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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이조참판 휘 유원 신도비명병서 嘉善大夫吏曹參判朴諱由元先生神道碑銘並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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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善大夫 吏曹參判 朴(諱)由元 先生 神道碑銘 並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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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위치 지도 좌표 : 34.76758, 127.31586 클릭하세요 



維高興郡大西坊元形山枕丙之原有四尺之封若堂答*然松柯拱而豬蒼實嘉善大夫吏曹慕判朴 先生衣舄之藏也
여기 고흥군 대서 원형산 기슭 병좌에 잠들어 있는 사척의 봉분이 있는데 집을 짓기 위한 것 같이 도끼로 소나무 가지를 잡고 다듬어 울창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 박선생께서 옷 입고 신발 신고 누워 있는 곳이다。


過者點指而咨嗟樵牧相戒勿近該子姓環壟匝居不改其鄉井襌襲詩禮菀爲南中聞族盖德備躬 慶流後已有古語是豈無所自也哉
지나가는 사람도 손으로 가리키면서 애석하다고 하며 나무하고 짐승 기른 자들도 서로 경계하고 가까이 못가게 하며 그의 자손들은 언덕 주변에 두루두루 모여 살면서 그 고향 땅 물먹으면서 떠나지 않고 대대로 시와 예를 읽고 울울창창 하였으며 남쪽 땅 가운데서 덕을 갖춘 문족이라 들었으며 경사가 후에까지 유풍하여 소유할 것이다。옛날 사람들이 하는 말에 스스로 어찌할 바가 없다고 할 것인가?


後孫以墓儀率略茹恨久矣今乃斲石而具螭龜之制属余以銘之余惟生晚半千載之下顧何以髻 像乎
후손들은 묘소 앞에 간략하게 꾸미고자 함은 오랫동안 한이 되었는데 이제 돌을 깍아 뿔 없는 용과 거북이의 좌대를 갖추어 다듬어 두고 나에게 와서 비문을 말하니 나는 오직 태어남이 늦어 반천년의 후가 되었는데 어찌 글로써 형상을 비슷하게 돌아볼 수 있으리요.

志行之萬一歟乃»括其狀而敍之曰公諱由元字元瑞號放遊亭朴本新羅國姓密城大君諱彥忱 爲上祖諱郁大將軍緯乙材三司左戸律奇麗明宗朝術尉禮賓承同正知門下侍中同平章事昌原 君始分貫焉
품은 뜻과 행실을 만에 하나라도 바로 잡기 위해 그의 장초를 살펴보니 공의 휘는 유원이며 자는 원서요, 호는 방유정이라 박씨의 본은 신라 국성으로 밀성 대군 휘 언침이 상조요, 휘 욱은 대 장군이며, 휘 을재는 삼사좌윤이며, 휘 기는 고려 명종조에 위 위례빈승동정지문하시중 동평장사로 창원군에 봉하여서 처음으로 분관이 되었다。

至諱齡文侍郎亦封昌原諡襄靖文章德行享沃川遠德祠窆其曾祖祖緯蓀大護軍有勲考緯東智 太祖朝進士遯于興陽縣南陽里妣吏曹判書鄭天益女公以降于
이어와 휘 령은 문시랑으로 또한 창원군에 봉하고 시호가 양정으로 문장과 덕행으로 옥천 원덕사에 배향되었다。식은 그 증조며 조의 휘는 손대호군으로 훈공이 있었으며 고의 휘는 동지로 태조조에 진사로 흥양현 남양리에 둔거하였으며 비는 이조판서 정천익의 딸로 공과 같이 하였다。

洪武戊辰天賦頎嶷髫齡凝定如成人幼習字學採問天地日月所以生及至經史深叩義理師不能 答異之曰此兒必成大器舍功令傾注身心工夫尤致力於易經驗休咎之理事親極志體養居憂廬 墓有一鹿護共三年之異
홍무무진(서기 1388)년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천성이 우뚝하고 헌출 하였으며 어린 나이에도 성인같이 침착하게 집중하여 어려서부터 글자와 학문을 익히고 탐문하며 천지 일월의 태어난 이유를 알기 위하여 경사를 연구하는데 지극 하였고 깊이 의리에 대하여 선생에게 묻고 대답이 불가능하면 다르다고 말하니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일을 이룰만한 사람이라고 하였다。문과에 시험 보는 것을 업을 삼고 몸과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공부에 더욱 힘을 다하였다。역경을 증험하는 데 이치를 지나가거나 쉬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기는데 극진이 뜻과 몸을 양지하였다。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할 때 한 마리 사슴이 삼년 동안 함께 보호하니 특이함이 있었다。

太宗朝文科歷禮曹皋議世廟丁未轉三銓丙辰陞嘉善階拜吏曹皋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五衛 都摁府副摁官一時名頌如陽村權公龜亭南公月亭柳公相與酬唱有什乃知足勇退時人擬之二 疏云爲政于
태종조 문과로 예조 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세종조 정미(1427)년 이조 참의에 전임하고 병진(1436)년 가선에 올랐으며 또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오위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니 일시에 명성이 크게 났으며, 양촌 권공과 귀정 남공과 월정 유공 등과 같이 시가를 서로 주고 받는 일이 있으며 많은 것을 쫓아 알고 용퇴하니 이때 사람들이 두 번이나 소를 올려 정사를 하게 하였다。

家訓子孫以孝友課讀課耕手植三槐又種花竹密陰滿庭清香襲人擇爽塏地置小亭顏之以放宴 處於是默誦朗讀者心經易解悦親戚而笑語款洽樂賓朋而琴酒自寬任放自適不知老之
가정에서 자손을 훈계할 때는 효도와 우애로써 하고 글 읽는 것을 일과로 하면서 밭 가는 것도 일과로 삼았다。느티나무 세 그루를 식수하고 다시 꽃과 대나무를 심어서 녹음이 가득하여 뜰에는 맑은 향기 사람에게 스며드니 상쾌하고 맑은 땅 가려서 산 우뚝한 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서 방유정이라 하였다。즐거운 곳에서 조용히 풍류하고 글 읽는 자 마음의 경락을 쉬이 풀어서 친척을 기쁘게 하여주고 웃으며 말하면 친절하고 정성스러웠으며 좋은 친구들과 거문고와 술로써 스스로 너그럽게 돌보며 간섭하지 않고 구애됨 없이 즐기니 늙는 줄 알지 못하다。

將至倏然有出麓之高風然戀闕之誠有不能自己夜輒向斗而拱揖庚午九月十曰易簀有文集 純廟己丑俎豆於龍岡祠配貞夫人尚州金氏父形曹黍判鎰己巳三月八日癸酉九月二十日其生 卒也墓雙塋
따라 살피니 숙연함에 이르고 속세를 벗어나 있어도 옛날의 모습을 그리워 하여 궐하지도 않고 정성을 다하였으며 자기의 능력이 없더라도 밤이면 오직 북두칠성을 향하여 두 손을 모아 상왕에 배알 하다가 경오년 구월 십일 임종하였다。문집이 있었으며 순조 29(서기1829)년 용강사에 배향하고 배 정부인 상주 김씨는 아버지가 형조 참판 일의 딸이다。기사년 三월 八일과 계유년 九월 二十일은 그의 생일 및 졸년이며 묘는 부군과 같이 쌍영하였다。

二男一女泰首同樞泰顢生員婿淳昌趙有仁長房孫彥碩大司憲女僉使礪山宋有貞次房孫世滎 皋奉贈吏議世亨女南陽宋弼世榮男紿壽僉正壬燹義捐軍需扈駕龍灣而殉贈友承旨從享 龍岡
이남일녀로 태수는 동추며 태옹은 생원이요, 사위는 순창 조유인이다。장방 손언석은 대사헌,  딸은 첨사 여산 송유정 차방손 세영은 참봉으로 이조 참의에 증직 되었고, 세형의 딸 남양 송필, 세영 아들은 태수인데 첨정으로 임진왜란에 의연이 군수물자를 가지고 용만까지 어가를 호종하고 순절 하니 좌승지에 증직되고 용강사에 배향 하였다。

長房五世孫弘世黍奉有裕酪丁酉討偻樹勲以李忠武公馳檄戰亡于倭橋特贈左贊成從享龍 岡三世俎豆於一所今古所罕有觀其自序中歸臥湖海烟月裡便爲天地無事人之句槩可以想象 其志節而至出處顯晦之方非蠡測所可及也
장손의 5세손 홍세는 참봉으로 육도 삼략을 읽혀 정유왜란에 왜병을 토벌하여 수훈이 있었고 이충무공에 말을 달려 격문을 전하고 왜놈과 싸우다가 왜교에서 전사하니 좌찬성에 증직되어 용강사에 배향하여 3세를 한 곳에서 제사하다。고금에 드믄바요, 그의 저서를 보는 가운데 호수와 바다와 연월 속에 누워있고 다시 천지 속에 사람으로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는 글귀가 있으니 가히 그 뜻과 지조를 상상할 수 있고 출처가 세상에 현달함과 은둔한 곳에 이르면 소견이 천박한 것이 가히 미칠 바가 아니다。

謁余爲文者采夏準淇盥薇拜手而銘曰忠孝名門維公挺特劬經窮理德器成夙早登蓬瀛绯衣 卿秩歸來梓鄉二疏同節一鹿護廬三槐蔭宅遨遊有所任放自適三世尸祝往膘罕覿予孫振振尊 于南國愈遠愈慕起義注的山川增彩有屹片石
나를 보고 글을 부탁하는 자는 채하, 중기 두 분이다。세수하고 손잡고 절 하면서 문으로 오직 공은 빼어나 힘써서 경서를 궁리하니 덕기가 성숙하여 일찍이 봉영 땅에서 벼슬길 올라 붉은 옷을 입고 벼슬을 차례 차례로 마치고 고향 땅으로 돌아와 두 번 상소를 올리고 함께 절개를 지키었다。
시묘살이 할 때 한 마리 사슴이 와 보호하여 주었고 느티나무 세 그루 은혜 입은 집에서 즐거이 놀면서도 두루 간섭하지 않고 구속됨도 없었다。3세를 시축한 오가는 편지 한적 하니 자손들은 진진한 남쪽 땅을 존경하고 멀리서 더욱 더욱 추모하니 우리는 물을 대는 듯 일어나 산천도 더욱 다채로운데 우뚝이 높은 곳에 편석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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