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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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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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 문익점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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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백성을 따습게 할지니”

얼마전 한 정당인이 동료 의원이 외국에서 들고 온 자그마한 선물용 포장쌀 샘플을 소개하면서 의원 저마다가 ‘문익점이 되어달라’고 독려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받아들일 만한 외국의 좋은 아이디어로서 그것이 바로 ‘현장정치’라는 것이다. 해석이야 어떻든간에, 600여년 전에 살고 간 문익점이 오늘 우리들 속에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직감케 한다.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에서 추모를 뜻하는 사당 수가 많기로는 최영 장군과 충선공 문익점이 쌍벽을 이루며, 국가에서 사당을 짓고 논밭과 노비를 내려 후손들이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한 주요 부조묘의 주인공도 문익점이다. 그만큼 문익점은 우리겨레의 사랑과 모심을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받는 위인이다.


고려말 문반으로 관직 진출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문반 출신으로 여러가지 관력을 거치면서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에 자의반타의반 휘말려 부침을 거듭하다 보니 그에 관한 기록이나 평가에는 이론이나 왜곡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 전설적 요소마저도 끼어있다. 충절이나 효심, 학문도 출중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려는 부민(富民)정신에서 오는 목화씨의 반입이다. 그 옛날 몇 알의 목화씨를 들여다가 우리겨레의 생활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목면공’, ‘문화영웅’으로서의 그의 교류사적 업적은 커다란 현실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문익점’이 필요한 것이다.


고려 말엽의 문신이며 학자인 문익점은 1328년(혹은 1329년, 1331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낙향한 선비의 둘째로 태어나 열살 때 대유학자 이곡의 문하생이 되었다. 20살 때 시경만을 가르치는 국립학당 격인 경덕재에 들어갔고, 23살 때는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이 주관하는 정동성향시에 급제했으며, 33살 때는 공민왕이 새로 지은 궁궐인 신경에서 실시한 신경동당시에 응시해 급제했다. 과거에 급제한 문익점의 첫 벼슬은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김해부사록이다. 이어 유교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순유박사로, 그리고는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핵심기관인 사간원의 좌정언에 발탁되었다. 재사에 따르는 승승장구의 관력이다.


‘충절 행적’ 기록마다 엇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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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화꽃의 푸근하고 탐스런 모습.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목면시배유지는 사적108호로 지정돼 있다. 


이 무렵 공민왕이 실시한 국권회복 정책과 친원파 숙청으로 인해 고려와 원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원나라 순제는 일방적으로 그에게 내린 인수를 철회하고 26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한다. 이에 공민왕은 여러 차례 사절단을 보내 해결을 시도했으나, 원은 사절단마다 매양 억류해버린다. 그래서 왕은 다시 1363년 3월과 4월에 사절단을 각각 파견하면서 문익점에게 문서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 직책을 맡겼는데, 어느 사절단에 속했는가 하는 기록부터가 엇갈리면서 그의 원나라에서의 활동과 귀국 시기 및 목화씨 재래 등에 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있다. 예컨대, <고려사>에는 그가 덕흥군에 아부했다가 덕흥군쪽이 패하자 1364년에 ‘득목면종(得木綿種)’, 즉 ‘목면 종자를 얻어가지고’ 귀국했다고 하며, 조선조의 <태조실록>에는 원에서 돌아올 때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1464년에 편찬한 <가장(家狀)>을 비롯해 남평문씨의 가전을 집대성한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1819년)에는 이와 정반대의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군주가 없다”고 하면서 원제와 덕흥군쪽의 끈질긴 회유와 압력을 물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끝내 지킨다. 그러자 원제는 42일간 구류했다가 그래도 불복하니 남방인 교지(운남) 지방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거기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해가지고 1367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원 유배 귀국길에 목화씨 반입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가 조선조의 건국에 제동을 건 고려인들의 행적을 폄하했던 경향이나, 문익점이 귀국 후 처벌되지 않고 공민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여말선초의 여러 군주들로부터도 충신의 예우를 받은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덕흥군 아부설’은 일종의 낭설로 판단된다. 이렇게 문익점의 3년간 귀양살이 여부가 기록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원으로부터의 귀국 연대도 3년간의 차이(1334년과 1337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이 금지되어 목화씨 10개를 붓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의 절절한 애국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가공 윤색한 전설적 일화라고 짐작된다. 2세기 경 중국 공주가 누에씨를 모자솜 속에 감추어 호탄(현 신쟝 위구르자치주)에 전해주고,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신부가 인도 북부로부터 역시 누에씨를 지팡이 속에 숨겨 몰래 로마로 반출했다는 유사 일화도 있으니, 굳이 허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그밖에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반출금지품인가 아닌가와 선비로서 밀반출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등 이러저러한 시비거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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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씨아와 물레 



아무튼 문익점은 귀국한 후 친원정책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비난하기도 하여 탄핵과 좌천, 재기와 승진 등을 거듭하면서도 충효의 도는 물론, ‘목면공’의 집념도 실천해나간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원에서 들여온 목화씨를 장인 정천익에게 나누어주어 3년간이나 시험재배에 고심하던 끝에 겨우 한 그루만이 살아남아 재배에 성공한다. 천익은 호승(서역승)으로부터 실뽑고 베짜는 기술과 기구를 배워 무명을 짜니, 10년도 채 안되어 목화 재배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398년(혹은 1400년)에 70살을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문익점은 생전에 나라가 진흥하지 못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한 세가지 점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삼우당(三憂堂)으로 지어 불렀다. 바로 이러한 우국충정의 일념에 불탔기에 그 숱한 사람이 원나라를 오가면서도 무심했던 목화를 그만이 눈여겨 보고 헐벗은 백성들의 옷감을 마련코자 씨를 구해가지고 와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면화 재배에 전념해 결국 청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생활·문화·산업 혁명적 변화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의 전래와 재배 및 목면의 생산은 우리나라 직물사뿐만 아니라, 산업구도나 생활문화에도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의 개조와 향상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씨아나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도구 제작의 단초를 열었으며,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되었다. 내구성이 강한 무명실로 만든 바느실이나 노끈, 낚싯줄, 그물은 일상용품을 일신시켰다. 그런가 하면 무명은 물물교환에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주요 수출품의 하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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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산청군 단성면사월리에 있는,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 곳을 기념하는 사적비. 




이와같이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 전래와 그 생산물인 목면은 물속에서부터 하늘까지 우리겨레의 생활영역을 전례없이 넓히고 풍부화시켰으며, 사화발전 전반에서 가위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그의 목면 전래를 통해 이 나라의 의관문물을 일신시켰다고 하고, 남명 조식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씨와 같다’라는 시를 지어 칭송했으며, 우암 송시열도 “이전의 사람도 문공(문익점) 같은 이 없었고, 이후의 사람도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이후의 이후에도 역시 문공 같은 이는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공적이 지대한만큼 국가의 포상도 성대했다. 고려조 우왕 때에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고, 조선 정종 때는 그가 세상을 뜨자 묘사를 짓게 했으며, 태종 때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을 하사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면서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으며 부조묘도 세우게 했다. 세종대왕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해서 ‘부민후(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했다. 실로 문익점이야말로 문명교류사에서 보기드물게 목화씨의 수용과 무명의 전파란 장거로 국민을 복되게한 부민교류의 큰별이다.


일본은 전파 100년만에 재배

목면 전파에서 특기할 것은 조선의 목면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15세기 초 조선 태종 때부터 ‘청목면’이란 이름의 목면이 일본사신에 대한 하사품 중에 포함되기 시작하다가 20년도 채 못되어서는 하사품 중에서 주종을 이루었다. 같은 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앞을 다투어 매해 수천 필씩 조선의 면포를 무역해갔다. 17세기 초 에도시대에 출간된 일본 최고의 농서인 <청량기(淸良記)> 등 사적에 의하면, 일본은 ‘오닌의 난’(1470~1480년)을 비롯한 전란이 발발하여 군복 같은 옷감 수요가 급증하자 해금정책을 취하고 있는 중국 명나라와의 거래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으로부터 면포를 수입하면서 목화씨를 들여가게 됐으며, 우리보다 약 100년 후에 단작작물로 목화재배를 시작했다. 요컨대 교류사에서 보면, 일본의 면직업은 문익점에 의한 간접전파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일본의 면직업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했다. 조선조의 면업장려정책으로 인해 17세기 중엽까지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지고, 명나라 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하고 그 질이 높았으나, 그 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만 머뭇거리다가, 급기야 망국과 더불어 조락하고야 말았다.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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