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진사 호은 박휘동지공 유허비 成均進士 湖隱 朴諱東智公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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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진사 호은 박휘동지공 유허비 成均進士 湖隱 朴諱東智公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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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 湖隱 朴諱東智公遺墟碑


水不忍廢地不忍荒裎伯子銘顏樂亭語也奚但後學之於前賢後孫之於先祖亦當如是矣我藝 祖開國之初萬物咸覩湖隱朴公一舉而成進士若將展步康莊及夫定宗庚辰不祭仕進條然遵 海而南遯興陽之上南託跡烟月養性林泉嘻其跡微矣其志遠矣松沙奇公之碣文擬倫於富春山 之逸民其亦爲後之子雲歟公諱東智字震甫湖隱其別字也昌原君龄其祖金海府使蓀其考公生 於麗之恭愍朝戊申殁以年六十五世宗壬子有三子日由元吏黍虢放遊亭日由貞户皋日由昌 左承旨烏庠公惜福之效不于躬而傳諸子孫不但放遊公爲一時名勝所推重至玄孫萬根縣監大 連訓判貽壽僉正壬燹有軍功 贈효承旨六世而弘世皋奉丁酉亂倡義赴孪忠武幕立懂贈贊成 與故遊僉正同享龍岡祠而華訓鍊主簿秀元兵議十二世而師文大司諫其餘詳具大竭今不能殫 舉其非公樹德流澤之深厚乎今雲仍伐石表世屬純命文之嘉其孝思愈遠不忍地水廢荒之義不 敢以老病而辭謝使鞠蕪先業者#所觀省
癸卯暮春者永嘉權純命識


성균진사 호은 박휘동지공 유허비


물을 외면하면 안되고 땅을 묵히면 안된다고 한 말은 정명도 선생이 안락정에 붙인 글에 있으니, 어찌 다만 후학이 선현을 위하고 후손이 선조를 위하는 데만 이같이 하라는 말씀이겠는가? 우리 태조대왕 개국이 처음에 만인을 두루 포용하셨지만 호은 박공이 단번에 진사에 올랐으니 이런 재조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었거늘 정종 경진년에 벼슬길을 좋아하지 않아 훌적 바다를 좇아 남으로 내려와서 흥양(고흥)에 자리 잡고 연월로 을프고 임천을 사랑하니 아! 그 포부를 알 길이 없고 그 뜻이 요원하도다。


송사 기공의 묘문에 부춘산 업자릉과 흡사하다고 했지만 모든 것이 후대의 자손을 위해서 영위한 일인 듯 하다。공의 휘는 동지, 자는 진보요, 호은은 그의 호이니 창원군 령이 그 조부요, 김해부사 손이 그 부친이다。공은 고려 공민왕 무신년에 탄생해서 六十五세 되던 해 세종 임자년에 몰했으며 세 아들을 두었으니 유원은 이조 참판 호는 방유정이요, 유정은 호조 참판이고 유창은 좌승지를 지냈다。


아! 공의 복을 아낀 효력이 자신에게는 관계없고 후세 자손에 미쳤으니 방유정 공이 일세 명사로 추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현손 만근은 현감이고 대련은 훈판, 태수는 첨정으로 임진란 때 군공이 있어 좌승지에 추증 되었고, 6세손 홍세는 참봉으로 정유왜란에 의병을 모아 이충무공 막하에 다다라 전몰해서 찬성으로 증직 되었고 방유와 첨정은 함께 용강사에서 제향을 받든다。


이화는 훈련주부, 수원은 병조 참의요. 12손 사문은 대사간이니 그 나머지는 큰 비석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이루 다 적지 못하거니와 이것은 공이 쌓은 음덕이 깊고도 후하게 흐름이 아닌가?  지금 후손들이 돌을 깎아 비를 세우려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니 선조를 위하는 효성이 지극함을 아름답게 여겨 감히 노병인데도 칭탁에 사양하지 못하고 이 글을 썼으니 위선사업이 소홀한 이들로 하여금 보고 반성함이 있기를 바란다。

갈명에는 공민왕(庚申年生) 六十三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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