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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조선은 닫힌 나라였는가

관리자 0 1584

(41) 조선은 닫힌 나라였는가


△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전충진, 『도자기와의 만남』, 리수, 2001,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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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향해 열려있던 조선 500년

흔히들 조선시대를 멍들게 한 병폐의 하나로 ‘쇄국’을 꼽는다. ‘쇄국’으로 인해 나라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망국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가 재대로 된 역사인식에 바탕한 정론일까. 이를테면, 조선은 빗장을 걸어잠근, 닫힌 나라였는가. 겨레의 비상을 앞둔 이 시점에서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사실 조선왕조의 쇄국논리를 실사구시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내적으로는 주로 19세기 후반 대원군이 주창한 쇄국정책에, 외적으로는 그 무렵 서양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이른바 ‘은둔의 나라’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이 일제의 식민사관과 우리의 자학적 역사관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굳어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편견이며, 무지에서 비롯된 사견(邪見)이기도 하다.


‘은둔의 나라’ 무지한 식민사관

한 왕조치고 유례가 드물게 519년이란 긴 수명을 누린 조선왕조 전체를 조감하면, 비록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조선왕조의 내재적이며 자율적인 힘에 의해 바야흐로 정치·경제·문화·사회의 각 방면에서 근대화의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다 후기에 이르러 신흥 서구세력과 근대화 후발국 일본의 도전에 직면해 이러한 길이 가로막히게 되자, 대원군은 대응책으로 쇄국정책을 택한다. 18세기부터 이른바 ‘이양선’(異樣船)이라고 하는 서양 함선들이 탐험이니 측량이니 하는 구실을 붙여 한반도 연해에 무시로 출몰하면서 개항과 통상을 강요하고, 19세기 전반에는 아편전쟁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베이징을 강점하며, 북방에서는 러시아가 연해주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외압이 도를 더해갔다.


한편, 이러한 서세의 동점과 때를 맞추어 스며드는 서양의 천주교는 전통 유교사상이나 종교신앙에 반한 일종의 폐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한 우선대응으로 천주교 박해책을 강구했는데, 그 결과 이를 구실로 프랑스함대가 강화에 침입한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났다. 뒤이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몰래 거슬러 올라가다가 저지 당하자 미국이 아시아 함대 소속의 군함을 강화도에 급파해 조선관군과 충돌한 신미양요(1871년)가 일어났다. 여기에다 무지막지한 독일상인 옵페르트가 대원군 부친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는 만행까지 겹치다보니, 대원군으로서는 서양을 불신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격퇴한 대원군은 서양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이 무렵 일본은 서양문물을 수용해 명치유신을 단행한 뒤 주제넘게 조선에 통상수교를 요청한다. 대원군은 서양을 배척하는 ‘척양’(斥洋)과 똑같은 명분으로 ‘척왜’(斥倭)를 표방한다. 그러면서 그는 양이(洋夷:서양오랑캐)와의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교서’를 반포하고 서울 종로와 전국의 곳곳에 “양이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실로 전의에 불타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 의지를 더욱 가다듬는다.


이러한 대외적 쇄국정책과 더불어 왕권을 강화하고 혼탁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대원군이 단행한 일련의 국내 개혁정책은 일정한 실효를 거두었지만, 유림세력을 비롯한 정적들의 반발과 대내외 개화세력들의 압력으로 그는 하야하고 만다. 섭정으로 시작된 그의 쇄국정책은 10년(1863~1873년)이란 단명으로 끝난다. 그 이후로는 양이와 왜이의 내침이 빈번해지고,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광무개혁(대한제국) 같은 일련의 개화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쇄국정책은 더 이상 지탱되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이렇게 보면 ‘쇄국’은 한순간의 요동일 뿐, 조선의 전시대를 갈무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이 ‘요동기’를 포함해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간단없이 전개된 대외활동이나 교류상을 감안하면, ‘쇄국’이란 일시적 몸부림에 불과했음이 자명해진다. 건국 초기부터 이웃인 명나라와는 전통적인 사대교린정책을 계승해 내왕이 빈번했다. 초기에는 해마다 사신을 7회나 파견하다가 점차 회수가 감소되기는 했지만, 병자호란 때(1636년)까지 242년간 총 186회나 견사하고, 명나라도 정상적으로 사신을 보내왔다. 정치외교관계뿐만 아니라, 사신을 통한 공무역이나 사무역, 밀무역 등 경제문화교류도 활발했다. 여진과는 북방 국경지대에 교역장을 개설하고 서울에는 북평관을 세워 사신들을 맞고 교역을 진행했다. 심지어 여진인들을 받아들여 왕궁을 지키는 시위로까지 기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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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쇄국정책’ 기껏 10년

일본에 대해서도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세종 연간에는 해마다 일본에서 200여 척의 배가 들어오고 5500여 명의 내왕자가 있었다. 그러다가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부산과 제포, 염포의 3포를 중종 때까지 개항하고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류큐의 중산왕은 국서를 보내 신하로 자칭하기까지 한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일본측의 요청에 의해 통신사를 파견(1604~1811년 사이에 13회)하고 일본인들의 내왕무역을 허용하는 을유조약(1609년)을 체결하기도 한다. 그밖에 일찍이 없었던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내왕이나 교류도 트였는데, 그곳으로부터는 각종 약재와 향료, 염료 등을 수입했다. 특기할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에 소속된 오늘의 타이나 인도 사람들이 성주 지방에서 조선군과 어깨 겯고 왜군과 싸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교섭과 더불어 조선은 건국 이래 ‘쇄국기’를 포함한 전 기간에 걸쳐 시종 외국과 폭넓은 교류를 펼쳐왔다. 세종을 비롯한 몇몇 성군들의 선정과 중국을 내왕하던 사신들의 노력, 그리고 여러 선각자들의 혜안에 의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면서 서역과 서양의 선진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른다(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논하겠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은 결코 닫힌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열림이 순탄치 않아 때로는 넓고 때로는 좁았으며, 그런가 하면 일순(10년)의 닫힘도 있었다. 그러나 문명은 모방성이라는 근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교류에 ‘쇄국’ 같은 인위적 차단은 있을 수 없다.


중·일·동남아 등과 폭넓은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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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간 쇄국정책을 주도한 대원군(흥선군 이하응, 1820∼1998년)  


이럴진대, 근대화 전야인 에도시대 264년(1603~1867년) 가운데 무려 241년간(1612~1853년)이나 지속된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에 견주어 마치 그것이 조선 ‘쇄국’의 전철인 양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도쿠가와 막부가 추구한 쇄국정책의 핵심은 기독교의 금지와 막부의 무역독점이다. 도쿠가와는 처음에 무역을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기독교를 묵인했으나, 그 신자가 70만명에 달하자 위협을 느껴 1612년에 에도, 교토, 나가사키 등 직할도시에서의 전교금지령을 내리고 교회를 파괴했다. 이어 법령을 제정해 선교사나 신자들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학살했다. 동시에 독점조합을 만들고 도항허가증을 발급하며 무역항을 축소하는 등 내외인들의 무역활동을 통제·제한하는 조처를 취하고, 심지어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고 스페인과는 단교까지 한다. 막부는 쇄국대상에 포함시킨 조선 통신사들의 도일을 마치 일본에 대한 조선의 ‘조공’ 행사인 양 비하하는 오만도 서슴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은 미국의 페리가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쳐들어와 이듬해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장장 2세기 반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241년간 쇄국

이러다 보니 일본은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서 조선보다 한발 늦곤 했다. 조선에서는 1402년 가장 뛰어난 세계지도의 하나로 손꼽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했는데, 일본은 그보다 무려 390년 뒤(1792년)에야 재중 선교사인 마테오리치가 그린 지도를 본따 처음으로 ‘곤여전도’라는 세계지도를 만들어냈으며, 조선은 세종 때 벌써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회회(이슬람)의 역법들을 참고해 조선식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한 데 비해 일본은 1684년에야 회회역법에 준한 ‘정형력(貞亨曆)’을 만들어 근 200년 동안 사용했다. 세계지리서의 경우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1614년)은 일본 니시가와 죠겐의 ‘화이통상고(華夷通商考)’(1695년)보다 80여 년이나 앞선다.


이미 15세기때 세계지도·역법

우리 스스로가 조선을 ‘쇄국’이라고 오해하는 것이 일종의 자학적 역사인식이라면, 서구가 우리더러 ‘은자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작위적 오도일 것이다. 어느 것이든 사람들의 뇌리에 조선을 ‘쇄국’으로 오인시켰다는 지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을 가리켜 ‘은자의 나라’라고 이름 아닌 이름으로 붙인 사람은 미국의 동양학자이자 목사인 그리피스다. 그는 일본문화에 매료되어 연구를 시작했는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는 일본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고 1871년 조선에 왔다. 이것저것 신기한 것을 보고 돌아가서 <은자의 나라 조선>(1882년)이란 책을 써냈다. 이 책은 전 3부 5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고대·중세사를, 제2부는 문화사 일반을, 제3부는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필연으로 보면서, 조선을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은 호젓하고 닫힌 ‘은자의 나라’라고 못박았다. 책 속에 이색적인 서양 식기들로 가득한 식탁을 조선의 ’잔칫상’이라고 그린 삽화만큼이나 그의 조선관은 우스꽝스럽다.


일제식민사학은 당쟁을 한국인의 고질적 ‘민족성’이라고 냉소하면서, 조선시대의 큰 병폐로서 나라를 망하게 하여 결국 한일합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 해악을 갈파하고 있는 오늘날, 같은 맥락에서 또다른 병폐라고 꼬집는 이른바 ‘쇄국’에 대해 재고를 요청한들, 정녕 조선은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고 항변한들, 과연 그것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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