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조선의 ‘서학’ (西學)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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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선의 ‘서학’ (西學) 수용

관리자 0 4405
(43) 조선의 ‘서학’ (西學) 수용

△ 조선 서학의 조사 이익(1681∼1763)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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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문명 적극수용, 근대와 만나다

한·중·일 동양 3국의 근대화는 이른바 ‘서학’의 수용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서학이란 서구 근대 문명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학문적 활동을 일컬은 말이다. 그 내용은 크게 ‘이적(理的) 측면인 사상과 종교, ’기적(器的) 측면인 과학과 기술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명칭에서 한국과 중국은 서학으로, 일본은 ‘난학(蘭學)’으로 좀 다르게 부르고 있다. 조선 서학의 경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한화(漢化)된 구라파(유럽)문명이란 뜻에서 ‘청구(淸毆)문명’이라고도 한다. 큰 흐름에서 보면 서학은 동서간 교류로서 그 전파와 수용은 이질문명간의 성공적인 융합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서세동점’ 문화 충격

동양 3국은 근대화와 서구 대응을 위한 방편으로서 서학을 수용한 점에서는 역사의 궤를 같이 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수용태도, 서학이 3국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사뭇 다르다. 이런 현상은 한·일 양국의 서학 수용과정에서 극명하다. 흔히들 조선의 서학 수용을 일러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전통적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서구의 근대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라고 하며, 일본의 난학 수용은 일본 정신 위에 서구의 유용한 것을 가져와 사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로 표현한다. 중국의 경우는 중국 학문을 바탕으로 서구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을 쓴다. 용어는 달라도 뜻은 그것이 그것이다. ‘동도’나 ‘화혼’, ‘중체’는 ‘이적’ 측면을, ‘서기’나 ‘양재’, ‘서용’은 ‘기적’ 측면을 염두에 둔 낱말들이다. 여기에서 공통된 난제는 서학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가 하는, 이를테면 전통과 근대의 조화문제다.


한·중·일 서학 수용태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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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성 축조 때(1796) 정약용이 만든 기중기.  


17세기를 전후해 밀려온 서세동점의 거센 파도는 조선이나 일본에 다 같이 크나큰 문명적 충격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응은 수용과 배격이라는 상반된 모습으로 전개되는데, 그 구체상은 서학 수용에서 나타난다. 17세기 초부터 조선에서 간간이 선보이기 시작한 서학은 중국의 명·청대에 도입되는 한역서학서와 서양문물에 대한 학문적 연구, 실천으로 점차 자리매김하여 갔다. 북경에 파견된 조선 사신들은 재중 서양 선교사들과 호기적(好奇的)인 접촉을 통해 처음으로 서양세계와 접하게 된다. 신이한 서양의 과학기술에 매료된 그들은 관련 한역 자료들을 스스로 구해 귀국한다. 1603년 이광정이 재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한역 세계지도를 갖고 들어온 것이 단초이며, 심지어 청나라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도 귀국 때(1644년) 친분을 지녔던 아담 샬 신부로부터 서학서 여러 점과 천주상을 선물로 받아 돌아온다. 서양 선교사들이 사는 북경 사천주당이나 그들의 기술제공기관인 흠천감, 산학관(算學館)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약 150년 간에 걸친 북경 사행을 통해 서서히 전래된 서구문명의 산물 가운데는 화포나 천리경, 자명종, 천문관측의기, 역산법 등 근대적인 과학기술 문물과 정보, 한역된 각종 세계지도와 지리서 같은 서학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과학문명의 도입은 기술을 일종의 ‘잡기(雜技)’로 깔보며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젖어있던 조선 유교사회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급기야 근대 서구와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만남이 마침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선도한 조선의 서학을 낳게한 것이다. 요컨대, 조선 서학은 일본과 같이 외래의 서구인들이나 국가권력의 개입 등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 자신의 자율적 노력에 의해 받아들였다.


18세기 조선선비 필독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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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서학의 거장 정약용(1762∼1836)의 동상. 




이에 비해 일본 난학은 조선 서학과는 다른 길로 입지를 마련해 갔다. 1543년 포르투갈 상선의 우연한 표착이 계기가 되어 서양문물이 처음으로 알려지면서 구교국들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관한 서양학을 ‘남만학(南蠻學)’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약 80년이 지나서 실행된 도쿠가와 정권의 쇄국정책에 의해 두 나라와 일체 교섭이 금단되고, 대신 1641년 신교국인 화란(和蘭: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 상관을 개설하는 것이 허용되면서 이제 ‘남만학’은 ‘화란의 학문’이라는 ‘난학’으로 탈바꿈한다. 난학은 발생지 나가사키에서 수도 에도(현 도쿄)로 확산되면서 1774년 처음으로 인체해부학서인 <해체신서(解體新書)>가 일어로 번역되었는데, 학계에서는 이 번역을 ‘본격적인 난학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난학은 조선의 서학과는 달리, 애초부터 국가의 간여와 통제 속에 외래 서양인들에 의해 전해진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남만학 발단은 조선의 서학 도입에 비해 약 60년 앞섰지만, 학문으로서 난학은 조선에서 서학이 정착할 무렵(18세기 중엽)에야 비로소 탄생한 셈이다. 그 원인은 서학에 대한 두 나라의 대응책이 달랐기 때문이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조선에서 서학서는 선비들이 유불제가 경서처럼 서재에 꽂아놓고 읽는 필독서로 되고, 다산의 회고처럼 청년학도들이 서양서를 탐독하는 것이 하나의 ‘기풍’(氣風, 유행)일 정도로 서학은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그만큼 서학 연구가 심도를 더해가면서, 서학에 대한 대응책도 전면 배격과 전면 수용, 그리고 ‘기적’ 측면만 수용하고 ‘이적’ 측면은 배격하는 이원적 대응 등 세 가지로 갈라졌다. 이러한 분파에 앞서 서학의 조사라고 하는 성호 이익(1681~1763년)은 서학의 과학기술 영역에 관해서는 다각적인 검토를 가해 그 선진성을 이해하고, 중화주의적 지리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서학의 윤리종교 영역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유교의 상제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옥설 같은 일련의 부조리를 잉태하고 있다고 하면서 배척했다.


서학의 개조격인 이익의 사상을 기조로 해서 학계에서는 대응을 놓고 논의가 분분했는데, 순암 안정복(1712~1791년)을 비롯한 배격파는 서학의 수용을 전면 거부하면서, 서학을 연구하되, 그것은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바른 학문인 유학을 보위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을 비롯한 남인계 학자들은 서학의 ‘이적’ 측면이건 ‘기적’ 측면이건 간에 다 수용할 것을 설파한다. 다산은 서교(西敎), 즉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정조의 명을 받고 스스로 멀리하겠다는 ‘자벽서’까지 지었지만, 바깥은 유교이고 속은 예수교라는 ‘외유내야(外儒內耶)’의 평을 받을 정도로 서교와의 인연은 끊지못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유복하게 만드는 이용후생을 위해 서학에서 실용적인 기예(技藝)인 과학기술을 탐구 터득하는 것이었다. 수원성 축조공사 때 거중기를 발명해 돈 4만 냥을 절약한 것은 그 본보기다.


서구 과학기술 도입 한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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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학자 최한기가 만든 지구의. (19세기 후반, 보물 883호,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이상의 두 파와는 달리 북학파는 서학의 수용에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과학자라고 하는 담헌 홍대용(1731~1783년)은 서학 속의 천주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일축하나,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에 대해서만은 탐복하면서 수용을 권장한다. 연암 박지원(1737~1805년)은 “진실로 국민을 위해 유익한 것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취해야 한다”고 실용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조선의 서학자들은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서학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논쟁을 통해 그 이해를 심화시켜 나간다.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서구 과학기술의 선진성을 인식하고, 그 도입과 활용을 주장한다. 심지어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배치되는 서구 종교에 대해서도 진지한 탐구를 거쳐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신앙적 수용에까지 이름으로써 드디어 조선에서 천주교가 정착된다. 세상에서 서양 종교가 자율적으로 수용된 것은 조선조뿐이다.


일본의 난학은 네덜란드어의 습득과 네덜란드 책의 독파로부터 막을 연 나가사키난학 시대를 거쳐 18세기 말엽에 에도난학 시대를 맞으면서 난학의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된다. 소총을 비롯한 화기를 도입하면서 병학이 생겨나고, 총상의 치료를 위해 ‘홍모(紅毛: 화란)의학’이 도입되며, 각종 천문학 서적이 출간된다. 조선의 서학과는 달리 일본의 난학은 장장 2세기 반동안의 가혹한 쇄국정책에 묶여 그 속의 서양 종교는 구교건 신교건 간에 모두가 시종 엄금되어 일본에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과학기술의 수용만이 허용되었다. 물론 일본의 국가적 과학기술 일변도 정책이 명치유신으로 대변되는 근대화의 성공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엘리트 중심 수용 한계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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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과학자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양양자득(揚揚自得)하던 조선의 서학은 종당에 근대화란 과녁을 천착하지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기술을 잡기로, 통상을 모리행위로 경시하는 봉건지배층은 보수적 유교사상에 물젖어 다름을 기피하는 벽이정신(闢異精神)에 기울다보니 서학 수용을 국가적 시책으로 추진하지 못했을 뿐더러, 대원군이 결행한 10년 쇄국정책은 비록 일시적 조처였지만 바야흐로 무르익어가던 서학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고 말았다. 서학의 수용과 그 실천은 250여 년이란 긴 세월을 걸쳐 흥행했지만, 그 흥행은 어디까지나 일부 실학적 엘리트들에게만 한정되었을 뿐, 근대적 국민교육의 결여로 광범위한 국민들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 결과 급진 서학파들을 핵심으로 한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 같은 근대화운동은 3일천하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과 강점은 서학을 밑둥째로 문질러버렸다. 그러나 조선 서학의 불씨가 영영 꺼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 서학의 성쇠는 너무나 소중한 역사적 교훈을 귀감으로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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