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고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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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고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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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지방의 중간통치기구
 

1. 고려 지방 중간기구의 구조

고려의 지방제도는 三縣制를 기본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약 500개의 州?府?郡?縣이 설치되어 지방행정구획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100여 개의 군현에 外官이 설치되어 이웃 몇 개의 속현을 관할하며 중앙정부와 직결되고 있었다.
고려의 지방 중간기구의 특징은 지역에 따라 다른 삼원적 구조였다는 점이다. 즉 고려는 개경주위의 畿輔 지역을 京畿로 삼고 국방지역에 兩界, 일반 南道에 5道로 삼아 전국 8개 지역을 각각 다른 통치조직으로 구성하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가 지역에 따라 8개 중간기구를 경기?양계?5도라는 이질적 통치방법을 쓴 것은 후대 조선의 일원적인 8道制와 대비가 된다.


고려의 일반적인 지방중간기구는 남부지방에 설정한 5도제였다. 여기에는 안찰사가 파견되어 민사적 행정기능을 주로 한 일반적인 지방통치 구획이 설정되었다. 그러므로 5도는 고려의 지방 중간기구의 기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防禦州.鎭이 설치된 북방의 국경지역에는 군사적인 兩界兵馬使가 파견되었으며, 왕경 주위의 경기는 개성부가 통치하는 특수행정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전국의 중간 행정기구를 세가지 방법으로 병행하였으니, 이는 고려 지방제도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고려의 현실로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해도, 지방제도의 미숙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지방제도는 삼원적 구조를 일원화하는 추세로 점차 발전하였다.


2. 경기


1) 경기의 성립


태조는 건국한지 6개월 후에 자신의 출신지인 松嶽 지방에 수도를 정하고 이를 開州로 삼았다. 성종 14년(995) 개주는 개성부로 승격되고 京의 외관인 府尹이 설치되었으며, 나아가 赤(京).畿 13현을 관찰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성부윤의 설치와 적(경)?기 13현의 관할은 바로 경기제의 모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지방제도의 개편은 唐制를 모방한 것이다.


현종대에 이르러서는 정식 경기제의 성립을 보게 된다. 현종 9년(1018)에 개성부를 혁파하고 대신 개성현과 장단현에 현령을 설치하여, 개성현은 정주?덕수.강음 3현을, 장단현은 송림.임진.토산.임강.적성.파평.마전 7현을 각각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들을 경기라 칭하고 모두 상서도성에 직예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래의 적현 6과 기현7이 곧 경기 12현으로 개편된 것이다.
현종대의 지방제도의 정비가 『高麗史』지리지 구성의 골격이 되고 고려시대 군현제도의 기본을 이루었는데, 경기제는 이를 계기로 성립하였던 것이다.


2) 경기의 통치제도


 태조 2년의 개주는 성종 14년 개성부로 승격하여 부윤이 설치되는 동시에 적현 6과 기현 7을 관할하였다. 이때 개성부윤은 경중과 함께 수도 주위의 적기 13현도 아울러 통치하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현종 9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畿輔 지역의 행정조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경기 12현은 개성현과 장단현의 현령이 각각 속현 3과 7을 관할하고, 이들 양 현령은 중앙의 상서도성에 직접 예속되었으며, 이 때 경중의 5부는 이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경기의 통치체계(현종9년)

    京中 5部

 상서도성 개성현령 속현3     

    경기 장단현령 속현 7


현종 9년 경기제의 커다란 특징은 경기가 왕경 밖의 지방으로 화하여 경기의 수령이 지방관으로 전환한 점이다. 그리고 경기가 하나의 장관으로 지배된 것이 아니라 개성현령과 장단현령 두 수령에 의하여 분할 통치된 점이다.

이러한 경기의 통치제는 문종 때에 이르러 변화되었다. 즉 문종 16년(1062)개성부로 개편되어 知府事가 설치되고, 상서도성이 관장하던 11현과 西海道 平州의 속현인 牛峯郡등 12현을 아울러 통할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종래의 개성현령이 知開城府事로 승격하는 동시에 장단현령이 폐지되어 경기 12현을 모두 관할케 되었다. 경기는 지개성부사에 의하여 일원적으로 통치케 된 것이다. 이 문종 16년의 개성부는 전의 성종 14년의 개성부와 같이 개성부라 칭하고, 또 경기의 일원적인 통치기구인 점에서 동일하였지만 그 내용에 큰 차이가 있었다. 성종조에는 왕경을 관할하여 유일한 부윤이 설치된 특별기구였으나, 문종조에는 여러 부와 똑같은 지방기구에 불과하였다. 이제 경기는 한낱 府에 불과한 개성부의 지부사에 의하여 통치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의 통치제도는 문종 23년(1069)의 경기 확대여하를 불구하고 변동이 없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경기가 개성부에 의하여 통치되었는데 京中 5部는 이에서 벗어나 직접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3) 경기 통치기구의 개편

경기의 통치체제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혁을 겪게 되었다. 충렬왕때 開城府尹으로 승격하여 경기 분 아니라 왕경 5부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문종 때 개성부사에 의하여 통치된 경기는 점차 관할 속현에 외관이 설치되어, 지배기구가 강화되어 갔다. 그리고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경도가 황폐화 된 후, 원종 12년(1271)에 다시 개성부사에 의하여 통치되는 옛 제도로 환원된 듯하다. 그러다 충렬왕 34년에 개성부에 다시 왕경 통치기구로서 부윤이 설치되었고,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때에 경기를 좌?우도로 나누고 관할 주현을 확대하는 동시에 각각 도관찰출척사를 두었다. 그리고 공양왕 2년 경기 좌우도와 함께 양계에도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됨으로써 고려 전국의 중간기구가 단일화되었다.
이렇게 보면 고려는 경기에 대한 특수 행정기구를 그 말기에 이르러 도제로 승격, 단일화하여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3. 5도


1) 5도 안찰사제의 성립

고려의 5도란 楊廣道, 慶尙道, 全羅道, 西海道, 交州道를 말한다. 이들 5도는 남부지방에 설정한 일반적인 중간통치구획으로 민사적인 按察使가 파견되어 북부지방에 설정한 군사적인 兵馬使가 파견된 兩界와 구별되었다. 5도는 중앙정부와 군현사이의 중간 행정기구이고 안찰사는 수령을 통할하는 상급행정관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5도는 처음부터 중간 행정기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 전기의 지방행정의 단위는 어디까지나 외관이 파견된 주현으로 수령은 중앙정부와 직결되고 있었으며, 다만 한정된 기능에 있어서 界首官이 중간기구로서의 역할을 대행하였을 따름이었다. 이때에도 도 안찰사가 있었으나 처음에는 주현을 순행하여 수령을 감찰하는 명실공히 按察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안찰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현종대 이후의 사실로 보여 진다. 그것은 『高麗史』 백관지 외직 안렴사조에 현종 3년(1012) 節度史가 혁파된 후 안찰사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양광도 , 경상도, 전라도 등 안찰사 파견의 5도가 성립한 것은 예종대였다. 그 이전의 도제는 주지하는 바 성종 14년 (995)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서해도는 10도명에는 없는데 치한 10도였는데, 그것은 關內道, 中原道, 河南道, 江南道, 嶺南道, 嶺東道, 山南道, 海陽道, 朔方道, 浿西道였다. 그러나 이들 10도는 사신의 巡行道의 구실을 하였을 뿐으로 안찰사가 상견된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전술한 바 문종 18년 祭鞠使 파견이나 外獄囚 推檢의 判에서 보듯이 이미 그 내용이 바뀌고 있었다. 그 지역은 패서도, 관내서도(관서도)와 동일하므로 결국 처음 설치된 3도 안찰사는 서해도안찰사로 귀결된다고 보여 진다. 그렇다고 서해도에만 안찰사가 파견된 것은 아니고 그 밖의 지역에도 파견되었을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중간기구로 기능한 것은 서해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해도안찰사만 기능하였던 기형적인 안찰사제가 정식 5도안찰사제로 성립한 것은 예종대였다.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예종 원년(1106)에 楊廣忠淸州道와 慶尙晋州道가 제정되었고, 이듬해 분견된 諸道安撫使는 양광충청주도, 전라주도, 경상진주도의 셋으로 5도의 원형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안찰사제 성립의 기반이 되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2) 5도 안찰사의 통치제도


5도 안찰사는 양계병마사와 함께 주앙정두와 주현 사이의 중간기구로 정착되었다. 예종 때의 5도는 양광충청주도, 경상진주도, 전라주도, 서해도, 춘주도(교주도)로 편성되었다. 이 5도의 구성은 그 후 부분적인 변동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원형은 대체로 고려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안찰사의 임무는 지방관인 수령의 능력을 평가해 인사조치하는 일,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살피는 일, 형벌은 심리하는 일, 조세의 수납을 살피는 일, 군사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일 등 이었다. 그런데 안찰사는 이러한 임무를 자신이 부임한 도의 어떤 한 곳에 자리 잡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돌아다니면서 처리하였다. 안찰사는 기본적으로 왕이 지방관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감찰관이었던 것이다.


안찰사가 수령과 같은 <臨民之任>을 가진 행정관리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행정사무를 보는 治所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곧 按察使營이었다. 안찰사는 6개월 임기의 <使命之任>이었으나 그가 본도에 부임하면 일단 안찰사영에 도착한 후 도내를 순행하고 다시 환영하여 6개월 동안 본영에 머물면서 행정사무를 보았다. 이것은 안찰사가 하나의 使行이면서 부과된 임무를 마치면 곧 귀경하는 다른 사신과 다른 점이었다. 비록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임기가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 행정관서의 설치를 필요케 한 것이다. 안찰사영은 대체로 도내의 가장 큰 고을인 계수관에 존치되었으며 여기에는 營吏가 있어 사무를 보았다.


4. 양계


1) 양계병마사제의 성립

고려는 전국을 경기, 5도, 양계로 구분하여 경기는 개성부사가 통치하고 남쪽의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였으나 북쪽에는 특별히 양계를 설치하여 兵馬使를 파견하였다. 이것은 양계는 변경지역으로 군사적인 통치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는 남부의 민사적인 5도에 대하여 북부에는 군사적인 양계를 설치하여 안찰사와 다른 병마사를 파견함으로써 고려의 독특한 지방중간기구를 이루었다.
이런 양계병마사제의 성립은 예종대(1105~1122)에 출발한 5도 안찰사에 비하여 자못 이른 것이다. 이것은 남도의 주현에 비하여 북계의 州鎭 이 보다 일찍부터 설치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변경지방은 군사적 필요에서 일찍부터 防禦州, 鎭 의 외관이 설치되었으며 그의 상부조직인 양계병마사제도 먼저 성립하게 된 것이다.
양계는 3품관인 병마사 밑에 지병마사, 부사, 판관, 녹사 등의 요원으로 병마사기구가 편성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병마사의 임명 사실을 보면 이와는 다른 것이 나타난다. 문종 초까지는 양계에 각각 병마사(장관)와 부사(차관)가 함께 파견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장관으로서 서북면에 知兵馬使, 동북면에 兵馬副使가 파견되고, 예종 이후에는 서북면에 병마사, 동북면에 병마부사가 임명되고 있어 병마사나 지병마사, 병마부사가 하나의 장관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비록 정식 병마사가 아니고 지사나 부사라 하더라도 어엿한 병마사기구의 장관으로서 일반적으로 <병마사>라 통칭됨에는 차이가 없었다.
이들 병마사기구의 관원은 모두 6개월 교대였음은 5도 안찰사와 같았다. 양계 병마사는 6개월 임기로 춘하번과 추동번으로 나누어졌으니, 임명 시기는 대체로 춘하번은 정원(또는 2월), 추동번은 7월(또는 8월)이었다.
 

2)양계병마사의 통치제도

양계는 국방지역이었기 대문에 군사적인 병마사가 파견되어 중간기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병마사는 다만 변경을 지키는 邊將에 그치지 않고 동북면과 서북면이라는 행정구획을 통치하는 지방장관이었다. 이들은 각각 자기 관내의 주진의 수령을 통할하고 중앙정부와 연결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양계는 장관을 병마사라 칭한 것은 5도의 민사적인 안찰사에 대하여 군사적 기능이 일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양계는 하위 행정단위인 주현제 부터 5도와는 달랐다. 5도가 주로 일반 행정구획인 주, 부, 군, 현으로 편성된 데 대하여 양계는 군사적인 방어주, 진으로 구성되었다.

양계의 군현제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주진에 외관이 설치되어 외관이 없는 屬縣이 적은 점이다. 고려 중기를 기준으로 양계의 총 주현은 122개였는데 그 중 외관이 설치된 주현이 76개이고 속현은 46개였다. 이는 경기, 5도의 총 주현 381개 가운데 主縣 54, 屬縣327개에 비하여 절대로 외관의 비율이 많은 것이다. 더욱이 이들 적은 속현도 준남도라 할 수 있는 서경과 춘주도, 명주도가 있는 오늘의 강원도지방에만 분포하여 순북계지방에는 모두 외관이 설치되고 있다. 이것은 고려왕조가 북계에 대하여 군사적인 필요에서 집권적인 지방통제를 강화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병마사는 양계의 군사적인 기능을 주로 하였으나 또한 민사적인 행정기능도 함께 하였다. 그것은 병마사가 양계의 주진을 관할하는 중간기구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5도 안찰사가 민사적인 기능을 주로 하면서도 도내의 군사적 기능도 아울러 가진 것과 대조가 되는 것이었다. 
고려는 남부의 민사적인 5도 안찰사에 대하여 북부에는 군사적인 양계병마사제를 실시하여 그 통치방법에 차이를 두었는데 이는 고려 지방제도의 특수성이었다. 언제나 외적의 침범에 대비해야 했던 고려로서는 변경지대인 양계를 일반적인 행정구획으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병마사를 지방장관으로 삼고 군사적인 임무를 주로 하게 하였으며, 또 계 내에 감창사도와 분도장군제의 또 하나의 중간기구를 갖추어 지방 통치제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Ⅵ. 지방통치제도의 변화


고려정부는 유망과 항쟁의 대책으로 12세기 초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또한 12세기 말 13세기 초에는 유망한 민들을 공호로 파악하여 해당지역 군현이 직접 수취하는 이른바 현주지 부적정책을 취하였으나, 원의 고려침략과 고려정부의 강화도 천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대응은 원과의 전쟁이 마무리된 14세기 이후에 이루어졌다. 고려정부는 지방사회의 피폐 현상을 '관다민소' 즉 군현 수는 많으나 주민이 적은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군현 병합책을 통하여 군현의 수를 줄여나가려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4세기 후반에는 토지나 인구가 적은 영세한 속현이나 부곡지역을 주현에 폐합시켜 군현의 수를 줄여나가는 현실적인 군현 병합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고려시대 주현 130개 중 104개가 조선 초기에 군현으로 유지되었으나, 374개의 속현은 143개로 축소되었으며 부곡지역은 거의 소멸되었다. 이처럼 고려 말 조선 초 군현 개편의 대상은 주로 속현과 부곡 지역이었다.

속현과 부곡 지역은 고려 후기 이래 주민의 이탈이 심해 군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현 개편은 속현과 부곡지역을 주현에 내속시키거나 주현의 직할 촌으로 편입시키고, 혹은 몇 개 속현과 부곡지역을 합쳐 군현으로 승격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군현제와 부곡제의 복합적이고 계서적인 고려 특유의 군현체제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전체500여 개 군현이 조선 초기에 330여 개로 그 수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이는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왕조 교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Ⅶ. 고려와 조선의 지방제도 비교


도와 안렴사(안찰사)의 지위에 결정적인 변화가 생겨난 때는 고려말기였다. 이성계가 1388년에 위화도에서 외군한 뒤에 정권을 장악하면서 여기에도 변화가 생겨났던 것이다. 안렴사의 관품이 낮아 지방관을 제대로 규찰하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창왕 즉위년에 그 명칭을 도관찰출척사로 고치고 재상을 임명하여 보냈다. 공양왕 때에는 그를 단순한 순찰관이 아니라 임기가 1년인 도의 전임관으로 만들고 사무 처리를 전담하는 예하기구인 경력사를 두었다. 양계지역에는 공민왕 무렵부터 도순문사가 파견되어 왔다. 공양왕 때 도절도사로 고쳤다가 남쪽과 마찬가지로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도와 계의 장관이 도관찰출척사는 다시 도순문사로 바뀌었던 것이다.
 

조선에 들어와 도의 안렴사는 도관찰출척사 혹은 안렴사의 명칭을 반복하다 태종 때에 도관찰출척사로 굳어진다. 양계는 그 명칭이 북계는 평안도로 동계는 영길도 혹은 함길도로 개칭되었으며 태종 17년(1417)에 도와 마찬가지로 도관찰출척사가 파견되었다. 이로써 전국이 8도 도관찰출척사로 짜여져 8도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8도는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길도(함경도)이다. 도의 장관인 도관찰출척사는 세조 때 관찰사로 개칭된다.

조선의 도는 전국에 걸쳐 설치된 점, 그 장관인 관찰사에 재상의 반열에 해당하는 고위관료가 임명되는 점, 관찰사의 임기가 1년인 점 등이 고려와 다르다. 조선의 도는 지방의 중심 되는 행정단위로 보다 확실히 기능했으며 관찰사는 지방관들을 보다 강력하게 통솔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중앙의 힘이 지방에 효율적으로 침투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고려의 도와 조선의 도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고려의 도는 조선과 비교하면 지방중심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안찰사(안렴사)의 지위와 권한도 조선의 관찰사와 비교하면 낮고 약하여 지방관을 확실히 장악할 수 없었다. 더구나 북쪽에는 양계가 존재하여 도가 전국적으로 마련되지도 못했다. 도를 기준으로 하면 어느 모로 보나 고려의 도는 부족하고 미비하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을 고려 도제의 미숙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반 군현 이외에 차별받는 향, 소, 부곡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일반 군현 안에도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군, 속현이 존재하는 점 등을 들어 고려 지방제도가 미숙했다고 지적하는 경향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고려 시대의 역사성이 담겨 있으며 어찌 보면 그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고려는 호족의 시대인 후삼국을 통일한 나라였다. 각 지역을 지배한 호족(토호)의 힘은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고려는 일부의 핵심지역에만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 주현을 통해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군, 속현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의 지방지배에 대한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계수관이나 도가 마련되었지만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던 것이다.


고려의 중앙 정부는 주군, 주현 , 계수관, 도 등을 통해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였지만 그 명령이 지방 곳곳에 스며들지 못했다. 중앙의 작은 단위인 주군, 주현을 통해서도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보다 큰 단위인 계수관, 더 나아가 도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지방은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웠다. 물론 지방관이 파견되는 등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웠다. 물론 지방관이 파견되는 등 중앙집권도 상당히 이루어졌지만 분권적인 경향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27


고려와 조선시대의 제도는 모두 郡縣制의 지방통치형식을 띠고 있다는 데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양 시기 모두 지방을 중앙에서 직접 다스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나마 지방자치적인 측면도 갖추고 있다. 고려시대에 장리 층이 지방사회의 통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측면도 그렇고 조선시대에는 유향소를 두어 그 지역의 재지세력들이 체계적으로 지방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 있다.

 

고려와 조선의 군현제는 외형상으로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사이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속현의 소멸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에 대해서 직접적인 통치를 하고자 하면서도 수령이 파견된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은 속현의 수가 훨씬 많아서 이웃 현의 지배를 받았던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모든 현에 수령이 파견됨에 따라서 속현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던 향·소·부곡이 없어지고 군사적 행정구역인 양계 또한 없어져서 일원적이 8도체제의 확립도 커다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고려시대의 안찰사에 비해 조선시대의 관찰사는 그 비중이 훨씬 강화되어 계층적 지방통치가 일원화될 수 있었다.


Ⅷ. 결론

고려의 지방관제는 중앙관제가 확립되어 가던 성종 2년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현종 9년에 일단락되었다. 중기 이후에는 전국을 道와 界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5도호부 8목을 위시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도는 행정구획으로서 후에 5도로 낙착되었고 군사적 특수지역인 국경지대에 양계를 설치하였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주군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군.속현이 더 많았다. 한편 향.소.부.곡.장.처.역과 같은 하급행정구역이 있었다. 속현과 이들 특수 행정구역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처럼 고려 지방 통치조직은 영현을 중심으로 속현이 묶여 있는 광역 통치조직, 즉 영속관계를 그 특성으로 하고 있다.


고려시대 외관을 보좌하여 지방행정의 말단을 담당한 향리층은 나말 여초의 호족에서 기원하였다. 향리에 대한 통제책으로는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가 있었으며, 후에 무신란 이후,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후에 체제변혁의 주역이 되는가 하면, 지방에 정착하여 신분의 유동성이 봉쇄된 관인의 使役人으로 기능하게 된다.

 

고려의 지방 통치조직은 경기지역, 남도지역 그리고 양계지역으로 다원화되어 있었으며 그 통치 내용도 지역에 따라 달랐다. 5도에는 안찰사를 양계에는 병마사를 파견해 지방을 통치했다. 고려 말기에 와서는 속현과 부곡의 군현병합책으로 점차 일원적인 지방 통치 조직으로 진전되고 이는 조선의 8도 체제의 밑바탕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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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pp86~90 참고)


새 왕조의 초장기여서 일이 번거로워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시기 지방의 호족세력이 강대했던 반면 중앙 행정력이 미약했기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지방의 군 ·현(郡縣)에 파견한 관직. 고려 정부는 현령관과 감무를 엄격히 구분하여 현령관을 파견하였을 때에는 영현으로 승격시켰으나, 감무를 파견하였을 때에는 여전히 속군현으로 취급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권 13 - 고려전기의 정치구조)』, 1981.
하현강,  ??????고려지방제도의 연구??????, 한국연구원, 1978.
박종기, p.92에서는 주현이 곧 계수관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변태섭, 『고려전기의 외관제』, 한국사연구회, 1968, (PP.135~144).
실제로 14세기 후엽의 나주목 거평부곡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천민 집단적 형체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논증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우석 <고려말기 나주목 거평부곡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권13)』, 198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권13)』, 1993.

종래의 이러한 고려시대 촌락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고려시대 촌락의 구조에서 행정촌제의 모습을 찾으려는 연구 또한 있다. 성종대 새로운 촌락지배층으로서 촌장?촌정제의 설정은 행정촌제가 고려 초기부터 시행되었음을 알려 주는 상징적인 조치로 이해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권13)』, 199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권13)』, 199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권13)』, 1993.
(향리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직임으로는 문서와 錢穀등의 기술적 관리를 통하여 국가 행정에 사무적인 뒷받침을 하는 刀筆之任(李佑成, <高麗末期 羅州牧 居平部曲에대하여>, 1996, 그리고 李惠玉<高麗時代의 鄕役>, 1988, 羅恪淳, <高麗 鄕吏의 身分變化>, 1990) 외에도 지방 군사조직의장교로서 그 직무를 겸하기도 하였다.(《高麗史≫권 81, 志35, 兵 1, 兵制?권 75, 志 29, 選擧3, 鄕職 및 李基白, 《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그리고 千寬宇, <閑人考>《近世朝鮮史硏究≫, 일조각, 197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고려? 조선전기 중인연구』, 신서원, 2001.
박경자, 『고려시대 향리연구』, 국학자료원, 200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권13)』, 1993.

- 위의 기사를 도표화 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戶部〕──郎中──員外郞───執事

                  │     (司戶)    (戶正)  (副戶正)     (史)

堂大等──大等──┼──兵部 ───兵部卿──筵上─維乃

(戶長)  (副戶長)  │   (司兵)      (兵正)  (副兵正)(兵史)

                  └──倉部────倉部卿                        

                       (司倉)       (倉正)

    *(  )는 개정 후의 명칭이고, 〔   〕는 추측한 것임.

금일 제가 보건대 시골 토호들이 매양 공무라는 이름을 빌어 백성들을 침해?폭압하므로 인민들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高麗史』권 93, 최승로전)
박경자, 『고려시대 향리연구』, 국학자료원, 2001.


금유.조장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즉 변태섭 교수는 ‘금유.조장의 임무는 조부의 징수가 主였을 것이라 하면서 지방을 지배하는 향호를 통제하기 위해서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사자’라고 하였고(변태섭, 「고려초기의 외관제」, 『고려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1971), 하현강 교수는 ‘금유?조장은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지방에 파견되어 부과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임시직일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하현강, 「고려초기의 지방통치」, 『고려지방제도의 연구』, 한국연구원총서, 1977), 또한 이기백 교수는 ‘태조 때부터 성종 2년까지 금유?조장이 파견되어 있었고 이들은 왕과 지방호족을 연결시키는 유대가 되었다’고 했다.(이기백, 「고려지방제도의 정비와 주현군의 성립」, 『고려병제사연구』, 1968). 위의 세분 모두 금유.조장은 중앙에서 파견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달리 ‘금유.조장은 지방상주관이라기보다는 재지세력자라고이 타당하다.’, ‘금유?조장은 재지세력이었고 지방관 파견 시 없어진 이들은 그대로 해당지역의 지방관으로 전화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시에 모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없는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와 같은 전화가 자연스러울 것이라 믿는다.’, ‘즉, 성종2년의 지방관 파견은 제도의 성립이고 기존 금유?조장을 파한다고 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그대로 지방관을 역임케 한 것은 아닐까 한다. 고려 초와 같이 중앙의 권력이 지방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는 중앙정부의 그와 같은 미온적인 태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주산업은 농업이었던 만큼 조세의 징수는 향리의 기본적인 임무였다고 할 수 있다.


巡訪使(순방사)가 결정한 땅세는 해마다 州郡들에게서 그 정액대로 거두게 되는데 권세 있는 집에서는 바치기를 거절하므로 시골 백성들이 꾸어서 그 숫자를 채우게 되는 것이 한정 없이 많은 양으로 되어 자기 생업을 잃고 정처없이 떠나가게 되었으니 세를 바치지 않는 자는 권세와 지위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냥 두지 말고 살펴 따져서 나에게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高麗史』권78, 식화지 전제)

이에 의하면 향리는 조세의 징수는 물론 그 감면의 직임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정조징수의 최종 책임자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일 것이지만 실제로 전조를 수령하는 역할은 향리에 의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세속에서는 선을 펴는 것으로 명예로 삼아 각기 원하는 바를 쫓아서 절을 짓는 수가 매우 많습니다. 또 그 중에는 중들이 개인적인 거주지로 삼기 위하여 다투어 짓기도 합니다. 주군장리에게 권하여 백성을 노역시키고 公役보다 재촉하여 백성이 고통받으므로 엄격히 금하여 백성의 노역을 제하여 주기를 원합니다(『高麗史』권 93, 최승로전)
이에 의하면 주군의 長吏가 승려들의 부탁을 받아 절을 짓는 것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혹심한 노역을 시키므로 이를 엄단하여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곧 이 당시에 향리에게 역역동원의 책임이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향리에게는 군대동원의 역할도 주어졌다.


上元甲子四十七統和二十七庚戌年二月一日 正骨開心寺到 石析(가를 석) 三月三日 光軍等六隊車一八 牛一千以十間入矣 僧俗娘合一萬人了入………棟梁戶長陪戒尉林長富母主崔祐 副棟梁? ? 邦祐 四弘爲身心 上報之佛恩爲國正功德 普及於一切 辛亥四月四日立(『朝鮮金石總覽』상, 234쪽, 醴泉開心寺石塔記)

위를 따르면 예천 개심사 석탑건립은 향리의 지위를 받은 光軍의 役事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 석탑을 조성하던 시기가 현종2년(1001)이고 또 호장이 광군지위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방에 있어서 이들 향리의 세력은 아직도 막강하다고 보여진다.(박경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고려 조선전기 중인연구』, 신서원, 2001.

其人설립은 賦役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반을 염려하고 화합을 굳게 하기 위하여 여러 읍으로 하여금 한 사람씩 서울에 보내게 하여 복속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뜻이었다.(『成宗實錄』권 50, 成宗, 5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권13)』, 1993.


그러나 여기에 대해 다른 의견도 있다. 「고려시대의 사심관의 성립은 국가권력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공신들의 자신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공인의 의미가 더 큰 것이었고, 고려의 관료체제가 정비된 후에도 사심관의 이러한 기본 성격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심관은 국가권력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귀족이 향촌사회에서의 위치, 국가권력과는 별도의 향촌사회질서의 존재에 따라 국가권력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향촌지배의 방향이었다고 여겨진다.」(朴恩卿, 高麗時代鄕村社會硏究, 일조각, 1996)

지방민의 종주가 되었다는 것이다.(朴恩卿, 高麗時代鄕村社會硏究, 일조각, 1996)


流品을 심사하는 일이다. 流品은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의 貴族制社會에 있어서 주로 문지에 의하여 인물을 평정했을 때 그 인물, 혹은 家에 붙인 등급이다. 그런데 고려에서도 流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甄別流品은 중앙사회와 연결되어 과거 응시자격을 심사하는 것을 포함하게 된다.(朴恩卿,)풍속을 바로잡는 일이다. 고려 향촌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보여 진다.(朴恩卿,)

박용운? 이정신 이외, 『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 신서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