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바닷길로 들어온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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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바닷길로 들어온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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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바닷길로 들어온 불교



△ 기원후 4년에 53불상이 표착했다고 전하는 금강산 유점사의 옛 전경. (〈북한불교답사기〉, 민족사, 199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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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별빛따라
뱃길에 실려온 ‘염화미소’


문화현상 가운데서 종교는 전파성이 가장 강한 분야다. 특히 불교 같은 보편종교는 자연이나 혈연 구조에 바탕을 둔 자연종교와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도 추구하는 노력, 곧 전파를 통한 전도를 꾸준히 진행한다. 이와 같은 종교의 전파는 필연적으로 초보적 전달과정인 초전(初傳)과 문화적인 변용을 수반하는 공전(公傳)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실현된다. 초전은 주로 민간 속에서 잠행적으로, 때로는 비밀리에, 그리고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며, 공전은 일정한 초전과정을 거친 뒤 국가나 권력의 공식적인 허용(공허)에 의해 공개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종교가 언제부터 전파되었는가 하는 시원은 응당 초전에서 찾아야 하며, 초전을 넘어선 공전 시기를 그 시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언필칭 무리인 것이다.


종교 전파사 일반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 전파사에서도 전파의 시원 문제는 까다롭고 규명하기가 어려운 터라서 아예 무시하거나, 초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상례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까지도 대체로 초전을 도외시한 채 최고 권력자의 공식허가에 의한 공전을 불교 전래의 시원으로 삼는 것이 교과서적인 통념으로 굳어졌다. 최초의 공전국인 고구려의 경우 372년 소수림왕이 전진왕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를 맞아 불상과 경전을 전해받고 태학과 절을 세워 제자들을 교육한 것을 고구려 불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고, 백제에서는 384년 침류왕이 중국 동진을 거쳐 들어온 서역승 마라난타를 궁중에 초청해 머물게 한 뒤 수도에 절을 세우고 승려 10명을 출가시켜 입주시킨 것을 백제불교의 개척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도 5세기 중반 눌지왕 때 백제를 거쳐 잠입한 서역승 아도화상의 전도활동으로 신도가 늘자, 6세기 전반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마침내 불교가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도화상과 법흥왕, 이차돈 세 사람을 신라 불교를 일으킨 ‘흥법삼성’이라고 추대하곤 한다.



△ 53불상의 일부 (중앙박물관, 〈금강산 특별전〉, 1999년)  

삼국에 대한 불교의 전래 양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왕이 외래 전도승을 스스로 맞이해 우대하면서 절을 세워 승려와 신자들을 배양함으로써 고유의 전통과 신앙에 획기적인 변용을 가져온 공전(공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초단계적인 전파와 수용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전은 상당 기간을 걸쳐야 하는 초전이 없이 어느날 갑자기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잠재의식으로서의 외래 종교는 이질감에서 오는 거부나 냉대로 인해 쉽게 수용되지 않고, 그 전파과정은 순조롭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겪기 마련이며, 따라서 오랜 기간을 요한다. 그러한 과정이 바로 초전단계인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순도가 찾아온 2년 뒤 아도가 전도를 위해 찾아왔는데, 그의 전기에서 고구려 불교의 초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삼국유사〉를 보면, 3세기 중반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 여인 고도녕과 사통해 낳은 자식이 바로 아도인데, 그는 다섯살 때 어머니의 뜻으로 출가했다가 열네살 때 어머니 나라인 고구려로 다시 돌아온다.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전에 아도의 어머니는 이미 불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어린 아들을 출가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불교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인접한 중국에는 기원 전후에 불교가 들어와 2세기 말부터는 모든 지역에 확산됐으니, 이웃인 고구려에 이심전심으로 불교가 알려져서 신봉자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한 선행 초전이 있었기에 소수림왕 때의 공전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372년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다는 불교
과연 그때가 최초일까 민간에서는
이전부터 성했했다는데‥
그럼 북쪽으로만 왔을까
공식전파보다 200~300년전 인도서 뱃길로
가야로 금강산으로 들어왔다는 기록
이젠 북래설뿐 아니라 남래설에 대해 연구와 관심가질때


백제의 경우, 중국 동진에서 건너온 서역승 난타의 신분에 관한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그는 비공식적으로 내방한 한 외국승에 불과했을 것이다. 궁중 출입이 엄한데다 언어 습관이 다르고 외모 형색이 엉뚱한 외국 사문을 왕이 예의까지 갖추면서 맞이하고 궁중에 안주시켰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고, 왕 자신도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단 받아들인 불교는 마치 파발마를 달려 왕명을 전하는 것과 같이 파급되었다고 하는데, 앞선 전래가 없었다면 이러한 급속한 파급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요컨대, 침류왕에 의해 공전되기 전에 백제에는 이미 불교가 상당한 정도로 전파되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 이러한 물증으로 한성시대의 백제 영역이던 한강변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을 들 수 있다. 건무4년(338년)이란 글자가 명기된 이 금동상은 중국 북위시대의 불상 양식으로서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유입된 결과라고 짐작된다. 불교문화 유산인 불상의 주조나 봉안 사실은 공전 이전에 벌써 민간에서 불교가 유포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불교문화를 수용했다는 의미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경주 백률사에서 출토된 이차돈순교비. (높이 106㎝, 818년 건립,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신라에도 공전 이전에 불교가 유행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해동고승전〉에 신라 불교의 기반을 닦은 아도가 일선군에 와서 불교 신자인 모례로부터 고구려에서 온 승려 정방과 감구빈이 포교활동을 하다가 피살된 사실을 전해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아도가 오기 전에 이미 모례 같은 불교 신자가 있었고, 순교한 정방과 감구빈 같은 전도자들이 활약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아도가 오기 전에 신라에는 가람터가 일곱 곳이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단편적인 사료에 의한 추론만으로도 불교가 공전하기 이전에 삼국에는 이미 초전 단계의 불교가 유포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의 불교 전파는 초전이건 공전이건 간에 모두 북방 루트(주로 육로)를 통해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 다분히 초전 단계에 속하는 가야 불교나 동남해안 일대에 남겨진 불교 흔적들을 추적해 보면, 북방 루트에 앞서 남방 해로를 통해서도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북방루트인 인도→서역→중국→한반도 차례의 전래과정과 그 유포 내용을 ‘북래설’로, 남해로를 통한 전래과정과 그 유포 내용은 ‘남래설’이라고 일단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북래설’에만 기울어 ‘남래설’에는 응분의 관심을 돌리지 못하였다.


남래에 의한 초전을 증명하는 기록과 유물은 가야의 건국설화에 얽힌 불행이나 불적(본 시리즈의 8회 ‘만남의 인연을 맺어준 허황옥’ 참고)말고도 여러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금강산 유점사 53불상에 관한 기록이다. 고려의 명신 민지가 쓴 〈금강산유점사사적기〉를 보면, 인도의 문수보살이 얼굴이 잘생긴 53불상을 쇠종 속에 넣고 배에 띄워 보냈는데, 그것이 월지국을 거쳐 신라 남해왕 원년(기원후 4년)에 금강산 동쪽 안창현 포구(현 강원도 간성)에 표착한 뒤 국왕의 명에 따라 유점사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물론 전설적 요소가 있어서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초기 불교가 남해로를 통해 금강산 일대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어 주목된다. 가야 건국설화가 전하는 불행이나 불적들도 설화로서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신화적 요소들이 끼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세심히 음미하고 검토해 보면, 불교가 북래되기에 앞서 남해로를 통해 한반도의 동남해 연안 지방에 일찍이 전파되었음을 간파하게 된다.


남래 불교는 북래 불교처럼 체계적으로, 근기있게 유입되지 않고 표착 등 우발적인 계기에 의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전설적인 윤색 과정을 피할 수 없었으며, 유입이나 보급에서 지속성이 결여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신라 불교에 흡수되어 명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세성이나 미흡한 점이 있다고 하여 불교의 남래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국 불교의 전래는 으레 북래와 남래의 두 통로를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에 바다는 문명교류의 활발한 무대이고, 바닷길은 그 지름길이었다. 불교는 이 길을 타고 해양국 한반도에 거침없이 전파되었다. 불교의 정확한 남래 시한은 단정할 수가 없으나, 유점사의 53불상이 신라 남해왕 원년, 곧 기원 4년에 도래하였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남래 불교는 후한 명제 영평 19년(67년)에 공전한 중국 불교보다 63년, 그리고 북래한 고구려 불교보다는 약 370년이나 앞서 전래된 셈이 된다. 좀 늦잡아서 수로왕의 불행과 연관시켜 본다고 해도, 그가 기원후 42년 강림 즉위하여 199년에 별세하였다고 하니, 그의 말년을 기준 삼아도 고구려 불교보다 근 200년이나 먼저 들어온 셈이다. 요컨대, 바닷길을 통한 불교의 남래가 육로를 거친 북래(공전)보다 200~300년 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래건 남래건 일단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초전을 거쳐 공전 과정에 이르면 한결같이 호국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는 것이 한국 불교 전래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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