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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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전래

관리자 0 4198
(29)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전래

△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24.5×24×9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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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서 십자가가 나온 까닭은…

흔히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200년쯤으로 잡는다. 그것은 카톨릭이 처음 들어온 때부터이고, 다수파인 개신교로 말하면 겨우 100년 남짓하다. 이웃 중국의 1300여 년이나, 일본의 약 400년에 비하면 짧은 역사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 한때 파도처럼 밀려온 기독교의 동방전파, 즉 동전(東傳) 물결이 한반도의 문턱에서 막혀버렸던 것일까 ? 아니면 비켜간 것일까 ? 이때까지 의혹만이 부풀려져왔을 뿐, 별로 밝혀진 바는 없다.


7∼8세기 성모상등 경주 출토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출현한 후 1000여 년이 지나서 동서기독교로 나눠졌는데, 이 분열되기 이전의 기독교를 고대 동방기독교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대 동방기독교는 넓은 의미에서는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초기의 기독교와 동전된 기독교를 통틀어 말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동전된 기독교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고대 동방기독교라고 하면 후자인 동전된 기독교를 뜻한다. 이 기독교의 동방전파는 5세기 중엽에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파의 주도에 의해 페르시아와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7세기 중엽에 중국까지 이른다.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리운 이 고대 동방기독교는 635년 당 태종 때 처음 중국에 들어오는데, 그 특유의 매력 때문에 일시에 정식 공허(公許)를 얻어 250년간 몇 만명의 신도를 포섭할 정도로 흥성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기독교 동전의 제1차 파고이다. 그러나 경교는 ‘회창법란’(845)과 ‘황소의 난’(878) 등 일련의 배타적 소요에 휘말려 중국 본토에서는 거의 멸적되고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의 인접지역인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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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에서 출토된 성모 마리아 소상. 앞면과 뒷면 (7.2×3.8×2.8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바다든 강이든 물결은 어느 지점에서 수직적으로 딱 멈춰서지 않고 잔잔한 여파를 남기면서 서서히 가라앉는다. 종교의 전파도 마찬가지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 물결은 중국에서 중단되지 않고 멀리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아직은 사료와 연구의 부족으로 전파 시기와 내용, 성격, 영향 등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그 개연성을 넘어 초전(初傳)단계의 유입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근거는 우선, 관련유물이다. 가장 유력한 증거 유물로 꼽히는 것이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역시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과 성모 소상이다. 이 4점의 유물은 모두 7~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들이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십자가의 5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스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그리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유물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하던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나, 간혹 유행하지 않았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다. 따라서 몇 점의 유물을 특정 시대의 어떤 사회상 증거물로 삼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는 다른 방증적인 유물이나 기록을 첨가하여 증거를 보완해야 한다.


당태종때 종국에 첫 전파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초전을 시사하는 증거로는 이상의 유물말고도 몇 가지 관련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7세기 말의 고승 혜통(慧通)에 관한 글이 있는데, 그 속에 그가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의 ‘외도’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하는데, 당시 새롭게 접한 다른 종교란 경교일 가능성이 높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의 조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의 천거로 고종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해준 덕분에 고종과 가까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고종은 경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에 이어 당에서 경교를 중흥시킨 장본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주에 경교사를 짓도록할 정도로 경교에 경도된 군왕이었다. 이러한 고종과 친분관계를 맺고있는 혜통으로서는 당에 공전된 경교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그 내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외도’란 곧 이 경교를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한 외도를 ‘서울에서 멀리했다’는 것은 경교가 신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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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경주에서 출토된 철제 십자문장식 2점(좌: 5.8×5.6cm, 우: 2.4×3.2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출토된 십자가 



<삼국유사> 중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이나 신화와 유사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는 전설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내용과 비슷하며, 태종대왕 때 청개구리 수만마리가 나무 위에 나타나자 놀란 서울시민들이 달아나다가 100여 명이 죽고 많은 재물을 잃었다는 기사는 ‘출애급기’에 나오는 개구리 소동과 흡사한 점이 있다. 문명현상에서 상사성이 곧 상관성은 아니지만, 서로 비교하여 상관관계를 추론하는 것은 유효한 연구방법이다. 문명간의 상사성은 수용에 의한 모방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보편성이란 문명의 속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즉 같은 환경이나 여건 하에서는 물론, 때로는 다른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용과 형태에서 유사한 문명이 창조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명의 한 속성으로서의 보편성이다. 이러한 점에 유의할 때, <삼국유사>와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들간에 어떤 상사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되나, 아직은 연구의 미흡으로 인해 그 상관성 여부는 가늠할 수가 없다.


“마귀·외도 서라벌서 멀리했다”

이상의 국내 유물과 기록 외에도 한반도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기사들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초전을 일정하게 방증하고 있다. 우리 민족사의 한 구성부분으로서 통일신라와 같은 시대에 남북국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교류가 빈번했던 발해에서는 기독교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출토되고, 한때 수도였던 동경 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1926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鞍山) 부근에서 요대(遼代) 성종 때(11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되고,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도 발견되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이곳에는 상당수의 경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가 고려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이 지역에는 그 이전에 이미 경교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삼국유사엔 구약성서 내용도

이와 더불어 불교의 기독교적 요소도 기독교의 초전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 불교미술인 간다라 미술은 고대 그리스문화에 바탕한 헬레니즘문화의 영향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극락정토사상이나 미래(내세)와의 관계에서 현재를 파악하는 미륵불사상 같은 것은 원시불교에 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이름으로 들어온 이러한 사상과 문화를 기독교적 사상과 문화의 간접적 유입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 속의 기독교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불교 유입의 수반물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종교로서 기독교 자체의 직접적인 유입이나 전파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초전 현상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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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비문(정수일 저, <고대문명교류사 연구>, 사계절, 2002, 108쪽)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은 일찍이 한국에 4년간 머무르면서 전국의 사찰을 돌아본 후 마지막 1년은 금강산 장안사에 체류했는데, 이때(1917년) 그녀는 절 안에 당나라 때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781년 건립)의 모조비를 세웠다. 고대 동방기독교(경교)의 한반도 전파를 상징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이와같이 비록 증빙사료는 아직 불충분하지만,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초전만큼은 그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언제 초전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시원 문제이기도 하다. 비교적 명확한 증빙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751년 건립)에서 출토된 돌십자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초전 시기를 8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교가 중국에 초전(635년)된지 100여 년 후의 일이다. 물론 아직은 고증에서 불확실성이 적지 않고, 개연성의 범위를 크게 벗아나지 못하는 면도 없지는 않으며, 공식적 허가에 의한 공전(公傳)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그나마 초전의 증빙으로는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와 유물을 발굴하여 초전의 확실도를 더욱 높여야 하겠지만, 이만큼의 논증으로도 이제 한국과 기독교문명간 만남의 역사는 200년이 아니라 그 6배인 1200여 년으로 잡아봄직하다.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기독교의 상징물인 돌십자가가 발견된 사실, 즉 불교와 기독교가 한곳에서 어우러진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불상과 예수상이 한곳에 모셔졌다면 청천벽력이 일어날 오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선이 악으로 변한 세상에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기에는 인간의 지혜가 아직 너무 부족한 현실이고 보면, 그저 그 선을 염불처럼 되뇔 수밖에 없다. 불교와 기독교의 어울림이라는 ‘선’ 앞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대의 퇴행이자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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