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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弘智)祖의 배후와 공신(恭信) 휘(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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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의 홍지(弘智)祖 는
안동권씨성화보를 발간 하는 1476년 즈음에는,
부친이신 령(齡) 졸(卒)후 42년 뒤 입니다.(1476-1434=42)
혹,
홍지(弘智)祖 는 부친 졸 년에 출생 하셨어도,
1476년 에는 42세 라는 증거 이지요.

대개의 경우
이 당시 일반적으로
20세 되면 대부분 혼인 하며,
좀더 일찍 혼인 하신분은 15세 에도 흔 한 경우 입니다.

그러 하다면,
고흥가(高興家) 홍지(동지)조 의 세 분의 아드님.
유원(由元)
유정(由定)
유창(由昌)
이 세분은 아주 늦은 출생이 맞습니다.

다만 132번 글(도표)에서 보듯이
이미 두 적녀(適女)는
출가 했음이 증명 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두 딸은 출가를 시킨 상황에서
세 아들을 늦게 두신 것 으로 봐야 할 것인데,
도무지 맞지 않는 그림이 나옵니다.

아무리 부친이신 령(齡)께서
졸 하신 해에 출생 한다 해도
두분의 누님들 과 의 년대가 20년 차이가 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틀린 생각 일까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 하여,
무조건 홍지(弘智)祖의 존재는 명확 한 일 입니다.
그러 할 진데,
이러한
맞지 않는 (이 당시 자료에 나타 나지 않음)것은
홍지(弘智)祖 의
후배(後配)가 실재 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또한,
우리 파조 이신 홍신(弘信)祖의
공신(恭信) 휘(諱)에 관 한 일 입니다.
유추 해 봅니다.
보성오씨(寶城吳氏)와 연관 짓지 않을수 없어 보입니다.(추후 해부예정)
통구리 홍신 조의 구비 비갈문에 의하면
홍신 조는 1488년 졸 이십니다.
1488(홍신졸년)-1434(령 졸년) = 54년,
즉 홍신 조 께서는 부친 여의고 54년 더 사신 것 입니다.

그렇다면,
홍신(공신)조와 아우인 홍지 조는 얼마의 나이 차가 났을까?
유추해 보면 령(齡)祖 께서는 죽산안씨 부인 에게서 7남매를 두셨는데요.
홍신(공신),홍지 두분은 요즘 말로
늦둥이로 보아도 무방 하리라 보여 지는데요.
즉,

홍신(공신)祖 윗 분들은 자식들을 모두 혼인시킨 상태를 볼 수 있으므로,
홍신(공신)祖 께서도 두 적녀는 츨가 시킨 상태 입니다.
홍지(고흥파보)祖 의 상기 세 아들은 후배의 소생으로 믿을 수 밖에 없지요.

이미 성화보를 간행할 당시(1476년)에 경(璟)조의
존재는 확실 하게 등장 하는 점에 주목 하시면,
의문은 해소 됩니다.
즉,
성화보 발간 후 3년 뒤 1479년(성종10년 기해)에
별시에 등과 하는 점입니다.

신동(神童)으로 등과 하시는 것 이 아니라
려절(勵節)교위(校尉) 라는 종6품(從六品) 관리를 하시다가
문과 별시에 등과 하신 것 이므로,
아무리 빠른 나이에 등과가 아닌 음직(陰職) 출사 함은
이 시기 에는  20세 정도 연령 이 일반적 입니다.
그렇다면,
경(璟)祖 역시 이즈음에는 필히 혼인 했을 것 입니다.
그러함에도,
후손 이 성화보에 나타 나지 않는점은,
후사를 보심이 늦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즉, 여명(汝明) 자(子)도 출생이 무척 늦은 것으로 중명 되는 것 입니다.
아니라면,
혼인 하지 않은 상황일 수 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 자료를 우리 집안에서
안동권씨 가문에 넘긴것이 확실 할진데,
이 방대한 자료를
안동권씨 가문에서도,
하루 이틀에 수집은 불가 했었을 것이므로
경(璟)의 혼인 이전에 우리집 자료를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설령 그럴지라도 경(璟)祖 의 생원(生員)표기는
혼인후, 출사 하기 전의 명칭 이기에 ...
미혼인 경우 는 생원 이란 칭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한번 더 내 생각을
적어 보겠습니다.

이러한
복잡함은
날로 혼탁해지는
정신과,
날로 늘어나는
버려지는 뇌세포에
이끌려
졸림으로 흘러 갑니다.

                                      

                                  新羅紀元2069壬辰11月28日

                                   양정공   후예

                                         甲    洙    拜手稽首謹識


사족) 이러한 고증에 대비해 보면, 우리의 가첩이란 것이 얼마나 무성의 하며, 무책임 하게 제작 되었는가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나마, 장단 주관의(1957년 교룡祖 간)가첩은 손(蓀), 홍신(弘信)祖의 대마도 정벌시
전사를 제외 하고는 년대는 오차가 있다 하더라도, 사실을 담아 냈다는 점은 아주 대단한 산물로 생각 하며,
이러한 진실을 추구함에 저 역시 혼신의 힘을 보태고자 함이며, 한 가지라도 증거를 담보 하는 것이 후손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지극히 당연한 일 일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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