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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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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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무령왕릉


△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리동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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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 꽃피운
동서문명의 용광로


중국 <수서>에 보면 ‘백제’란 이름은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100가(家)가 바다를 건너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오간 데서 나온 이름이란 뜻이다. 이것은 해상왕국 백제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국제적 교류를 진행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 백제인들은 이러한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다양한 문명을 ‘백제’라는 용광로 속에서 잘 융해시키고 응결시켜, 온화하고 섬세하며 우아한 특유의 문화를 창출하여 겨레의 문명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융합상을 ‘세기의 발견’이라고 하는 무령왕릉 유지와 유물에서 그대로 발견하게 된다.


1971년 한여름 장마철 어느날,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한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이 아치형 벽돌무덤에서 죽은 사람의 생몰 연월일과 행적, 무덤의 방향 등을 적어서 무덤 앞에 묻는 지석(2장의 석판)이 발견됐다. 무덤 주인공이나 그의 사망 및 안치 연대, 무덤의 조영 연대, 그리고 왕의 계보 등을 명확히 알려준 것이다. 3국 가운데서 피장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능이다. 묘주는 백제 웅진시대(475~538)의 중흥에 진력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과 왕비다. 우연한 발견과 졸속한 발굴작업, 그리고 관련 기록의 부재로 인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남겨두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바탕하더라도, 그 실체와 상징성, 특히 ‘백가제해’다운 문명의 오감이나 만남의 실상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실상은 영주로 알려진 무덤의 주인공 무령왕의 생전 치적과 직결되어 있다. 40세의 연만한 나이에 즉위한 무령왕은 국도가 한성에서 공주로 옮겨오지 않을 수 없었던 불안의 격변기를 극복하고 공주시대의 번영을 이룬 백제 ‘중흥의 대왕’이다. 8척의 키에 준수한 용모을 갖추고 성품도 인자하고 관대한 그는 창고를 풀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고, 영을 내려 제방을 쌓으며, 유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하는 등 각방으로 민생의 안정을 챙겨 민심이 그를 따랐다. 대외적으로도 일본이나 중국 등 외국과의 왕래나 교류를 적극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중흥기의 모습답게 이 처녀분에서는 108종 2906점의 화려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점에 이른다.



△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의 금제관식. 

유라시아식 왕관 관식
중국 남조시대 자기
고대유럽 벽돌문양
그리고 인도식 유리구슬
한마디로 문명의 백화점
해양강국 백제
일본은 물론
로마·서역문화까지 녹여
문화강국이 되다


무덤은 왕이 붕어(523년)하기 11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사후 시신은 2년간 가묘상태에 있다가 이 무덤에 안장하는 두벌묻기 장법을 따랐다. 길이 7.1m, 높이 2.7m의 방은 이른바 4평1수식(四平一竪式), 즉 연꽃무늬나 인동무늬, 마름모꼴무늬를 새긴 아름다운 벽돌 4개를 포개고, 그 위에 짧은 변을 높이로 세우는 특수한 방식으로 지었다. 벽면 중간에는 등잔을 넣는 작은 벽감실이 달려 있고, 바닥은 무늬 없는 벽돌을 삿자리식으로 깔았다. 동쪽에 왕의 널, 서쪽에 왕비의 널이 배치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풍수지리상으로 남쪽이 용이 오는 방향이라고 믿어서인 것 같다. 바닥에는 길게 벽돌을 포개어 배수구를 만들어 놓았으며, 천장은 둥근 궁륭형이다. 특이한 것은 처녀분인데도 마치 도굴꾼들이 다녀간 것처럼 부장품들이 마구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이러저러한 해명이 있으나, 모두 신빙성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


유물 중에는 왕과 왕비가 쓰던 왕관 장식을 비롯해 금팔찌와 금귀고리 같은 정교한 순금세공품(3kg)과 국내외산 철기, 청동기, 도자기, 유리구슬, 석수(石獸), 통화 등 소재와 기법에서 상이한 여러 문명을 아우르는 귀중한 부장품들이 숱하게 들어 있었다.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북방대륙문화와 마한으로부터 이어지는 남방해양문화가 여기서 접목되는가 하면, 가깝게는 일본과 중국의 문화가, 멀리로는 그리스-로마문화와 서역문화가 여기서 또한 만나기도 한다. 무령왕릉이야말로 여러 문명을 한 자리에서 어울리게 한 ‘문명의 집합처’로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보 154호로 지정된 금제관식 한쌍은 기원 전후 약 1천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지대를 관통한 황금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왕의 널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어진 상태로 발견된 왕의 금제관식은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하고 줄기가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앞면에는 구슬 모양의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줄줄이 달았다. 신라의 금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관식이다.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새 모양의 금제뒤꽂이는 신조사상의 상징이며, 국보 161-1호인 청동신수거울에 새긴 신성한 동물 무늬도 북방유목문화에 속하는 무늬다. 그리고 금동제품의 도금은 아말감야금법, 즉 아말감에서 수은을 증류하고 금이나 은을 가려내는 야금법을 도입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실험결과 밝혀져 백제의 금 제련·정련 기술이 뛰어났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섬세한 동탁은잔은 사비시대의 금동대향로와 더불어 백제 금속공예의 백미를 이루고 있다.


무령왕릉은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더불어 전형적인 벽돌무덤이다. 일명 전축분(塼築墳)이라고 하는 이 무덤은 원래 중국에서 한대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인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형태로서 한나라의 세력이 미쳤던 대동강 유역에 기원 3~4세기께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6세기 백제의 공주시대에 이르러 중국 남조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그 무덤형식이 다시 받아들여진다. 이 시대 이후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무덤에서는 교역품으로 여겨지는 중국 남조 제품의 자기와 청자, 그리고 철제오수전이 여러 점 나왔다. 한편, 나무널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세계적으로 한 종밖에 없는 일본산 금송(金松)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동북아 해상강국으로 군림하던 공주시대 백제가 중국 남조나 일본 야마토 정권과 밀접한 외교관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국보 157호인 금제수식부이식은 왕비의 귀고리로, 누금(鏤金)과 감옥(嵌玉)기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탄환이나 잎사귀 모양의 누금한 작은 장식들을 연결하고, 담록색 둥근 옥을 매달아 대단히 정교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필리그리 기법이라고 부르는 누금은 원래 이집트에서 발생한 뒤 중앙아시아를 거처 중국과 한반도까지 전파되었다. 누금이란 가는 금줄과 작은 금알을 늘여 붙여서 물형을 만드는 정교한 세공기법이다. 이에 비해 감옥은 금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옥을 박는 공예기법으로, 이른바 다채장식양식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기원 초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 유행하다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 전해졌다. 이 두 가지 기법이 고구려에서는 드물지만, 백제나 신라에서는 널리 이용되어 장신구 장식기법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그런가 하면 연화문 벽돌에는 고대 유럽의 전형적 식물문양인 팔메트 무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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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리구슬 장식. 

끝으로, 무령왕릉은 고대 유리제품의 진열장을 방불케 한다는 데서, 백제문화의 교류상이나 국제성을 실감케 한다. 왕비의 허리부분에서 이목구비가 뚜렷한 2개의 유리 동자상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완전하지만 다른 하나는 반파 상태다. 아마 이 작은 동자상(2.5cm)은 호신용 부적으로 사용된 것 같으며, 계통으로는 알칼리 유리계에 속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리제품 가운데서 한국적 이미지를 가장 잘 나타나는 작품이며, 유리제 단독 조각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은 백제가 이룬 뛰어난 유리제조 기술을 말해준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제품 가운데는 이러한 우리의 제품과 함께 크기나 색깔, 형태에서 무척 다양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계통을 달리하는 여러 가지 유리구슬들이 혼재해 있다. 금박을 입힌 금박구슬은 원래 기원전 3세기께 처음 흑해 연안에서 나타나 이집트, 서아시아, 이란,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주 금관총이나 무령왕릉에서 이러한 구슬이 선을 보이는데, 그 형태나 성분 등을 따져보면 기원 2세기 이후에 동남아시아, 특히 타이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과 친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밖에 출토된 ‘무타살라 구슬’이라고 하는 주황색 소옥은 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남방 해상루트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인도-태평양문화권에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에는 기원 2세기께부터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의 몇가지 대표적 유물에서 보다시피 무령왕릉은 말그대로 문명의 ‘용광로’이고 ‘집합처’로서 겨레사의 영광된 한 장을 수놓았다. 백제는 동아시아의 요로에 위치한 해상성국답게 동서남북 방방곡곡의 문화를 진취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으며, 그러한 문화적 진취성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문명한 민족은 강한 민족이고 문명한 나라는 대국이다. 그래서 아마 다산은 백제가 3국 가운데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다고 추단한 것 같다. 백제의 이러한 진취성은 해상국이란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해로를 통한 국제적 교류를 활성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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