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고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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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고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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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고찰

 

Ⅰ. 머릿말 - page 1
Ⅱ. 지방 제도의 기원과 성립 - page 1~3
  1. 통일신라와의 연관성
  2. 고려 지방제도의 또 다른 특성

Ⅲ. 지방 통치 조직의 정비와 구조 - page 2~4
  1. 지방 통치 제도의 정비
  2. 지방 통치 조직의 구조

Ⅳ. 군현제도 - page 5~17
  1. 경·도호부·목과 군현
  2. 특수행정조직-향·소·부곡·장·처·역
  3. 촌락의 구조
  4. 향리와 기인 및 사심관

Ⅴ. 지방의 중간통치기구 - page 17~22
  1. 고려 지방 중간기구의 구조
  2. 경기
  3. 5도
  4. 양계

Ⅵ. 지방통치제도의 변화 - page 22~23
Ⅶ. 고려와 조선의 지방제도 비교 - page 23~24
Ⅷ. 맺음말 - page 24~25


Ⅰ. 서론

지방제도 속에는 중앙권력과 지방세력, 지방세력과 민, 중앙권력과 민의 관계가 중첩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지방제도 연구는 전근대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 관계들뿐만 아니라 그 관계들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을 해명할 단서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제도가 어느 한 부분만을 고려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고려시대 지방제도 역시 일반적으로 5도, 양계제, 경기제, 주현-속현제 등 매우 단편적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달리 그 실상은 상당히 복잡하고 , 중층적인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만큼 지금까지 다른 어떤 분야에 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최근에는 군현제의 문제와 관련하여 고려시대 지방제도를 전 시기에 걸쳐 일관된 맥락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
지방제도가 이처럼 다층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 글에서 고찰해 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흐름이다. 곧, 중앙 권력이 지방을 어떻게 편제하고 지배하려고 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고려시대 지방 통치 조직의 정비 과정과 구조를 통해 고려만의 특색 있는 지방 통치 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지방제도의 기원과 성립

1. 통일신라와의 연관성

통일신라 기에는 주나 군 등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9주체제를 근간으로 한 것인데, 옛 삼국 지역에 각각 세 개의 주를 설치하고 각 주는 그 아래 영현을 거느리고 군을 관할하였다. 군 역시 영현을 거느리고 있어 전체적으로 군-영현체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시기에는 속군, 속현 등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고, 향?부곡?소?처?장 등 특수 행정구역이 존재했으며, 전국을 세 지역으로 구분하여-양계, 경기, 남도-통치하였다. 각 지방 행정단위는 지방관이 상주한 주현에 그 주변 속현이 소속되어 하나의 행정단위를 이룬 이른바 주-속현체제를 기초로 하였다. 두 시기의 지방제도는 외형상 차이가 보이나 그렇지 않다. 고려의 지방제도가 신라의 지방제도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태조 원년 6월 ‘궁예가 신라의 관직과 군읍의 호칭이 비야하다고 해서 고쳐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시행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백성들이 익숙하지 못해 혼란에 빠져 있으므로 이제 모두 신라의 제도를 따르되, 군읍의 이름이 쉬운 것은 궁예의 제도를 따르라’ 했다. 이는 고려 초기 지방제도가 신라의 것을 계승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점에 대해 학계에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가 중세 사회의 이행으로 판단했던 연구경향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 하겠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1) 향.부곡은 통일신라 때에도 존재했다.
  김부식 [삼국사기] 이들을 잡소라 칭함.

 2) 주-속현체제와 군-영현체제의 유사성
  -통일신라 : 주-군-현(영현) ->주와 군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고, 1개 주와 군이 평균 2개 정도 영현을 예속하였다.
  -고려 : 속군 69개 +속현 305개 -> 130개의 주현에 예속되어 있었다.  (1개 주현에 평균 세 개) 몇 개 군현을 묶어 하나의 행정단위를 이루었다는 유사성2

2. 고려 지방제도의 또 다른 특성

전체 130개 주현 가운데 신설 주현이 69개 정도가 되었다. 절반에 달하는 이 숫자의 주현이 모두 북계와 동계에 설치되었다. 주로 방어군이나 진 등 군사행정단위로 취급되었는데 이들 주현은 속현을 거느리자 않고 중앙정부가 수령을 직접 파견하여 다스렸다. 이것을 보아 주-속현 체제는 9주 5소경 관할지역 즉, 개경 이남의 제한된 지역(남도 5도)에서만 일반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의 지방제도는 전적으로 신라의 것을 계승한 것이 아니며 개경 이남의 주-속현과 양계지역의 2원적인 지방 통치체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지방 통치 조직의 정비와 구조

1. 지방 통치 제도의 정비

1) 국초(태조-경종때)

太祖代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최승로는 그의 상서문에서 “우리 聖祖(태조)께서 (후삼국을) 통합한 뒤에 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니, 대저 초장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로워 겨를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3 태조는 다만 서경을 경영하여 왕실세력의 기반을 보완하거나 군사상 목적으로 진, 도호부, 도독부 등 특정지역만을 경영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태조 때의 지방통치 조직은 크게 호족의 지배력이 강한 지역인 주현지역과 군사상의 요충 지역인 진?도호부?도독부 지역, 그리고 왕실 세력의 기반이 되는 지역인 서경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성종대

고려시대 지방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成宗代이다. 성종 2년에 지방제도 정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 중 지방제도에 관한 건의를 받아 들여 지방제도 정비에 착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게 된다. 이 12목이 설치된 지역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지방행정상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설치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보완 조취를 취하였는데 성종 5년(986)에는 12목에 대하여 처자들을 거느리고 부임케 하여, 지방관이 안정된 생활기반 위에서 지방행정에 전념토록 하였고, 이 외에 경제적 기반조성, 교육, 물가조정 등을 보완하였다. 성종 2년 지방제도 개혁의 다른 한 측면은 향리제 정비였는데 다양한 지방세력들을 당대등-대등체제로 묶어서 이해하고, 이를 호장-부호장체제로 바꾸려는 여러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렇게 추진된 정비 작업을 바탕으로 성종 14년(995)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진다. 개편의 특징은 12목에 절도사를 두어 12절도사제로 개편한 것이다. 여기에는 상반되는 두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군사적인 조직으로 지방 호족세력을 통제하여 중앙집권을 꾀한 조치일 것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지방세력을 대소 지방제도의 조정과정에 반영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행정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12절도사제와 더불어 주목되는 성종 14년의 지방제도 개편으로는 10도제를 들 수 있다. 10도제 실시의 목적은 자료가 없어 연구에 어려움이 있지만 고려의 집권화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즉, 성종은 군사적 체제인 절도사제를 바탕으로 하여 지방 호족세력을 통제하며, 동시에 이런 절도사체제를 순찰함으로써 집권화를 굳히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 10도를 제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3) 현종대

顯宗代 지방제도 정비는 고려 일대의 지방제도의 기본 구조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종 3년 12절도사를 혁파하였으며, 9년에 대폭적 개편을 하였는데 이 결과, 고려의 지방제도는 4도호 8목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중앙에서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56개의 주, 군, 28개의 진 등으로 편성되었다. 이것은 중앙의 행정력이 현종 9년에 이르러 군?현급의 행정단위에까지 직접 조직적으로 침투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전국 각 지방이 완전히 중앙의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일부 지역만이 중앙의 직접 통제를 받았을 뿐이다.

4) 예종대

睿宗代의 지방제도 정비 특징은 屬縣에 대한 監務4파견이다. 이것은 예종 때를 시작으로 하여 인종?명종?공양왕 때까지 계속해서 파견되었다. 또 한편 按察使를 파견하였는데, 목적은 외관들의 치민(治民)을 파악하고 유민 안집을 하는 것이었다. 안찰사는 기존의 외관체제를 유지하는 선상에서 외관의 관리, 감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안찰사가 주목 중심의 도를 단위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영속관계를 기초로 한 고려 군현제의 특성에 기인한다.

5) 명종대 이후의 지방제도 운영실태

가장 큰 문제는 지방에 파견된 관인들이 부패하였다는 데 있다. 현령과 감무는 대민안정보다는 권세가에 기생하는 형편이었고, 권세가들은 유민 안집을 목표로 파견된 감무를 자신의 지방 장악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였다. 결국 명종대 이후의 외관제는 국가기구로서 정연한 지배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지방파견관의 종별과 직무한계 등이 권문세가에 의해 자의로 정해지고 있었다.

(6) 공민왕대 이후의 지방제도 정비

이 때의 지방제도 개혁 방향은 앞선 시기의 제도적 폐단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전 외관 파견의 관행이 되었던 외관 천거제는 천거의 책임을 분명히 하여 자의적인 천거를 막으려 하였다. 또한 외관의 자격을 6품 이상으로 하여 그들의 지위를 보장하였다. 그리고 주부군현간의 영속관계도 해체하는 방향에서 지방제도를 정비하려 하였다. 이전과 달리 감무를 현실적인 외관으로 인정하려 했으며,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에 대대적인 감무 파견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들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고려적인 영속관계를 부정하면서 정연한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것은 조선에 들어와서야 가능해진다.
 

2. 지방 통치 조직의 구조

(1) 영속관계

영속관계는 영현을 중심으로 몇 개의 속현이 묶여 있는 일정의 광역 통치조직을 말한다. 영현은 외관이 파견된 지역이고, 속현은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이다. 이 영속관계는 신라 지방제도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속현에는 의관이 파견되지 않았기에 영현과 속현과의 관계는 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읍사는 모든 주부군현과 향소부곡에 있는 지방통치 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고려시대 영현의 속현 지배는 주현의 향리(호장)가 중심이 되어 임내의 향소부곡을 통괄하였으며, 따라서 중앙에서는 수령을 파견하여 지방의 향리를 장악함으로써 제반 행정을 처리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계수관과 영현

계수관은 3경.3도호.8목의 수령을 말한다. 이들 계수관은 각각 양계 내의 영현들과 상하관계를 맺고 있었다. 최근 계수관이 영속관계에 있던 영현 모두를 말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선 초기 계수관의 용례를 보아도 역시 군?도호?목을 가리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3) 주목 중심의 도와 안찰사

고려시대에는 그 직책이 지속적인 양계 병마사 및 각 주부군현에 배치된 외관과는 별도로 중앙의 필요에 따라, 중앙 관인을 지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맡겨진 직능은 임시방편상 일시적으로 부과되어, 그 임무가 끝나면 곧 그 직책도 자연히 해소되는 것으로서 직무 체통이 명확하게 설정되고 준수된 것은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고려시대 지방관에 의해 대변되는 중앙 집권의 조직적인 행정력이 고려 말에 이르도록 지방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4) 일원적 지방 통치조직의 진전

고려의 지방 통치조직은 남도지역, 양계지역, 경기지역으로 다원화되어 있었으며 그 통치 내용도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는 이러한 다원적이던 지방 통치조직이 점차 일원화되어 가고 있던 사실이 주목된다. 여말 전국이 각도의   도관찰출석사를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지방 통치조직을 갖추게 되는데, 이러한 지방제도 개편은 조선 초기 팔도관찰사제의 밑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Ⅳ. 군현제도

 고려의 지방제도는 郡縣制度를 근간으로 하여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건국 초기에는 지방에 수령이 파견되지 못하고 다만 영유·조장이라는 조세를 관장하는 使者를 두었을 뿐 호족들의 자치에 맡겨져 있다가 983년(성종2년)에 이르러 12목이 설치되고 처음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치폐를 거듭한 뒤 1018년(현종 9)에 4도호·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의 외관조직으로 개편되면서 지방제도의 정비가 일단락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500여개의 군현 중에서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였는데 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373개나 되었으니 아직도 중앙통치력의 지방에 완전히 미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들 속현들은 수령이 설치된 주현에 예속되어 중앙의 간접지배를 받는 행정체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현의 수도 적지 않아서 일률적으로 통치하기가 곤란하였으므로 몇 개의 큰 군현을 界首官으로 삼아 제한된 기능에서나마 중간기구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즉, 소수의 경·도호부·목이 계수관으로서 관내의 일반군현을 통할하여 향공의 선상이나 외옥인의 추검 등을 맡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군현이라 하지만 고려의 군현제는 계수관과 일반 주현, 그리고 속현의 누층적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5

 그러나 점차 속현에 대한 외관의 증파로 주현의 수가 많아지자 지금까지의 계수관에 의한 군현통제는 너무나 허술하여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없었으므로 보다 짜여진 지방제도의 편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중기부터는 계수관을 대신하여 중앙정부와 군현 사이의 중간기구로서 5도·양계를 설치하게 되었다. 즉, 북부지방에는 兩界, 남부지방에는 5道를 설치하고 양계에는 병마사,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여 도와 계 내의 군현을 통할하는 상부행정구획으로 삼았다. 이로써 전기의 중간기구의 미숙성을 극복하고 고려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중간기구가 지역에 따라 도와 계의 차이가 있고 또 경기는 개성부에서 직접 통치하는 등 전국의 지배방식이 일원화되지 못한 점은 당시 속현의 광범한 존재와 함께 고려지방제도의 미숙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6  
 

1. 경 . 도호부. 목과 군현

 고려의 군현제는 전국의 행정구획을 정하여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지방관으로 하여금 토지지배 및 수취체계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고려사>에는 현종조 군현제 개편 이후 지방 행정 단위가 5도 양계 아래에 경목부군현진의 여섯 체계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지리지>는 주읍이 다수의 속읍을 통할하도록 한 대읍 중심의 군현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대읍 중심의 군현제는 태조 때 그 기초가 이루어진 후 성종조 12목의 설치로 더욱 발전하였고 현종 때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는 소수의 주부군현, 즉 주읍이 다수의 속읍을 통치하도록 조직된 것이다. 또한 각 주읍들을 감독하는 제도로 안찰사 제도 즉, 도제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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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를 보면 고려시대 외관은 3계층으로 구분되어 있다. 3품 이상의 외관이 있는 경.도호부.목과 5품 이상의 외관이 있는 방어(주)진.지주부군과 7품 이상의 외관이 있는 현.진의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은 4경 가운데 왕경인 개경을 예외로 돌리면 3경이 된다. 태조 때 설치한 서경(平壤)과 성종 때 설치한 동경(慶州)과 문종 때 남경(楊州)을 둠으로써 3경제를 이루었다. 의 경우는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실시된 도호부와 조세 공부 역역의 수취 등 민사행정적인 지사부의 두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은 방어군, 지사군, 속군으로 나누어지고 은 현령관과 속현으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고려의 군현제는 기능상 京-牧-知事府-知事郡-縣令官 계열의 민정적 군현계통과 都護府-防禦郡-鎭 계열의 군정적 군현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현종 9년 이후의 4도호부는 안남도호부(樹州), 안서대도호부(海州), 안변도호부(登州), 안북대도호부(寧州)이며, 8牧은 광주 충주 청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황주목이다.

경.도호부.목에는 유수.도호부사.목사 등의 외관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특별히 계수관(界首官)이라 칭하였다.7 이들은 표(表)를 올려 축하를 하는 일이나 향공진사(鄕貢進士)들을 뽑아 올리고 외방의 죄수들을 재심하는 중요한 업무만을 관장하였으며, 지방의 영군.영현은 중앙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8
고려시대는 모든 주.부.군.현에 외관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외관이 파견된 영군.영현과 파견되지 아니한 속군. 속현이 있었다. 지방관이 없는 속군과 속현은 주군.주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앙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예종 때 부터는 속군.속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시대 들어와서 속군.속현은 없어졌다.
3경 4도호부 8목 등의 조직정비와 도제의 확립은 지방제도발전 과정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계수관과 도의 상호견제로 인해 종전까지 도와 계수관의 분리가 이룩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했던 병폐가 해소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지방행정 조직상의 특징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경 목 도호부의 계수관보다 상위직인 5도 안찰사의 품계가 낮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의 수평적 야합을 예방하고 감시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또한 계수관의 사록과 영현의 현령은 품계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상하관계였으며 계수관은 안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2. 특수행정조직- 향.부곡.소.장.처.역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특수행정조직은, 첫째 향과 부곡은 하나의 독립 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되어 그 소재읍에 소속되어 있었다. 둘째 향과 부곡의 성립 시기는 신라 때부터 이며 소.장.처의 성립은 고려시기부터 이다. 셋째 향.부곡.처.장은 농업생산을 하는데 반해 소는 광산물, 해산물 및 수공업품을 생산하였다. 넷째 所에는 그곳의 土姓吏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자료에 기록된 향소부곡의 총수는 785개이고 그 중 296개가 경상도 지방에 있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향과 부곡은 하나의 독립 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다. 먼저 향?부곡=천민집단설이 그 중 하나이다. 이는 향 부곡민들이 죄인이거나 그런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고 자손 귀속 문제에 있어서도 천인의 취급을 받았으며 여러 사회적 제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설에 대한 반론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즉 향?부곡인=양인이라는 것이다. 향?부곡에 ‘土姓吏民’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를 천민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9 따라서 향소부곡의 소멸이란 역사적 사실을 종래처럼 천민집단의 신분해방이라 보지 말고 사회경제적 발전과 함께 임내 주민의 성장과 고려?조선왕조의 지방 통치체제의 발전이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쟁과정에서 고려 군현제는 상층구조인 주부군현 등 군현제 영역과 하층 구조인 향소부곡장처 등 부곡제 영역으로 구성되는 다원적인 구조를 이루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所는 향.부곡이 이미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것과는 달리 고려 초에 발생한 것으로 주로 공납품을 제조하는 곳이다. 향?부곡은 주로 농경에 종사한 반면, 소는 금,은,구리,철 및 종이 도자기,묵 등 특정 공납품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 소의 주민 역시 천민이었다고 이해되어 왔으나 양인이었다는 주장이 나와 있다. 또한 소를 군현이 관할하는지 또는 국가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지의 논쟁이 상반되어 있다. 요컨대 소는 반국가적인 행위 때문에 강제적으로 편성되어 그 주민들이 특정의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된 경우와 특정 물품의 생산을 위해 주변 촌락민들을 요역의 형태로 동원시킨 경우의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莊.處는 왕실을 비롯하여 궁원과 사원 등이 지배한 일종의 장원이다. 장?처는 나말려초의 혼란속에 고려 왕실이 지방호족이 지배하고 있는 촌락의 일부를 취해 왕실의 직속영으로 삼는 것에서 비롯되어 설립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장?처는 왕실 및 궁?사원의 사유지와는 달리 국가적인 수취체계 하에 수조지로 지배하여 그곳에서 수취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주·부·군·현과 별도로 鄕·所·部曲 등의 특수행정조직을 두고 있었다. 이들 향·소·부곡의 주민들은 국학의 입학이나 과거의 응시를 금하는 등 일반 군현의 주민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다. 향·부곡에는 농민들이 거주하였는데 대하여 소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금·은·동·철·종이·도자기 등 특정 공납품을 만들어 바치는 공장들의 집단거주지였다. 여기에도 일반 군현과 같이 부곡리 등의 外吏 가 있었고, 군현에서 부곡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반대로 부곡에서 군현으로 승격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향?부곡의 부곡제는 군현체제와 수취체제가 변동되자 구조적 변동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변질되었다. 부곡제 영역은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주현을 통한 간접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향리가 같은 재지세력의 과중한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과중한 수탈은 부곡민의 유랑을 촉진하여 전야가 황폐화 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폐단을 줄이기 위하여 중앙정부는 감무를 파견하였다. 특히 12세기 이후 대규모의 감무파견은 종전의 광대한 임내로 구성된 군현체제를 점차 축소시켜 갔다. 결국 이것은 주현이 지배하였던 부곡의 임내를 중앙정부가 직접 지배하여 부곡에 대한 개별적인 수취를 지양하고 다른 주현과 같은 방식으로 수취함으로써 부곡제가 변질되었다. 무신난, 이후 13세기에 이르러 부곡제는 향?부곡인의 직역분화현상 ? 군현으로 승격 ? 구성원의 신분상승 등을 통해 구조적 변질의 양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10


3. 촌락의 구조

농민들의 생활근거지인 촌락은 군현체제 내의 행정단위로서의 지역들인 주?부?군?현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밑에 있는 행정조직의 하부 단위이다.
고려시대의 ‘촌’이란, 첫째 촌을 국가적 수취를 실현하는 매개체로 이해하고, 둘째 고려시대 수취의 단위가 되는 촌은 자연촌이 아니라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진 지역촌이라는 것이다. 즉 고려의 촌이 신라의 지역촌과 조선의 面里制의 과도적 단계로서 신라에 비해서는 다서 성장하였으나 여전히 지역촌 체제였다.11 그리고 이러한 촌락의 지배자는 富農중에서 선임된 천장?촌정이며 이들이 바로 백성층이라는 것이다.

또한 촌주는 촌락마다 있는 것이 아니며, 촌주가 없는 촌락은 이웃 촌락의 촌주를 매개로 해서 군현지배에 예속된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관료가 아니라 촌민으로서 파악되었는데, 이들은 특수한 백성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매개로 군현은 3~4명의 촌주를 이용하여 촌락을 지배하여 지방행정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촌락의 책임자가 신라시대에는 군사조직의 핵심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그 명칭부터 권농관이라 하였듯 순전히 농사관계만을 맡았던 것인데, 고려시대에는 향병의 장이면서 동시에 권농관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복식은 일반백성들의 복식보다 호사로워 큰 차이를 드러냈는데, 그러나 주현 이속과 같이 향직에 참여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들이 촌내에서 아무리 존봉을 받더라도 신분에 있어서는 일반민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그런 점에서 그들은 향리와는 완전 다른 존재이다)

고려시대 촌락의 규모를 살펴보겠다. 고려 말의 기록이지만 개경지역의 경우 자연가호를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대?중?소의 3등 표호제로 재편성한 기록을 토대로 산술적인 평균치를 낼 때, 1리는 편호 150의 규모가 나온다. 또한 우왕 때 이성계는 安邊策의 하나로서 군사조직으로 100호를 1통으로 하는 이른바 「百戶通統主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안한 「백호통주법」은 이 때 처음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이미 공민왕 5년(1356)에 이와 유사한 내용의 제도가 시행되었다. 다시 말하면 唐代의 행정촌인 1리가 100호라는 점과, 이보다 훨씬 시대가 내려가는 조선시대의 리의 규모가 25호인 점을 감안하면, 고려시대 행정촌의 규모는 대체로 편호 100호에서 150호 이내의 범위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고려의 촌락은 신라시대 촌락과의 계기적인 발전과정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며, 조선시대 면리제를 성립시켜주는 과도적 형태로서의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12


4. 향리와 기인 및 사심관

고려시대 외관을 보좌하여 지방행정의 말단을 담당한 것은 보통 長吏 또는 外吏라고 불리우는 향리층이었다. 이들은 각기 그가 속한 지역에 따라 州吏.府吏.縣吏.府曲吏등의 명칭을 띠고 있었다.13
향리들은 대민업무의 실질적 종사자로서 조세와 역역의 징수를 비롯 하여 간단한 소송을 처리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었고14, 그 직을 세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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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리층은 고려 문벌귀족사회가 확립 발전해 가는데 큰 몫을 담당해 왔다. 이들은 귀족관인의 아류 동반자로서 존재해 왔으며, 토착적 세력기반과 지방통치조직을 바탕으로 농민의 지배와, 그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 향리의 기원

고려시대의 향리는 나말 여초의 호족에서 기원한다. 태조는 통일 이후 지방세력에 대해 주로 적절한 회유와 아울러 견제책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사심관, 기인 등과 같이 재지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경종사하는 계열이 있는가 하면 금유?조장등과 같이 재지세력으로서 지방민의 통솔에 임하는 계열이 있기도 하였다. 광종대에는 호족정책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광정 11년 이후 제거된 호족들은 주로 개국 공신계열의 훈신숙장이거나 유공호족이었다. 광종의 개혁정치는 이들 유력호족세력을 숙청하는 동시에 이 공백을 또 다른 지방세력자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광종의 측근에 새로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든 작든 지방에 나름대로의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광종의 정치가 호족세력의 전면적인 도태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뜻한다.16

통일이후에도 여전히 지방에서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들은 성종 2년 지방제도의 개편과 아울러 향리의 前身이 된다. 고려의 지배체제를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호족은, 그 후 지배권이 확립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중앙정부의 통제의 방편으로 제도화된 것이 바로 외관파견에 따른 성종 2년(983)지방제도 개편과 아울러 실시된 향리제도이다.


2)향리의 시대에 따른 변화

성종2년 이전까지의 지방통치는 지방세력자에 의해서 행해졌다. 성종2년에 실시된 주?부?군?현의 吏職의 개혁과 지방관제의 실시는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였다. 비로소 고려시대 향리의 등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종 2년에 주?부?군?현의 이직을 개정하여 병부를 사병으로 하고, 창부를 사창으로 하고, 당대등을 호장으로 하고 대등을 부호장으로 하고 낭중을 호정으로 하고 원외랑을 부호정으로 하고 집사를 바로 하고 병부경을 병정으로 하고 연상을 부병정으로 하고 유내를 병사로 하고 창부경을 창정으로 하였다.(《高麗史≫ 권 75, 志 3, 選擧 3, 銓注 鄕職)17
처음 12목을 설치하면서 금유.조장을 파하였다(『高麗史節要』권2, 성종2년 2월 

국초에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외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성주.장군에게 군읍을 녹으로 사여한 근읍통치의 위임시대에 일선에서 지방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던, 성주?장군의 자손들인 향호가 매양 공무를 가탁하여 백성을 침해하여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18 그러자 성종 2년 금유?조장19의 혁파와 12목의 실시를 통해 전국적으로 통일된 군현제의 실시와 더불어 향리직제에 대한 통일적인 지배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도로서 성립된 향리는 주?부?군?현을 비롯한 향?부곡?진?역 등 모든 행정구역에 걸쳐 존재하고 있었다.

성종 2년에 일단 제도로서 성립된 향리는 현종?문종기를 거치는 동안 그 명칭이 더욱 세분되고 질서 있게 정비되었다. 현종9년(1018)에는 향리의 정원을 책정하고, 향리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목적은 거란의 침입과 연결시켜 농민에 대한 수취와 이들의 동원체제를 대폭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향직의 정비를 “지방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책이 단행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농민층을 지배하기 위한 강화책이요, 향리의 직임을 세분화 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향리의 공복제정은 吏職에 대한 통제책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농민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요, 그들로 하여금 권위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조치의 일단이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초기의 향리는 원칙적으로 그 직을 세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혀 유동성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한편 과거라는 관문을 통하여 중앙관료기구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통혼대상을 같은 향리층이나 士人族에서 찾았는데, 여기에서 신분향상에의 노력과 향리의 신분이 중앙귀족에 비하여 낮다 할지라도 전체의 신분질서에서는 지배층에 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방의 각종 행정 및 재정권, 그리고 병력동원권을 지니고 있어 지방사회에서의 실력자였음을 부인 할 수 없게 한다.20

무신란 이후 계속된 정변과 빈번한 정권교체로 인한 행정적 공백으로, 이 시기 향리의 중앙진출이 활발하게 된다. 잇단 정권쟁탈에 따른 落職者가 많이 발생하였기에, 이러한 행정직의 공백이 실무행정에 능한 향리층의 중앙진출을 용이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무신집권기 동안에 실시된 과거의 횟수와 합격자 수가 급격히 증가되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향리출신 급제자들은 무신정권에 의해 발탁된 문인들로서의 활동은 정권담당자에게 절대적으로 예속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공동의식과 공동활동을 통한 정권실세에의 도전이나, 그들의 입장에서 판단되는 내부모순에 대한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21

원 간섭기에 이르면, 향리출신 급제자들은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왕권강화와 권문세족에 대한 일련의 개혁운동을 추진하여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공동체적인 관료군으로 성장한다. 공민왕 이후 향리출신 신진관료들은 자주의식이 강하고 정치-사회적으로 이해를 같이 하는 공동기반에서 출발한 동질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했으며, 뚜렷한 정치이념을 가지고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원과 권문세력의 제거과정을 통하여 사상적 성숙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정치적 관료군으로 성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중앙에 진출하는 호장?부호장들의 향리층이 있었던 반면, 在地吏族化하는 다른 향리층도 있었다. 신분상승을 꾀하지 못한 일부 호장층과 하급향리들은 지방에 정착하여 신분의 유동성이 봉쇄된 官人의 使役人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향리 자체는 정치세력을 결성할 수 없는 현실에서 체제변혁적 활동에는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향리로부터 중앙관인으로 진출한 신진사류?신흥관료들은 시대의 성격에 따라 국가권력이 안정되었을 때는 체제순응적으로 활동하여 통치체제의 안정을 추구하였고, 전쟁?외세간섭?자연재해?정변등 내외적인 모순현상이 나타나면 새로운 생산체제.통치체제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변혁과 개혁의 주체로 활동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원 간섭기나 여말선초에 나타나는 사회세력의 재정비 과정에서 향리출신 과거급제 관인들은 체제변혁의 주역으로 활동했다고 보여 진다.


3) 향리에 대한 통제책

  ①기인 제도 
국초에 향리자제를 選上하여 경성에 인질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한 顧問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이를 其人이라 한다.(『高麗史』 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其人)
여기서 기인제란 지방세력을 견제하고 회유하기 위한 집권적인 통제책의 하나로서 향리의 자제를 상경 시위하게 하는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기인제의 기원에 관하여는 논자 간에 견해를 달리하고 있지만, 고려 초에 확실히 향리의 자제를 기인으로 선정하였음에는 이론이 없다. 인질의 성격을 띠고 서울에 머무는 기인의 존재 필요성은 지방의 성주?장군들인 향호들에게 지방통치를 위임한 시대에 필요한 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 31(1077)년의 其人選上 규정의 기사를 보면 그간 기인제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인은 1,000丁이상의 고을이면 足丁이라 하여 나이 40세 이하 30세 이상의 사람을 뽑아 올려 보내게 하며, 1,000丁이하의 고을이면 半足丁이라 하여 兵倉正이하 副兵倉正 이상을 막론하고 부강정직한 사람을 뽑아 올려 보내게 하되 족정은 15년을 기한으로 하고 반정은 10년을 한정하여 입역케 하며, 반정이 7년에 이르고 족정이 10년이 되면 同正職을 허락해 주고 입역한 기간이 끝나면 관직을 더 준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其人)

위의 기사를 살펴보면, 기인의 신분에의 변화를 볼 수 있다. 국초에는 지방호족의 자제들을 기인으로 하였으나, 문종대에 와서는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또한, 국초의 기인은 지방호족의 국왕에 대한 충성의 담보로서의 의의를 가지기에 다른 身役은 지지 않았으나22, 문종대의 기인은 신역을 지고 있었다. 문종대의 규정에 40세 이하 30세 이상이라고 연령을 밝힌 것은 신역의 부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천으로 지방 세력의 지위가 하락됨에 따라서 중앙에 선상된 기인을 노동의 인적자원으로 전용한 것 같다.

고려후기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지방관 파견이 확대됨에 따라 토착적 세력을 유지하던 향리의 정치, 사회적 지위 전락과 더불어 기인역 또한 고역으로 변모하였다. 심지어 충숙왕 5년(1318)에는 기인의 役事가 노예보다 심하여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逋亡함이 끊이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인역의 고역화 내지 전역화는 향리의 향역 변화의 실태와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인 제도의 존폐 논의가 있게 되지만, 기인은 현실적으로 긴요한 인적 자원이었기에, 조선조 광해군 때 大同法의 실시로 인해 기인의 역이 혁파될 때까지 이용되었다.

 ②사심관 제도

기인제도와 더불어 호족세력을 무마 통제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제도가 事審官制이다. 사심관제는 외관이 본격적으로 파견되지 못하였던 성종 무렵에 이르기까지는 지방통치에 있어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당시의 공신들은 거의가 호족출신으로서 중앙 귀족화되어 있었지만, 그 본관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방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에서는 이러한 공신들의 재지 세력기반을 이용하여 그 지방의 향리세력을 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이 결국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시기의 지방세력에 대한 유일한 통제수단이었다.23

사심관의 직능으로는 인민의 宗主24, 流品의 甄別25, 賦役의 均平, 風俗의 表正26등이 있다. 이러한 직능은 지방관인 외관의 직능과 흡사하기에 지방 통치 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자못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외관이 본격적으로 파견됨에 따라, 사심관의 많은 권한 중 정치적?행정적 지배권은 상당 부분을 외관이 장악하였고, 사심관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권한을 유지해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에서 귀족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향촌사회질서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고려시대 사심관은 점차 향촌사회와는 유리되어 갔다. 중앙관인이라는 위치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앙권력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갔으며 또한 귀족으로 중앙에 오래 거주하게 되면서 자연히 향촌사회와는 거리가 생겨가게 되었다. 향촌사회의 지도자격의 위치를 차지하던 그들은, 본래의 면모를 상실하고 그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이 부를 가지고 고리대 운영을 하는 등 향촌인을 침탈하였다. 사심관이 고려중기 이후 변질되어 고려후기에 그 정도가 심해지자, 충렬왕 9년(1283) 4월에 일차 폐지되었다가 그보다 약 30년 뒤인 충숙왕 5년(1316)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이로써 고려시대의 지방 통치는 종래의 지방관 -향리-농민(지방군현민)이라는 장치와 사심관-향리-농민(지방군현민)이라는 기구의 이중적 조직에서 전자의 지방관제로 일원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