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와 고려시대 과거 제도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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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와 고려시대 과거 제도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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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거의 첫 시행은 고려 광종9년 958년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권유로 실시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고려에서 관리가 관직에 등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관리에 임명되어 조정에 출사를 합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정치조직은 유교식으로 믿은 불교를 수용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국가와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내세워 유교의 폭이 고려시대 보다 넓었습니다.
과거제도는 조선 말기 갑오 개혁때 폐지되기 전까지 천여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고려시대 과거가 어떻게 치러 졌을까요?
조선시대 과거와 다른점을 비교해 봅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과정)

조선시대에는 예비시라 할 수 있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고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습니다.

(익종의 성균관 입학 의궤 그림)

그리고 최종시험은 성균관 출신이나 지방에서 향시를 걸쳐 온 7백 명 정도가 응시해서 치렀는데, 이를 문과 혹은 대과라고 합니다.
(생원시.진사시 합격시 주는 증서백패)

이때 최종적으로 33명을 뽑습니다.
대과(문과)합격자에게는 합격증서로 붉은 바탕에 합격자의 인명과 등수 등이 적힌 홍패를 주고 ,생원.진사 합격자에게는 흰색 바탕에 백패를 주었는데 홍패에는 '문과 갑과 제 3인' '문과 을과 제 7인 합격자'라는 식으로 적혀 있습니다.

(홍패 1814년 순조 13년 3월에 대과 급제한 조기영의 홍패)

문과 33명의 합격자는 다시 성적에 따라 3등까지 갑과, 4등에서 10등까지 을과, 11등에서 33등까지를 병과로 분류했음으로 ,
홍패에 적혀 있는 '갑과 제 3인'이라는 것은 전체 3등을 뜻하며 '을과 제 7인'은 전체 10등을 뜻합니다.
조선시대에 장원급제한 사람에게는 바로 6품을 주었고, 나머지 역시 성적순에 따라 관품을 차등 있게 부여했습니다.
성적순이 좋을수록 그만큼 관료로 출발하는데 유리했던 것입니다.

(고려시대 과거 시험)

조선시대 대과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과거시험은 제술업과 명경업입니다.
흔히 이를 두 가지 큰 시험이라고 해서 양대업이라고도 합니다.
제술업은 글자 그대로 문장을 잘 짓는 자를 뽑는 시험으로 조선시대 진사시 같은 형태이고, 명경업은 경서에 밝은 사람을 뽑는 시헙입니다. 이가운데 제술업이 더 중시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잡과와 같은 같이 기술직을 뽑는 시험을 고려시대에는 잡업이라 했습니다.
잡업에는 법률지식을 시험치는 명업법,회계나 제정 관계에 밝은 인재를 선발하는 명산업,의술에 밝은 자를 뽑는 명의업, 풍수리지 전문가를 뽑는 지리업등이 있습니다.

한편 조선의 생원 .진사시와 같은 예비 시험을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향시라 하였는데, 이를 달리 계수관시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향시에 학격한 향공과 국자감 출신자가 다시 조선의 성균관에 해당하는 국자감에서 치르는 2차 시험을 국자감시 혹은 사마시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치르는 제술업과 명경업으로 인재를 뽑는 최종시험을 예부시 혹은 진사시라고 합니다.
마지막 시험을 예부가 주관해서 치르기 때문에 예부시라 한 것인데 이 예부시를 통과해야 비로소 관료가 될 수 있습니다.
진시시가 때로는 국자감시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과거 합격자에게 합격증서로 홍패를 주어, 제술업이나 잡과 합격자 모두 홍패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같이 예비시 합격자에게 백패를 주지 않았고 다만 고려 국왕이 직접 주관한 시험인 친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황패를 주었습니다.

(고려시대 황패 장양수 황패)

홍패에는 응시자의 성명과 지위, 과제 등급, 당시 과거시험을 주관한 고시관인 지공거의 명단이 실려있습니다.

한편 고려시대에도 급제시의 성적이 관료 진출과 승진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무신정권기의 문장가 이규보는 최종시험인 예부시의 성적이 나빠 합격을 포기하고 다시 응시하려고 했으나, 부친이 전례없는 일이라고 만류하는 바람에 다시 응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과거 성적은 제술업과 명경업의 경우 갑과.을과.병과 .동진사의 4단계로 나누었으나 나중에는 갑과는 폐지되고 을과 3인 .병과 7인. 동진사 23인 등으로 나누었습니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평균 2년에 한번씩 과거를 보았습니다.
(박종기 교수 저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글 과거제 글)

조선시대에는 위에서 설명한 문과 외에 무과 시험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무과는 문과에 비해 한단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얼금지라 해서 서자들이 문과를 볼 수 없지만 무과에는 서자도 시험을 보았고 간혹 양민들도 무과에 응시를 했습니다.

(북새은선도 ᆞ조선시대 무과 풍경을 그린 그림)
무과는 문과에 비해 소과가 없었고, 시험단계는 초시, 복시,전시등 3단계 대과로 구성됩니다.
문과 합격자와 같이 무과의 대과 합격자에게 합격증서인 홍패를 줍니다. 초시는 활쏘기, 말타며 활쏘기, 격구시험, 나중에 조선후기때는 활쏘기외 조총, 편곤 등도 추가됩니다. 복시는 병법서와 유교정전 등을 보는 시험입니다.
전시는 기격구와 보격구 즉 마상 격구와 보행격구가 시험과목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무과 대신 승과시험이 있습니다.
고려의 승과는 과거제도가 실시되던 해 같이 실행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의 주지를 맡거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승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국가에서 관장했던 승과는 승려들을 위한 시험으로 출가 후 구족계를 받고 대개 15~20세전후에 승과에 응시를 했는데,
보조국사 지눌은 25세(1182년 )명종12년에 보제사에서 열린 선불장 즉 선종 승려을 위한 승과에 합격했습니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는 국왕이 고신(일종의 관리 임명장 비슷한 것)내려 승계와 승직을 수여했는데 일종의 승계는 관계, 승직은 관직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승려들에게는 관리에게 지급하는 것과 같은 녹봉을 국가에서 지급했고, 사찰의 책임자 역시 승직의 일종으로 국왕이 하였습니다.

승과는 각 종단별로 실시되었는데, 개경에 있는 해당 종단의 사찰에서 3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자주 특별 승과가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승과가 실시 되었을때 전국 각지에서 승과를 치르기 위해 모여든 승려들로 개경시내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한편 승지을 가지고 개경에 머무르는 승려들 중에는 승록사의 관원도 있습니다.
고려는 불교와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는 별도의 관청으로 승록사를 두었는데, 승과에 합격한 승려는 승록사에서 승관으로 일하기도 합니다.

국가에서 시험을 주관하는 시험 주제에 그 시대상이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불교를 숭상하니 승과를 별도 두고 승직을 운영하며 승려에게 국가에서 녹봉을 지급하고, 조선시대에는 무과를 두어서 국가에서 주기적으로 무관을 선발하고 , 문에서 뜻을 접은 인재들이 무과로 출사를 한 경우도 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