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로마문화의 왕국’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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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로마문화의 왕국’ 신라

관리자 0 4894

△ (위 사진) 경주 미추왕릉 C지구 3호분에서 출토된 5~6세기 상감옥 목걸이와 세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물 6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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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로마문화의 왕국’ 신라 


비단길 따라온 로마
로마를 넘어선 신라

어느 외국 학자는 상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3국 시대의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근거는 한마디로, 동아시아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신라에 로마문화가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신라문화가 북방 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다가 남방 해양문화가 가미되어 발달해 왔다는 것이 국내외 학계의 통설이었다. 간혹 서역이나 로마계통에 속하는 유물 몇 점을 놓고 이러저러한 논의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단편적이었다. 이 외국 학자는 30년의 연구 끝에 펴는 자신의 논지가 지금까지의 통설에 ‘하나의 바람구멍을 뚫는’ 파격적인 논지가 될 것이라고 누누히 설파한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되지만, 일리는 있다.

한반도 동남부 일각에서 일찌기 꽃핀 가야문화를 포용한 신라문화에는 상층문화건 기층문화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로마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흔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신라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비교문화적인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확연하지는 않지만, 소재와 형식, 기법 등을 감안하면, 대체로 로마문화와 공유성를 갖고 있는 것과 로마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 등 세가지 내용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것은 신라문화 특유의 국제성과 진취성, 독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문화와 로마문화의 공유성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수목형 금제 관식을 들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관식을 단 고대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는데, 그 중 7점이 가야(1점)와 신라의 것이다. 나머지 3점은 알타이 지방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출토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직 고대의 것은 발견된 예가 없지만, 중세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관식이 유행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원래 성수(聖樹) 숭배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전통사상으로서, 그것이 그리스를 비롯한 서양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에서는 숲의 여신인 디아나가 숭배 대상이 되고, 이를 계기로 성수사상이 보편화되었다. 


기원 전후 황금의 성산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 북방 초원지대에 찬란한 황금문화시대가 열리면서 이들 유목민족들의 이동에 의해 수목형 관식을 갖춘 금관이 동서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식은 당대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도 극히 드물다.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일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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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5~6세기 장식보검 (국립경주발물관 소장 보물 635호)·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5~6세기 금제팔찌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나무모양 금제관식
미소짓는 상감옥 유리목걸이
다채양식 황금장식 보검은
신라-로마교류를 웅변하고
팔찌·반지등 장신구는 
단순유입을 넘어
독자적 발전을 꾀하는데‥
숨죽여 보라.
4~6세기 숨가쁜 문명의 질수
 

신라의 유물 중에는 교류를 통해 로마문화를 고스란히 그대로 수용한 것들도 다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각종 유리제품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리용기류는 총 80여 점에 달하는데, 그 중 출토지가 분명한 22점은 모두가 9기의 신라 고분에서 나왔으며, 그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무늬, 색깔 등으로 보아 거개가 후기 로만유리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특이한 유물로는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된 유명한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가 있다. 지름이 1.8cm밖에 안되는 이 작은 상감옥 속에는 정후면에 모두 6명(그 중 2명은 왕과 왕비로 추정)의 인물과 6마리의 백조, 2개의 나무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작은 유리구슬 속에 이렇게 많은 조형물을 그토록 정교하게 상감하여 장식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물은 피부가 희고 눈이 동그라며 눈썹이 맞닿아 있다. 또 콧날이 오뚝하고 얼굴이 길며 목걸이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백조가 사는 북방계 백인종(아리안)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형질적 특징과 생활환경을 고려할 때, 인물들은 로마 식민지였던 흑해 부근의 어는 한 곳에 사는 민족으로 짐작된다. 로마세계에서는 1세기께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모자이크무늬의 상감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중국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멀리 신라까지 동전하였으니, 언필칭 ‘기행(奇行)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로마세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 중에는 장식보검이란 특이한 단검이 하나 있다. 미추왕릉지구의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6cm의 황금장식보검(일명 계림로단검)이 바로 그것인데, 칼자루는 반타원형이고 칼집은 끝이 넓으며 표면은 금알갱이와 옥으로 상감하는 등 이른바 다채장식 양식(필리그리기법)으로 꾸몄다.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한 다채장식 양식의 검은 동아시아에서는 유일무이하거니와 유사품도 카자흐스탄의 보로보에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트족 묘에서 출토된 단검, 그리고 일본 텐리대 참고관에 소장된 이란계 단검말고는 별로 발견된 예가 없는 아주 희귀한 보검(보물 635호)이다. 이 단검의 원류를 놓고 전래설과 창작설의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누금상감의 양식기법이나 표면에 있는 나선무늬와 메달무늬 등 전형적인 그리스-로마무늬를 고려할 때, 로마나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부터 전래(선물이나 교역품)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전래건 창작이건 간에 이 보검이야말로 신라의 위상이나 교류상을 실증하는 귀중한 보물이다.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손잡이 달린 토기잔이나 용기류가 적지 않은데, 이것은 분명히 로마세계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을 비롯한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문명권에서는 잔이나 용기에 손잡이를 달지 않는 것이 고금의 관행이지만, 로마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손잡이를 붙이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간의 이질적 요소로서 교류의 증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용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신라문화만이 갖는 ‘로마문화성’을 증언하고 있다.


신라인들은 로마문화를 단순히 일회적으로 수용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생활정서나 환경에 걸맞게 변용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신라문화를 한층 아름답게 꽃피웠다. 여러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귀고리와 팔찌, 반지, 목걸이, 허리띠 등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은 신라와 로마가 공유한 또하나의 황금문화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그것을 통째로 삼킨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했던 것이다. 원래 귀고리와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그리스-로마문화에서는 필수적이나,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거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누금감옥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장식품들이 당대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반지에서 보이다시피, 모양은 대체로 로마 금반지의 기본형식인 마름모꼴을 취하나,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같은 고분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띠드리개(국보 190호)는 로마나 시베리아에서 유사품이 발견되기는 했은나, 훨씬 화려하고 개성 있게 꾸며졌다.


가야나 신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디자인의 뿔잔(일명 각배)은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이웃인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유사품이 발견되지 않아,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원래 짐승의 뿔로 만든 이 잔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족들이 술잔으로 쓰던 것을 로마인들이 받아들여 가일층 발전시켰다. 로마세계에서는 그리스신화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잔 끝에 여성상이나 짐승상 같은 것을 장식한 뿔잔을 만들어냈다. 그리스신화에서 짐승의 뿔은 ‘코르누코피아’, 즉 ‘풍요’를 상징함으로써 뿔잔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풍요의 잔’으로 숭상하게 되었다. 아마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가야나 신라는 이를 적극 받아들여 주로 토기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뿔잔을 만들어낸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신라문화는 전통문화의 기반 위에서 북방 대륙문화와 남방 해양문화, 거기에다 로마문화까지 수용하여 융합시킨 하나의 다원적 복합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4~6세기 사이에 신라와 로마 사이에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만남이 있었던 것은 당시 동서문명교류의 큰 흐름의 소산이었다. 기원후 로마는 전성기를 맞아 남해로를 통해 동방 원거리무역을 극동까지 확대하였으며, 흉노와 북위 등 유목민족 국가들은 북방 초원로를 통해 멀리 서역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류의 통로, 즉 실크로드는 신라와 로마를 연결하는 유대고리였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에 로마제국이 망하고, 말엽에는 중계역할을 하던 북위마저 수도를 초원로의 길목에서 내지로 옮김에 따라 유대의 고리는 끊기고 문화의 한 공급원이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세기 전반 법흥왕은 문물제도의 중국화를 꾀하며 중국에 얼굴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라인들의 진취성은 이에 찌들지 않고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로 재현되고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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