대군 신위를 봉안하고 다음 해 계해년 1923년 6월 5일에 19중조(中祖)를 함께 모시고 편액을 원덕사라 하였다.
무릇 끝을 신중히 하고 지나간 먼 일을 그리워하면 백성의 덕이 두텁게 된다는 신종추원 민덕귀후: 논어에 나오는 말(愼終追遠  民德歸厚) 뜻에서 취한 것이다. 매년 봄 3월 15일에 제례를 올리는데 축문과 창홀 등 제사 지내는 법식은 공자 문묘의 석전 의식과 대략 같고 사계 초하루 보름에 유사를 정하여 분향한다.
삼가 살피건데 앞서 박정구 인구 만구 정구 경구 등(승지 인령 후손)이 대군의 오랜 궐향(제사하지 못함)의 일을 개탄하여 그들의 선조 승지공 묘 아래에 정결하게 흙으로 단을 모으고 동지날에 대군의 추모제를 지내온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근자에 종족들이 서로 전하고 널리 펴서 박진하(振夏:국당공 후손) 박성립(性立:낙촌공 후손)이 종사의 규약을 만들고 사당 짓는 역사를 시작하여 임술년(1922년)에 낙성 하였다. 무릇 정묘가 3간이요. 신문이 3간이요 전사청이 6간이다.


위판(신주)는 밀성대군 신위을 주벽으로 하여 가운데에 모시고 거느린 분들은 양분하여 중조의 연대 차례에 따라 동서 양벽에 함께 모시니 동벽에 11위요 서벽에 10위이다. 동벽 11위는 밀성부원군 휘언부, 상서좌복야공 휘 언인, 판도판각 휘 천익, 사문진사공 휘 원, 사헌규정공 휘 현(鉉) 영동정 휘 원광, 전법판서공 휘 인우, 구산군 휘 천, 대제학 휘 시용, 이조정랑 휘 수, 수사공 휘 근(瑾) 그리고
서벽 10위는 도평의사 휘 언상, 밀직부사공 휘 양언, 삼사좌윤공 휘 을재, 밀성군 휘 척, 밀직부원군 휘 중미, 태안혜문 휘 원의, 정국군 휘 위, 창원군 양정공 휘 령, 반풍군수 휘 치온, 부호군(副護軍) 휘 태익이다.
이 사당의 내력이 구룡지(九龍誌)에 자세히 보이는 바 이후의 여러 사업을 그 책에 빠짐없이 기재하여 종족들에게 인쇄 배부할 계획이므로 이 정도로 대략을 밝혀둔다.

전교관 박성립(性立)지음


(원덕사 사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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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사 상향축문 遠德祠常享祝文

(역문)
유 세차 년 월 일에 후손 모는 감히 고합니다.
현 선조 신라왕자 밀성대군이시여 엎드려 생각하오니 큰 나라의 원자요 큰 고을의 주군으로 덕택이 천년토록 내리고 자손이 팔도에 둘러 있으니 멀수록 추모하는 마음 석덕을 본듯합니다. 이에 계춘에 공손히 제를 올리오니(종향한 열위를 같이 씀) 흠향 하소서.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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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사지서 遠德祠誌序

(역문)
옥천(沃川)에 원덕사(遠德祠)는 밀성대군(密城大君)이하 二十一위의 영혼을 모신 곳이니 후손 강와공(剛窩公)이 창건한 자요, 사우(祠宇)를 새롭게 중수하여 여러 만양의 거액을 조달한 자는 선비 장규(莊圭)이다. 대개 五十년래로 부터 봄 가을로 이슬과 서리가 내릴 때에 제사를 올리었는데 매양 화수(花樹)의 강론까지 겸하여 추원보본(追遠報本)으로 선조의 덕을 닦는 의기가 지극했다. 또 사우가 있으매 가히 사지(祠誌)가 없을 수가 없다 하여 하나의 책을 편성(編成)하여 발간하게 하는 자는 강와(剛窩)의 아들 연와(淵窩)와 장규(莊圭)이니 또한 가히 잘 이어서 편술 할 것이며 아울러 후세에 전할 말이 있으니 아! 위대하지 않는가!
무릇 이 사우에 들어와서 이 책을 읽는 자는 받드시 뭉클하여 중심에 감상이 있을 것이니 강와의 뜻으로 뜻을 삼으며 장규의 정성으로 정성을 삼으며 연와의 사업으로 사업을 삼은 즉 대군(大君)의 후손되기에 욕됨이 없을 것이요. 또한 세 분의 공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강와공의 휘는 만구(滿九)요 그분의 형님은 옥성재(玉成齋)이며 휘는 정구(珽九)인데 송연재(宋淵齋) 송심재(宋心齋) 두 선생의 고제(高弟 : 제일 훌륭한 제자)요 연와(淵窩)의 이름은 연호(淵浩)인데 일찍부터 우리 선고(先考) 고옹(固翁)에게 수업하였으니 가히 학문의 연원(淵源 : 선생과 제자의 전하는 전통)이 주고 받은 바가 있음을 보겠다. 장규씨는 이름과 직위가 다같이 높았고 위선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영지(靈芝)와 예천(醴泉 : 두가지가 모두 根源이 있음)을 가히 상상할 수가 있다. 일찍이 교정의 일로써 우리 형님 성재공 재직(誠齋公在直)에게 부탁하였는데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다시 나에게 서문 쓰기를 요구하니 이제와 예전을 생각하매 더욱 슬픈 눈물을 금할길이 없다. 그러나 나도 또한 남의 착한 일 이르기를 즐겨하므로 감히 사람이 못나고 지식이 천박하나 사양하지 못하고 이름을 붙치는 것으로 영광을 삼으므로 대강 위와 같이 서술한다.

계축(癸丑) 一九七三년 사월하순에 덕은(德恩) 송재욱(宋在郁)삼가 서함.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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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덕사 영건사실

신라기원 一九七五년 기미(一九一九) 十월十일 정구(挺九)가 그 아우 만구(滿九,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에 거주함)로 더불어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의 재실(密城君諱陟之后朴仁 밀성군휘척지후박인) 묘하에서 세일사를 지내매 어른과 젊은이가 모두 모여서 제사를 잘 모신 후에 정구가 좌석 가운데 나가서 탄식하며 말하되 근대 할아버지의 산소에는 세일사를 궐한 적이 없는데 밀성대군에 이르러서는 우리 박씨의 본관을 받은 중조로 온 나라에 그 자손이 번성하여 그 숫자가 헤아릴 수가 없는데 오히려 시달(豺獺 : 김성으로 제사를 지내어 보본 함줄을 알음)의 보본을 궐하였으니 이게 어찌 후손의 도리가 되겠는가.
친근한 데에 풍족함이 없음은 「서경전사(書經典祀)에 무량간닐(無量干昵)」 옛사람의 경계한 바이나 공덕이 있는 조상에는 사당의 제향도 가할 것이요.
단소의 제향도 또한 가하므로 당연히 여러 백세에 제향을 지낼 것인데 지금 千年에 이르도록 향화(香火)를 전폐하게 되었으니 이게 우리 종족의 결함된 일로 선조 제현께서 뜻을 두고 펴지 못한지가 오래인데 옛 숭정(崇禎 : 명의종 년호(明毅宗 年號) 갑술(一六三四)에 외손 이유달(李惟達 : 全州李氏)이 본도관찰사로 부임하매 본손 및 유림으로 더불어 영남루에 제향을 올리고 대군의 사우를 창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후 병진(一六七六)에 정국군 후손인 전 군수 문호(文號 : 밀양 하서에 있다)가 청도.밀양의 여러 종족으로 더불어 사우 건립의 일을 상의하여 목재를 베고 주초를 운반 하였는데 마침 흉년을 만나서 건립하지 못하였으니 시운이 도달하지 못하고 성의 조차 미체한 것이 아닌가 통탄을 금하지 못하겠다.

사우를 건립하는데 이르러서는 졸연히 시작할 수가 없고 먼저 설단하여 제향을 올리는 것이 의례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니 여러분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니 여러 일가들이 같은 소리로 옳다고 하므로 드디어 설단의 의논을 정하고 十一月十一日이 동짓날이다.
만구로 하여금 일가 사람들을 인솔하고 드디어 재실 서쪽 언덕 위에 설단하는데 반나절도 못되어 필역하고 맑은 술과 생육의 제수로 공손이 대군께 제향을 올리되 한결 같이 정부자(程夫子)의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예절을 갖추었다.

이튿날이 동지인데 인구(仁九)가 호남으로 내려가 각처에 거주하는 종인들을 교섭하매 먼저 정읍에 박만환(朴晩煥)을 찾아 사우 건립의 의의를 말하니 만환이 또한 극구 찬성하며 즉시에 그 근방 종인들에게 선포하여 한 소리로 협조하게 하고 만구. 인구는 또 여러 읍을 순방하면서 보본의 의거를 광포하니 두어달 사이에 뜻 있는 종족들이 같은 소리로 협력하여 다시 사우 건립의 의논을 정하고 이날에 가장 먼저 참석한 자는 인구(仁九) ․ 정구(情九) ․ 경구(慶九) ․ 내규(來奎) ․ 내억(來檍) ․ 승욱(承郁) ․ 형겸(亨謙) ․ 태훈(泰勳) ․ 만환(晩煥) ․ 태영(台永) 여러 사람이다.

본소에 있는 종인이 호남을 왕래할 때에 여러번 승주(昇柱)를 심방 하매 반드시 관대하고 후하게 여비도 주고 다소간의 금액을 보내어 본소에 궁박함을 모면하게 했다. 경신(一九二ㅇ) 六월달 어느날에 구룡촌 제사에서 종회를 개최하였는데 회의 목적은 대군의 사우를 영건할 때에 임원 배정의 일이다.
공의로 추천하여 소장은 희명(喜明)이요, 도유사는 내억(來檍)이요, 부유사는 내규(來奎)요, 재무유사는 만구(滿九)로 정하고 통문을 발간하여 각처 종족에 발송하였다.
이해 十一월 동지에 단소에서 제향을 올리고 같은 날 자시에 토지 신위에 제사 지내고 드디어 사우의 기지를 개척하여 목재.주조.기와를 운반했다.
사우의 제도는 정전이 四칸이요 반신 문이 四칸이며 목수인즉 찬구(贊九 : 순천(順天)사람)이요, 부약장은 전 참판 남현(南鉉 : 진원(珍原)사람) 이다.

○ 옛날 발기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 현령 박희 ․ 유학 박수춘 ․ 첨지 박종서 ․ 봉사 박이문 ․ 주부 박사순 ․ 참의 박응성 ․ 봉사 박의룡 ․ 수문장 박승선 ․ 동지 박경만 ․ 주부 박천세 ․ 정로위 박사인 ․ 어모 박구 ․ 정로위 박항지 ․ 충찬 박담 ․ 충순 박복 ․ 봉사 박항의 ․ 봉사 박이눌 ․ 사복 박진남 ․ 사과 박정 ․ 유학 박영진 ․ 보인 박경립이요 유림에는 안패 ․ 김시성 ․ 이유 ․ 장희적 ․ 안호 ․ 신명희 ․ 손기양 ․ 안종한 ․ 민효선 ․ 조기창 ․ 조명주 ․ 권규 ․ 손창도 ․ 하윤성 ․ 여러 사람이다.

■ 원덕사 기문 


원덕사는 오직 우리 대군과 여러 중조를 배향한 곳이다.
신라시조로부터 이하 十왕인즉 경주 능전에 숭봉되었고 밀성대군은 실상 우리 본관을 받은 시조로서 우리 한 없는 복록을 열어 주시었으니 아 ! 공덕의 성대함이 현달하지 않았던가. 사당을 당연히 백세에 조천(祧遷 : 4대가 지내면 신주를 매안함)하지 않을 것이요, 묘소도 당연히 천년을 수호할 것인데 예견(裔甄 : 신라를 반역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 반역을 일으키었고 병화를 여러번 겪었으며 기송(杞宋 : 위에 보였음)이 쇠약하여 문헌의 징빙이 없으므로 향화를 궐한지가 오래되었고 그 후에 十二중조 및 분관의 十八중조인즉 각각 자기 집안의 파조가 되므로 국조(國朝 : 이조(李朝)) 이래로 자기의 파와 자기의 조상에 서원과 사우와 단소에 항상 제향이 있었으나 대군인즉 미칠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풍부하게 하지 말라는 경계에 유감이 없으리요. 후손이 된 자로는 누구나 개탄이 없지 않다.


숭정 갑술(一六三四)년 이유달이 대군의 외후손으로 밀성부사로 와서 외선조의 면최(綿蕞 : 띠를 묶어 表位한 묘소와 같음)의 징험이 없음을 감탄하여 남루 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에 참배한 사람이 백여명이 되었다.(이때 참배한 사람은 본손 및 외손인데 성자와 휘자는 모두 대종안록에 실려있다) 이후로부터 사우에 배향하자는 의논이 어어져 왔으나 여러 의논이 일치되지 못하였더니 지나간 병진(一九一六)년 가을에 선고 당암공(棠菴公 : 영덕 군수를 지냈음)께서 청도.밀양에 여러 종친으로 더불어 발의하여 통문을 보내고 터를 닦고 물자를 운반하는데 때마침 흉년을 만나 미뤄지매 이루지 못하였더니 기미(一九一九)년 겨울에 영동(永同)에 여러 종친들이 여러 자손의 마음을 먼저 발론하여 처음에는 오족잔게 설단하였다가 나중에는 완전하게 사우를 건립하고 제물의 절차와 예문의 구비함이 족히 퇴패한 풍속을 격려 할만 하였으니 후손의 한스러움이 이로부터 조금이나마 펴게 되었다.

대개 이 사우를 창설할 적에 정구.만구가 주창하고 진하.성립이 주선하여 팔도에 통문을 보내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한 푼 두 푼을 모으고 곡식 한 톨 실 한 오라기를 싸서 큰 일을 완공하였으니 그 돈독한 성의와 쓰라린 심정은 가히 모든 종족의 모범이 될만하다. 해철이도 선조의 일에 뜻을 두지 않음이 없으므로 날마다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무진(一九二八)년 봄에 3대조의 단비를(세분 대조는 밀성대군. 삼한벽공도대장군.요동독포사공) 밀양 서쪽 무안의 건좌에 세웠는데 단소의 제도가 엄숙하고 정결하며 재각이 웅장하여 가히 제 자손이 우러러 볼 곳이라 하겠다.

그런 후에 계승 할 계책이 막연하니 이게 미리 걱정되는 바이다. 기사(一九二九)년 봄에 족질 준표(準杓)와 더불어 말을 같이 타고 와서 제향에 참석하고 인하여 그 일의 전말을 기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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