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장보고 해양경영의 문명교류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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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장보고 해양경영의 문명교류사적 의미

관리자 0 4058
(32) 장보고 해양경영의 문명교류사적 의미

△ 장보고 영정.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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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펼친 기개
동서교역 꽃피우다

인간은 존재양식에 따라 크게 순수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단순인간’과 사회관계 속에서 남을 위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의 두 부류로 대별된다. 그런데 역사인으로서 이 ‘사회적 인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건적 인간’과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건창조적 인간’으로 나뉘어진다. 이 ‘사건창조적 인간’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위인(혹은 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위인은 대체로 역사의 격변기에 나타나 그 격변을 타개하는 데서 선도적 구실을 한다. 그러나 위인도 어디까지나 사회관계 속의 인간인 만큼 역사와 시대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9세기 동북아 정치·경제 격변기

우리 겨레사에서 이렇게 역사의 격변기에 ‘사건창조적 인간’으로 역사무대를 활보한 위인의 전형을 꼽으라면 아마 장보고를 지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9세기 신라를 비롯한 동북아의 전반적 정세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신라와 중국(당), 일본 3국을 아우르는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우리의 겨레사나 동북아의 지역사뿐만 아니라, 동서문명 전개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시대를 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그를 “동방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8­9세기 동북아 3국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의 토호들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가면서 지방분권적 체제로 변해가는 격변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에 대한 조공무역으로 대표되는 공무역은 점차 쇠퇴하고, 대신 각지에서 흥기한 상업집단간의 사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틈을 타서 해상에서는 해적행위가 빈발하고, 해적에 의한 신라인 노예매매도 기승을 부렸다. 더불어 실크로드 해로를 통한 아랍-무슬림 상인들의 교역 여파도 한반도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그 극복을 진두에서 지휘할 위인의 출현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었다.


“해적소탕·무역부국” 다짐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출현한 위인이 바로 해상왕 장보고다. 그의 출신이나 행적, 역사적 평가에서 아직은 이의나 애매한 점들이 있어서 우리 앞에 다가선 장보고의 실체가 뚜렷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해상왕국의 건설자’, ‘해양상업 제국의 무역왕’으로서 ‘인의지심(仁義之心:어질고 의로운 마음)’과 ‘명견(明見:현명한 견해)’을 두루 갖춘 사건창조적 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해도인(海島人: 바다 가운데의 섬 사람)’으로서 790년께 전라도 남단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릴 적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어나 ‘활보’, ‘궁복(弓福)’, ‘궁파(弓巴)라고 불리웠다. 20대 후반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30세 남짓에 강서성 서주에서 군사 5천명을 거느리는 무령군 군중소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장으로 출세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과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규합해 무역에 종사하고, 산동성 적산포에 법화원을 세워 유민들과 유학승들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당나라에서 자치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던 신라방과 신라촌을 거느리는 총수로 맹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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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해진이 자리한 전남 완도 전경. 



그러다가 신라인들이 해적에 납치되어 노예로 인신매매되는 참상을 목격하고는 의분을 참지 못해 828년 귀국을 결행한다. 흥덕왕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신라 동포들이 해적에 노예로 잡혀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하고 귀국했다면서 군사 1만을 주어 청해진을 건설한다면 해적을 일소하고 국제무역으로 얻은 재부를 나라에 바치겠다고 약조한다. 장보고가 간직해 온 애국애족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왕은 그의 주청을 받아들이고, 그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한다.


그는 맹세대로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펼쳐 해적과 노예상들을 일격에 소탕하고 각지에 난립한 군소 해상집단을 평정한 후 중국과 일본에 흩어져 있는 신라인들과 힘을 모아 신라·당·일본간의 국제적인 삼각해상무역망을 구축했다. 거기에 자위적인 군사력마저 보유하여 동북아의 해상교통권과 무역권을 완전히 거머쥔 명실상부한 ‘해상왕국의 건설자’가 된다. 중국에는 ‘견당매물사’, 일본에는 ‘회역사’란 이름의 교관선단을 파견해 동북아뿐만 아니라, 멀리 아랍-무슬림 상인들과도 교역한다. 일본인들이 가산이 기울 정도로 신라 물품을 사들였다고 하니 그 무역규모가 얼마나 큰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동북아 전체를 장악한 최초의 해상왕국은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청해진 중심 해상왕국 건설

그러나 정치의 유혹은 이 의롭고 현명한 위인을 무모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자의반 타의반 중앙 귀족들의 왕권쟁탈전에 휘말리면서 딸을 46대 문성왕의 두 번째 비로 바치기로 한다. 그러나 청운의 꿈도 잠시, 그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의 사촉을 받은 부하 염장에게 술자리에서 피살(846년)되고 만다. 피살 후 5년만에 청해진이 해체되니, 찬란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동북아의 드넓은 해역을 주름잡던 장보고의 해양경영은 무역을 중심으로 한 문명교류활동이 본질이다. 그 활동의 문명교류사적 의미는 한마디로 당대의 동서문명교류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823년에 씌어진 <전당문(全唐文)>은 탐부라(耽浮羅), 즉 제주도 상인들의 큰 배가 중국 남단의 광주까지 오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의 도당구법승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비롯한 여러 사적은 양주나 천주 등 중국 동남해안의 국제무역도시에서 신라 상인들이나 교관선이 활발하게 무역거래를 하고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특히 9세기 중엽부터 나타난 아랍 문헌의 기록을 보면, 많은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하고 있으며, 신라로부터 비단, 검, 말안장 같은 물품을 구입해 간다고 적고있다. 이러한 내왕과 교역이 그들의 선박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십중팔구는 그들이 거래하거나 거주하고 있던 중국 동남해안 지역을 드나들던 신라 선박을 이용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장보고의 해양경영에 의해 동서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 해로가 지금까지의 통설처럼 중국의 동남해안에 와 멈춰선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내지는 한반도를 기착지로 하여 일본까지 연장되었음을 입증한다. 그 주항로는 중국 동남해안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잇는 횡단로와 사단로이며, 그 연장선으로 한반도 서남 해안에서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를 거쳐 북큐슈의 하카다로 연결되는 바닷길이 있었다. 이 바닷길은 실크로드 해로의 동쪽끝으로서, 동서문명교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황해 수호신 ‘신라신’ 전파

장보고의 해양경영은 우리나라의 문명교류사에서도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동북아 3국을 갈무리한 넓은 해역을 종횡무진 항해하면서 강력한 통제력으로 국제적 삼각무역망을 형성한 것은 우리나라의 해양진출과 국제무역의 효시가 되었다. 이러한 해양경영은 발달된 조선술과 항해술이 뒷받침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술만 봐도 ‘신라선’ 한 척의 평균 적재량은 250톤쯤 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650여 년 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앞세운 기함의 적재량과 맞먹는다.

우리의 해양진출과 국제무역의 효시를 장식한 장보고의 해양경영은 대외무역이 지녀오던 전통적 성격을 일변시켰다. 그는 동북아 3국에서 중앙집권적 율령제도의 붕괴에 따른 공무역의 쇠퇴와 사무역의 흥기라는 새로운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3국의 지방세력 집단들간의 사무역에 주력했다. 이것이 무역망을 확충하고 지방정권으로서 ‘해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주요인의 하나다.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과의 1대 1 단선무역 형태를 탈피해 동남아나 서역로부터의 수입품을 재수출하는 중계무역도 사상 처음으로 실현했다.


장보고의 해양경영이 문명교류사에 미친 영향 가운데서 특이한 것은 ‘신라신’의 전파다. 713년 경에 편찬된 일본의 <풍전국풍토기>에서 보다시피,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신라인들에 의해서만 해외진출이나 해상교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해의 수호신으로서 ‘신라신’에 대한 신봉이 싹트고 있었다. 특히 도당구법에 열심이던 일본 천태종의 ‘신라신’에 대한 신앙은 각별했다. 조사인 사이쪼는 당나라로 떠나기 전에 가와라(현 후쿠오카현)에 있는 ‘신라국신’에게 기원제를 올리고, 돌아와서는 사은 표시로 신궁원이란 절까지 지었다. 신라인들의 도움 속에서 재당 9년 반 가운데 2년 반이나 신라인들의 도량인 적산 법화원에 기거한 천태종 3조 엔닌도 귀국해서는 ‘신라명신’에게 사은하는 예를 올렸으며,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적산선원을 세워 ‘적산대명신’(적산신라신)을 모셨다. 근간에 방영되는 한 드라마에서 장보고와 신라선단의 신묘한 활동을 ‘해신(海神)’에 비유한 것은 이래서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희세의 위인 장보고의 해양경영은 겨레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장거다. 해양국가의 미래를 향한 도약에서 선현이 이루어놓은 위업은 소중한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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