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넉넉하고 질박한 조선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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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넉넉하고 질박한 조선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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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넉넉하고 질박한 조선 자기


△ 넉넉하고 고고한 백자 달항아리 (높이 42.5cm, 18세기 전반,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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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문화 세계화 ‘숨은’ 주역

일본의 고도 교토에 있는 다이도쿠샤의 고호안이란 암자에는 일본의 일급 국보인 ‘기자에몬 이도’라는 다구 한 점이 다섯 겹의 상자 속에 꼼꼼히 비장되어 있다. 그것을 한번 친견하는 데는 우리돈으로 300만원(2000년 현재)이 든다고 한다. 알고보면, 놀랍게도 이 일본의 ‘대명물’은 우리나라 경상도 해안지대에서 서민들이 만들어 새 것일 때는 밥그릇으로 쓰다가 허름해지면 막걸리 잔으로나 굴리다가 아무데나 내버린 막사발이다. 막사발이란 말 그대로 흙을 뭉텅 떼어서 대충 빚어 유약통에 텀벙 담갔다가 그냥 꺼내 말린 사발이다. 손으로 마구 빚다보니 문양도 별로 없고 색조도 누르스름하며 기형도 엉성하다.


일본 건너간 ‘막사발’ 국보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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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백자의 최고 명품 중의 하나인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 (높이 53.8cm, 18세기 전반,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일본의 세계적 동양미술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1931년 어렵사리 이 막사발 보물을 친견하고서 크게 감탄한다. ‘몇 푼 안되던 물건이 만금으로 바뀐’ 이 막사발이야말로 ‘미에 대한 철학과 생활의 축소판’으로서 그 아름다움은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무심한 것, 사치스럽지 않은 것, 과장이 없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의 다완이 조선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작위적으로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바로 여기에 이 보물만이 갖는 ‘우리라든가, 나의 것 등을 초월한 세계’의 보편성이 있으며, 그래서 그것이 ‘천하의 대명물’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미의식이 일본 특유의 차문화와 어울리면서 성 하나와 맞바꾸는 조선 막사발을 일본 최고의 진품으로 격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 자기 전반에 대한 일본의 선망을 유발했다. 사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사람들이 일본땅과 가까운 경상도 해안지대에서 가져간 막사발은 대략 200개쯤 되며, 그중 일급보물은 3점, 중요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20여 점이나 된다.


도공 창의성 물씬한 ‘분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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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일급 국보로 지정된 막사발 ‘기자에몬 이도 다완’ (입지름 15.5cm, 16세기, 일본 교토 다이도쿠샤 고호안 소장) 



어찌보면 이 막사발은 우리네 도자문화의 세계사적 위상을 시사하기도 한다. 독창적인 고려청자(이에 대해서는 34회 글에서 밝혔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분청사기와 백자라는 또다른 빼어난 자기로 세계도자사에 우뚝 섰다. 고려 말 몽골의 내침에다 왜구들의 부단한 침략으로 해변가에서 50리 밖으로 사람들을 내쫓다보니, 강진이나 부안 같은 곳에 있던 주요 청자가마들은 문을 닫고 도공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일세를 풍미하던 고려청자는 세태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청자는 분청사기라는 새 자기에 의해 그 맥이 다시 되살아난다.


각지에 흩어졌던 도공들이 다시 모여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작여건이 고려청자 때처럼 국가가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어서 소재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빛깔이 푸른빛이 아니라 회색이나 누런색이다 보니 청자맛이 통 나지 않는다. 이런 칙칙한 빛깔을 감싸기 위해 상감할 때 쓰던 백토로 하얗게 분장을 한다. 흡사 늙은이가 젊어보이려고 얼굴에 분을 두껍게 칠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인데, 줄여서 분청사기라고 한다. 이렇게 분청사기는 고려시대의 상감청자가 퇴화하면서 생긴 자기로서 중국을 포함해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 자기다.


분청사기는 관요가 아니라 민간요에서 구워내는 자기로서 그 형태나 기법이 다양해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세계공예사상 매우 드문 일이다. 공예는 대체로 유한층의 수요나 취미의 산물로서 발달하나 분청사기만은 각 지방의 도공들이 제나름대로 개발한 방식에 따라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테면 조형의 자유를 만끽한 현대적 좌표로서의 서민공예인 셈이다. 20세기 도자공예의 거장이라고 하는 영국의 버나드 리치는 미국의 유명한 알프레드 도자학교에서 연설하면서 현대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시대의 분청사기가 이미 다 제시했는 바,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저서 <동서를 넘어서>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펴고 있다.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그는 1936년 덕수궁에서 개인전을 열기까지 했다.


어진 선맛·따뜻한 정감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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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의 명품이라고 하는 백자청화 망우대명 잔받침 (입지름 16cm, 16세기, 개인 소장) 



조선시대의 또다른 자랑은 백자다. 조선 초기 나라 안에는 무려 324개의 도자기 제작소가 있었다. 그중 국가에 납품할 수 있는 양질의 자기소는 4곳 뿐이었다. 그리하여 경복궁 내 부엌일을 맡아보는 사옹원(司饔院)이 서울에 가까운 광주에 분원을 차려놓고 질좋은 백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5세기 후반부터는 청화백자 위주의 중국 백자와는 사뭇 다른 조선 특유의 백자를 만들게 된다. 백자는 순백색의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 구워내는 자기로서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룬다. 백자는 무늬나 물감의 종류에 따라 순백자와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백색유약을 씌우는 청화백자, 산화철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백색유약을 씌우는 철회(鐵繪)백자, 산화동 채색안료인 진사로 그림을 그린 후 백색유약을 입히는 진사백자 등 몇 가지로 나뉜다.


조선백자는 시기별로 특색을 보이면서 우아한 자기변신을 거듭해왔다. 비록 얼마간 중국 청화백자 기법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빛깔이나 조형에서 중국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조선식 세련미를 보이면서 발달했다. 천하의 명품이라고 하는 ‘백자청화 망우대(忘憂臺)명 잔받침’(16세기)은 청초한 들국화와 벌 한 마리가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고, 잔이 놓인 한가운데에는 ‘망우대’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이 받침대에 올려놓은 술잔을 드는 순간 ‘근심을 잊어버리는 받침대’라는 글귀를 읽게 되니, 얼마나 풍류가 흐르는 멋진 구도인가. 조선백자의 기발함을 말해주는 예로 ‘백자 달항아리’(높이 42.5cm, 18세기 전반)를 들 수 있다. 원래 수동식 물레로는 큰 항아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중국이나 일본, 유럽의 도자기 중에는 조선의 달항아리만큼이나 큰 항아리가 없다. 조선의 도공들은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서로 잇대어 둥그스름한 큰 그릇을 만들어냈다. 그릇 가운데에 이은 자국선이 있는데, 그 선은 컴퍼스로 돌린 딱딱한 기하학적 원이 아니라 자연스러우면서도 넉넉한 둥근 자국이다. 때로는 기우뚱한 것도 있지만, 도공들은 그것마저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너그러움의 형태미와 어진 선맛, 따뜻한 흰색에서 오는 정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항아리를 보면 부잣집 맛며느리를 보는 것처럼 넉넉함을 느낀다고 했다.


‘쇄국정책’ 탓 교류는 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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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청사기 선각 물고기무늬 편병 (높이 25.6cm, 15세기, 호암미술관 소장) 

이러한 넉넉함과 질박함은 우리 도자문화의 전통이다. 미술사학자 김원룡은 중국도자기가 장대하고 완벽하게 잘 차린 경극배우 같다면, 일본도자기는 화려하게 꾸민 기생 같고, 한국도자기는 수수하게 차린 가정부라고 했다. 그럴듯한 해학적 비교다. 바꾸어말하면, 중국도자기는 다양하고 완벽한 모습을, 일본도자기는 화려한 색깔로 꾸민 모습을, 한국도자기는 무던하고 소박한 모습을 그 각각의 특색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9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도자문화를 주도해나갔다. 그러다가 우리의 도자문화를 본딴 일본이 이 세계적 도자의 흐름에 합류하고 18세기에는 유럽이 다시 끼어들면서 도자의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주역은 여전히 동양이며, 그 한복판에 조선이 서있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도자사에서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본보다는 앞서간 우리의 도자문화가 교류를 바탕으로 한 세계화에서 성가에 걸맞지 않은 부진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이는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한 부진의 주원인은 상업(교역)을 경시하는 유교양반문화와 쇄국정책의 폐단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도자문화에 대한 전통 도자문화의 기여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웃 일본을 통한 간접적 기여는 확연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1592년) 전까지만 해도 고작 도기나 제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 주산지는 세토를 비롯한 본토 혼슈섬이었다. 그러다가 ‘도자기 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도공들이 끌려간 뒤 일본의 도자기중심은 한반도에 가까운 구슈 지역으로 옯겨졌으며, 그 수준은 도기에서 자기로 일약 뛰어올라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조선인 손끝 일본백자 ‘제작붐’

일본에 끌려간 아리타 지역의 이삼평가와 사쓰마 지역의 심수관가 등 6대 조선 도공가문에 의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때 유럽 도자기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한 아리타야키와 사쓰마야키 같은 일본백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조선 도공들에 의해 일본백자 제작붐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도자기 종주국 중국은 명·청 교체기의 전란에 휩싸여 도자기 수출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일본에 귀띔해준 사람들이 바로 일본을 드나들던 네덜란드 상인들이다. 호기에 눈이 번뜩 뜨인 일본인들은 도자기 생산을 가속화해 유럽시장에 전격 진출했고, 19세기 드디어 유럽에서 자포니즘(일본풍)의 돌풍을 일으켰다.


우리는 이렇게 우수한 도자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때 뒤처졌던 사람들마저도 해온 일들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우리만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다가 우리 도자문화를 보편화, 세계화시키지 못한 탓이다. 단언컨대, 자포니즘 도자기의 어디엔가는 조선백자의 흔적이 묻어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 연구가 미흡하다보니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감히 세계에 대고 우리의 도자문화가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세계사적 지평에 올려놓고 우리가 가졌던 것과 갖지못했던 것을 반듯하게 가려내면서 이어가야 할 것은 또한 무엇인가를 깊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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