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고려문화의 금자탑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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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고려문화의 금자탑 ‘팔만대장경’

관리자 0 4732
(36) 고려문화의 금자탑 ‘팔만대장경’

△ 팔만대장경의 첫번째 경판인 대반야바라밀다경.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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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여 경판에 아로새긴 ‘호국’ 발원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불교의 가호에 의지해야 한다는 유훈을 남겼다. 이처럼 고려에서 불교는 건국이념이자 국교인 동시에 정신적 지주였다. 그리하여 불교는 미증유의 번영기를 맞았는데, 그 구심점은 불교문화의 진작이었으며, 그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이다.


1자1배 극진정성 ‘호국’ 발원

대장경이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 피타카’를 번역한 말로서 ‘삼장경’ 혹은 ‘일체경’이라고도 한다. 여기엔 부처의 가르침인 ‘경장’과 불자나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인 ‘율장’, ‘경장’과 ‘율장’에 관한 다양한 해석인 ‘논장’의 세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애초 인도에서 불전을 나뭇잎에 새겼기 때문에 일괄해서 ‘패엽경’이라고 불러오다가 경장과 율장, 논장을 세 개의 광주리에 나누어 보관했다는 데서 ‘대장경’이란 이름이 유래됐다. 이러한 불전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양 각국에서 경문을 나무에 새기기 시작했는데, 그 종류가 20여 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완벽한 것이 <고려대장경>이다.


고려는 일찍부터 불력을 빌려 국난을 타개하려는 발원과 자주적 문화강국의 체통을 세우기 위해 대장경을 나무판에 새겨 보관하거나 인간하기 시작했다. 거란이 내침하자 현종 때인 1011년부터 선종 때인 1087년까지 77년간이나 대구 부인사에 도감을 두고 송나라판과 거란판의 대장경을 참조해 6천여 권의 경판에 돋을새김한 <초조대장경>을 만들어냈다. 이 대장경의 원력으로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갔다고 전한다. 그 후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가져온 장서 등을 보충해 26년간(1073~1099년)의 노력을 쏟은 끝에 1010부, 4740여 권의 증보판인 <속장경>을 재간했다. 이렇게 일차 완성된 대장경 경판은 부인사로 옮겨져 소장되었으나 1232년 몽골군 침입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극히 일부만 일본과 국내 몇 곳에 흩어져 전해진다. 1236년 몽골군의 재침을 당한 고려는 역시 대장경의 원력을 발원하는 뜻에서 파천한 임시수도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전란 속에서 1251년까지 16년간 <재조대장경>(다시 판각한 대장경)의 인간에 성공했다. <재조대장경>은 원래 강화도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소장되어 있다가 조선초 개경 서대문 밖 지천사를 거쳐 오늘날 해인사 경내에 있는 신비의 장경판전(국보 52호)으로 옮겨졌다.


과학적 공정…750여년째 원형

천자문 순서로 불전을 새긴 이 대장경은 모두 663함, 1562부(혹은 1516부), 6778권(혹은 6783권)이고, 경판 수는 8만1340판이며, 이것이 안팎으로 새겨져서 16여만 쪽을 이룬다. 그래서 8만 여판에 8만 4000가지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있다고 하여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경판 양끝에는 각목을 붙여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하고 네 귀퉁이에는 동으로 장식을 달았으며 방충과 내수를 위해 판 위에는 가볍게 옻칠을 했다. 경판의 길이는 68~78cm이고, 폭은 약 24cm, 두께는 2.7~3.3cm, 무게는 3~3.5kg 정도다. 한면에 23행, 한 행에 14자로 앞뒤 양면에 644자이니, 전체 글자 수는 줄잡아 5200여 만 자를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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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장경을 CD-ROM에 담기 위한 작업중 두드리기 단계의 모습. 대장경 원문을 얻으려면 먹칠하기, 종이붙이기, 두드리기, 떼어내기등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경판은 목판인쇄용으로 재질에 관해 이때까지 대체로 자작나무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 한 임산공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장미과에 속하는 산벚나무류가 과반수로 가장 많고, 북부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1할에도 미치지못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밖에도 몇 가지 나무가 쓰였다. 물관이 골고루 흩어져 수분함유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조각과 보관에 유리한 산벚나무류를 택하고, 여러 가지 과학적인 공정을 거쳐 경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고려인들의 슬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무를 베어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나무의 진을 빼고 판자 내의 수분분포를 균일하게 하며 나뭇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소금물에 다시 삶았다가 그늘에 말린 뒤 경판을 만든다. 그래서 75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판이 썩거나 좀벌레가 갉아먹는 일이 없으며, 경판의 모양이 변함 없이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글자를 새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성의 발현 그 자체다. ‘1자 1배’, 즉 글자 한자를 새기곤 절을 한번 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기에 그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각자에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세계 인쇄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각자공 한 사람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긴다고 하면, 각자에만도 연인원 130만 명이 동원된 셈이다. 그밖에 필사공, 목공, 칠공, 운반부, 교정사, 기도승 등 인부도 매일 200명 이상이 함께했으니, 판각을 완성하는 데는 연인원 약 25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 장의 무게를 3kg씩만 잡아도 240톤이나 되는 경판 전체를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240년간 연인원 250만명 대역사

흔히들 이러한 사실들을 들어 <팔만대장경>을 고려불교의 ‘꽃’이니, 불전의 ‘총서’니 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국운을 건 방대하고도 장기적인 대역사임을 감안할 때, ‘고려문화의 금자탑’이라고 함께 일컬어도 별 부풀림이 없는 성싶다. 원래 ‘금자탑’이란 말은 이집트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가 한문의 ‘금(金)’자와 모양새가 비슷하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나, 그 참뜻은 튼실한 기초 위에서 쌓아올린 불멸의 업적과 최상의 보람이란 것이다. 물론 고려청자나 금속활자도 대장경에 못지 않은 업적과 보람으로 간주되지만, 그 완성과정이 주는 의미는 좀 다르다. 2.5톤짜리 돌 230만개를 30년 동안 40층 빌딩 높이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피라미드의 그 놀라운 정확성과 내실성, 지구력이 바로 <팔만대장경> 판각과정과 결과에 그대로 투영되고 갈무리되어 있다. 이 대장경은 주변 여러 나라에 산재했던 각종 대장경본을 가져다가 꼼꼼히 교감하고 하나하나 수정 보완하면서 1011년 초조를 시작한 때부터 1251년 재조를 완성할 때까지 24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세계 인쇄사상 유례없는 대역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급기야 피라미드가 세계 7대 기적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것처럼, <팔만대장경>도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가 대장경과 더불어 해인사 장경판전을 ‘세계문화유산’(463호)에 등재함으로써 인류의 공동유산임이 확인되었다.


일본의 끈질긴 약탈 시도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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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모습. 

국난기를 포함한 장기간에 걸쳐 거국적 사업으로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고려인들의 드높은 자주의식과 문화수준, 역동적 개방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장경의 인간과 때를 같이해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고조선으로 삼고, 단군을 겨레의 시조로 인식케 함으로써 민족자주의식을 고취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이 속속 출간되었고, 세계 처음으로 금속활자가 발명되었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숭고한 정신세계와 문화적 창조력, 국난을 극복하면서 국가대계의 금자탑을 한층한층 쌓은 견인불발의 의지와 끈기가 있었기에 <팔만대장경>의 대역사는 비로소 완성되고, 독보적인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금자탑의 귀감인 <팔만대장경>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 대장경을 저본으로 중국은 청나라 말엽에 와서야 <빈가정사장판>이란 장경을, 일본은 <축쇄장경>을 각각 만들어냈다. 뒤늦게 불교를 전해받은 일본은 틈만 생기면 갖은 술수로 <팔만대장경> 경판을 빼가려 시도해왔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일본은 여러 구실을 붙여 83회나 우리 대장경 인쇄를 요청했으며, 거절 당하면 온갖 추태와 협박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종대왕 때는 요청이 거부되자 일본 사신이 3일간 항의단식하는 희극이 벌어졌으며, 전함을 보내 약탈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과 승병들이 해인사로 쳐들어오는 왜병들을 ‘왜구치’란 고개에서 막아 대장경을 지켜냈다. 일제는 총독부 시절에도 대장경 전부를 훔쳐갈 계략까지 꾸미고 얄금얄금 몇 장씩을 빼돌렸다. 대장경의 소장처인 해인사는 7차례의 화재 등 형언못할 삼재팔란(三災八難: 불교에서 말하는 갖가지 재난)을 겪으면서도 겨레의 철석같은 수호정신과 대장경의 신력, 해인사의 불덕으로 말미암아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을 지켜낼 수 있었다.


전산·동판·해제본으로 맥 이어져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날도 선현들의 지혜를 이어받아 대장경의 맥을 꿋꿋이 잇고있다는 사실이다. 해인사쪽은 100여 명의 전문인력과 80여 억원의 예산을 들여 지난 2000년 9년 만에 대장경 전산화작업을 완료했다. 지난해부터는 200억원이 드는 경문 동판화작업에 착수했다. 천년 수명의 나무재질로 된 경판을 만년 수명의 동판재질로 갱신하는 뜻있는 역사다. 동판 복원에는 여러 종교단체가 물심양면 힘을 보태기로 했다. 모두 열린 마음으로 겨레의 유산을 빛내는 거사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그뿐인가. 북한도 북한대로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 <팔만대장경 해제>본을 출간했다.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겨레의 마음이야 누군들, 어딘들 다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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