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문명교류의 화신,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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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문명교류의 화신, 석굴암

관리자 0 5494

27) 문명교류의 화신, 석굴암


△ 석굴암의 본존불(〈경주역사기행〉, 그린글, 1999,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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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불교미술의 ‘꽃’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에 지어진 석굴암은 동서문명이 시공을 초월해 서로 만나 이루어낸 귀중한 결과물이다. 고대 서양의 헬레니즘 문화 요소를 진취적으로 수용한 불교문명은 인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멀리 신라 땅에까지 전파되어 중세 문명의 찬란한 한 장을 열었다. 그 가운데서도 석굴암은 건축구조에서 내용물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마냥 문명교류의 화신인 양 석굴미술사에 우뚝 서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실체나 위상을 제대로 가늠하려면 반드시 교류사적 조명을 받아야 한다.

문명이 교류하는 것은 문명이 지니고 있는 근본 속성의 하나인 모방성 때문이다. 문명이란 일단 생겨나면 주위에 퍼질 뿐만 아니라, 주위의 문명과 어울리면서 필요한 것은 본받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문명 전반을 살찌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조적인 모방이 아니라 창의적인 모방이다. 이 점에서 석굴암은 독보적인 수범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석굴서 인공석굴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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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의 11면 관음보살상 문화재청 

원래 불교의 석굴은 기원전 2세기께부터 고온다습한 인도에서 사당 격인 차이티아굴과 승방 격인 비하라굴의 두 형식으로 출발하였다.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4세기께 중국에 들어온 뒤 다시 7~8세기 초에 신라로 전해졌다.


이렇게 불교에서의 석굴은 근 1천년 동안 전파와 수용을 통한 모방에 의해 동서의 넓은 지역에 전개된 하나의 보편적 문명현상이다. 그러나 그 전개 양상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및 중국의 경우는 경도가 약한 석회석이나 대리석이라서 굴을 뚫고 그 속에서 내용물을 직접 조각하여 석굴을 조영하나, 단단한 화강석 구조를 가진 신라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실정에 맞는 창의성을 발휘해 산을 파 굴을 만들고 조각된 내용물들을 조립한 후 흙을 덮는 미증유의 시공법을 도입했다. 이렇게 석굴암은 여타 지역의 자연석굴과는 다른,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인공석굴이며 짜임식 건축물이다.


부처 깨달음 얻는 순간 표현

문명의 교류를 촉진하는 창의적인 모방을 평가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본래의 모습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현이야말로 교류의 확실한 증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석굴암에 모셔진 본존불이 불타의 가장 숭고한 영상이라고 하는 정각상(正覺像)을 재현했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정각상이란 불타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자세나 표정을 말하는데, 원래 그것을 형상화한 상은 인도 보드가야 대각사에 모셔져 있었지만 지금은 소실되어 없다. 그런데 중국의 도축구법승 현장이 남긴 〈대당서역기〉 기록에 의하면 정각상의 앉은키는 1장 1척 5촌이고, 두 어깨와 두 무릎의 폭은 각각 6척 2촌과 8척 8촌이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즉 ‘악마를 항복시키고 땅을 만지는 손가락질’의 수인(손자세)을 하고 동쪽을 향해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이 신통하게도 이러한 크기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드팀없는 정각상의 재현인 셈이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건축은 물론, 인체의 조형에서도 각 부분의 크기에 일정한 비례 배분을 설정하여 인체의 안정감이나 균형을 기해 왔다. 가장 이상형의 체구로 얼굴과 가슴, 두 어깨, 두 무릎의 폭을 1:2:3:4의 비율로 정하였다. 석굴암의 본존불말고는 그 어디서도 이러한 이상형의 체구에다 정각상을 한 불상을 찾아볼 수 없으니, 이 본존불이야말로 불상의 백미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석굴암은 구조에서도 동서문명의 공유성과 더불어 신라 건축술의 독창성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신라인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하여 지상세계인 전실은 네모꼴로, 하늘세계인 주실은 둥근 모양의 돔 천장으로 꾸몄다. 특히 천장은 높은 수준의 수학과 기하학 지식을 동원해 네모난 판석들 사이에 비녀 모양의 긴 돌 30개를 박고 그 위에 잡석들을 쌓아 눌러줌으로써 힘의 균형을 보장하는 특이한 공법으로 완성했다. 건물구조형으로서의 돔은 일찍이 중근동 지대에서 발생하여 로마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으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방에까지 알려졌다. 신라인들은 돔의 형태는 받아들이면서도 그 축조법은 독특하게 하는 슬기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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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불군 전경. 작은 사진은 탈레반 정권이 파괴하기 전 바미얀 석불군 서대불 모습.  



석굴암은 불교석굴의 연파(延播) 선상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이다. 문명의 전파에는 중단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연파와 여기저기서 점점이 이루어지는 점파(點播)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그 중 연파는 전파의 연속성이 보장된 가장 확실하고도 유효한 형태다. 인도에서 간다라미술과 융합되어 고유의 석굴미술을 구비한 채 출발한 불교석굴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불군, 우즈베키스탄의 테레메스 석굴, 중국 신장의 키질과 쿰투라 석굴, 투르판의 베제크리크 석굴, 돈황과 뤄양, 윈강의 석굴, 그리고 신라의 경북 군위 삼존석굴(700년께 조영, 국보 109호) 등 수많은 대소 석굴들로 이어짐으로써 동서에 걸친 하나의 긴 연파대를 조성하였다. 석굴암은 이 연파대의 동단에서 가장 완숙된 모습으로 그 대미를 장식한 석굴이다.


간다라·중국 거쳐 독창성 가미

석굴암의 내용물은 한마디로 불교미술의 정수인 불상들의 총집합체다. 그러나 그 조형과정은 어디까지나 불교적 주제와 신라인들의 종교관, 간다라 미술과 신라인들의 미의식을 잘 융화시킨 창조적 과정이었다. 불상이란 부처상만을 뜻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보살상이나 천왕상, 나한상, 심지어 불교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 팔부신중상 등도 포함된다. 불상의 조형은 인도 마투라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나, 간다라 미술에 시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더 유력한 설이다. 원래 석존이 입멸한 후 약 500년 동안은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원후 1세기께 알렉산드로스의 동정을 계기로 페샤와르(현 파키스탄의 북서부)를 중심으로 한 간다라 지방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의 헬레니즘 신상숭배 모습을 목격한 불자들이 그 영향을 받아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간다라 미술의 탄생이다. 간다라 미술은 한마디로 헬레니즘 미술의 양식과 수법으로 불교의 주제를 표현한 조각 위주의 그리스풍 불교미술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술의 정수를 23년간(751~774년) 다듬어진 석굴암의 불상군에서 찾아보게 된다.


보살·나한·천왕 등 불상 집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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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내부에는 본존불을 비롯해 모두 40구의 불상이 조각되었으나, 감실의 보살 2구가 도난당하는 바람에 지금은 38구가 남아 있다. 불상 개개의 세련된 조각기법과 상 크기의 알맞은 비례 배분, 부드러운 조형성, 감도는 숭고한 종교정신 등으로 인해 불상 전체는 하나의 조화롭고 완벽한 불교세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수학과 기하학의 정밀한 설계구조까지 합쳐지다 보니, 석굴암은 명실상부하게 ‘동양에서는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걸작품’이다. 이것은 1909년 석굴암을 탐사한 일본의 한 미술사학자가 내린 평가다. 그런가 하면 석굴암은 5세기 중엽에 조영된 중국의 윈강석굴과 7세기 초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호류지에 남긴 불화와 더불어 ‘동양 3대 문화재’의 하나로도 꼽힌다.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이 모든 독창성과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6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되었다.


석굴암은 분명 우리의 최상급 국보(제24호)이며 세계인들의 공동 문화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보존을 소홀히 해왔으며, 아직 미제의 과제들을 남겨놓고 있으니,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5~6차례의 보수공사를 하면서 범한 오류들은 그 보존에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시키고 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돔 외부를 보강한답시고 덧칠한 콘크리트는 내부의 공기 흐름을 차단해 이슬맺힘 현상을 낳았고, 그 후 그들에 의한 두 차례의 보수에서는 이런 현상을 없앤다면서 마구 증기세척을 해대니 결국 석재의 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세 차례의 보수를 진행해 이중 콘크리트돔을 만들고, 기계장치로 이슬맺힘 현상을 가까스로 막기는 했으나, 또다른 기계의 소음과 진동으로 구조의 변형을 자초했다. 급기야 전실 앞에 유리 차단막을 설치해 관람을 제한하는 극단조치까지 취하고 있다. 석굴암의 가슴아픈 수난사다. 이에 더해 광창의 존재 여부와 감실 구멍의 용도 해명, 그리고 콘크리트의 처리 같은 일련의 문제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복원 잘못 이슬맺힘 등 수난도

석굴암의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불교와 그에 바탕을 둔 복합적 문명체인 불교문명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숨쉬는 문명이다. 그런데 미국의 안보전략가인 헌팅턴은 이른바 ‘문명충돌론’에서 기상천외하게도 일본은 하나의 문명권으로 설정하면서도, 불교문명은 아예 문명권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유는 불교가 탄생지 인도에서 이미 소멸되고,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토착문화에 통합’되어 그 실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남아와 동북아의 넓은 지역에 깊이 뿌리박고, 오늘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며, 유럽인들마저도 심취되어 가는 불교문명을 주제넘게 거세하는 것은 ‘눈감고 아옹하는 식’의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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