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 -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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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 -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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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류 길따라 인류상생 길찾길”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
연재를 시작하며

문명교류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정수일(70) 전 단국대 교수가 〈한겨레〉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 다음주부터 매주 화요일에 선보일 새 기획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이 그 마당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간 복역한 뒤 2000년 8·15 특사로 풀려난 정 교수가 신문 연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식의 사회 환원은 지식인의 마땅한 본분”이라고 말한 정 교수는 “인간의 앎과 삶을 소통해 주는 문명 교류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과 갈증을 해소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고 연재의 포부를 밝혔다.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은 이질문명 간의 교류 현장과 사례를 통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타자관(他者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문물교류, 인물의 왕래, 여행기, 탐험기 등 문명 교류의 다양한 형태와 방식이 다루어질 것이다. 교류를 통한 인류 문명의 발달이라는 큰 틀을 보여줌과 아울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진취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참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은둔의 나라’라는 가당찮은 누명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러려니 하고 안주해 왔죠. 이제 이 연재를 통해 그런 누명을 벗어던지고, 문명 교류에서 우리 겨레가 간직한 저력을 새삼스러이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연재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게 된다. 1부에서 주로 우리와 유관한 문명 교류사의 국면들을 다루고, 제2부에서는 시야를 넓혀 실크로드 등 교류 현장 답사를 통해 좀 더 현장감 넘치는 문명 교류 기행이 이어질 예정이다.

“실크로드 연구를 비롯한 문명 교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연구입니다. 현장과 유물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보충되는 현실에서 현장 탐구나 고증이 없는 연구는 탁상공론에 불과하게 되죠. 불행히도 저는 1996년 5월 ‘장보고 대사 해양경영사연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일본의 관련 현장을 탐방한 이후 아직까지 현장 취재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번 〈한겨레〉 연재를 계기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픈 게 학자로서 제 간절한 바람입니다.”


199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명 ‘깐수 사건’은 분단시대 지식인의 운명과 관련해 착잡하지만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1934년 중국 연변 출신으로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중국 외교부의 촉망받는 인재로 일하던 그는 조국의 북쪽으로 돌아가서 학자로서 활동하다가는 급기야 ‘공작원’의 신분으로 남파된다.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남쪽에 정착한 그는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 결과는 1992년에 낸 방대한 연구서 〈신라·서역 교류사〉로 한 결실을 보았다.


96년 구속 이후 5년에 걸친 옥살이에서도 그의 학자적 정열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는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말고는 온종일을 독방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보냈다. 교도소에서 파는 관제 편지지를 원고지 삼은 그의 글쓰기는 ‘메모 작업’으로 통용되었지만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분량과 내용에 이르는 것이었다. 감옥 안에서 그는 세계 4대 여행기 중의 하나인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문명 교류사의 첫 고전인 〈중국으로 가는 길〉을 완역했고, 〈씰크로드학〉의 집필을 마쳤으며 〈문명교류사사전〉을 70% 가량 진행했다. 200자 원고지로 쳐서 대략 2만5천장 분량. 2000년 출옥 이후 3년 반 만에 그는 〈고대문명교류사〉 〈이슬람 문명〉 〈문명교류사 연구〉 등 5권의 저서와 3권의 역주서, 총 8권의 책을 펴냈다. 모두가 묵직묵직한 책들이거니와, 특히 한 사람이 3가지 외국어로 된 책, 그것도 고전들을 역주한다는 것은 번역사에 드문 일이다. 지난 4월에 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역주서는 그 가장 최근 주자에 해당한다.

 

남북 가족얘기 묻자 애써 눈길 먼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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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한겨레〉 새 기획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을 연재하기에 앞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정수일 교수의 인터뷰는 그가 출옥 이후 언론과 행한 사실상의 첫 번째 인터뷰였다. 지난달 역주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내놓고 합동 기자간담회에 임한 것이 언론과의 유일한 접촉이었다.

그는 매사에 신중한 편이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정 교수는 사전에 질문서를 보내 주기를 원했고, 대부분의 답변을 메모 형식으로 작성해서 건네 주었다. 비록 지난해에 복권되고 국적도 얻었지만, 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인 삶의 행로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때그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겨레가 요구하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일구어 왔다는 점, 그리고 분단의 현실에서 겨레와 아픔을 함께했다는 점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워낙 격변하는 시대에 기구한 인생을 살다 보니 기성세대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술회했다.

가족사에 관해 물었을 때, 정 교수는 “가장으로서 제 구실을 다하지 못했지요”라고 한마디 하고는 침묵했다. 그러나 애써 눈길을 먼 데로 돌리는 그의 얼굴에서 침묵 속의 외침을 읽기란 어렵지 않았다.


남북분단 회환
동서교류사 정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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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일종의 ‘10計年 집필 계획’을 세웠어요. 문명교류사 일반과 우리나라의 대외교류사를 번갈아 가면서 연구하고 책으로 써내려고 했습니다. 투옥되는 바람에 계획에 약간 변동이 생기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대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중세문명교류사〉 집필을 하고 있고, 이게 끝나면 〈고려·서역 교류사〉, 그 다음에는 〈근현대문명교류사〉, 그리고 근현대 우리나라 대외교류사까지를 쓰려고 합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본래 계획에는 없던 건데, 출판사와 함께 ‘문명기행 시리즈’를 기획하다가 기왕이면 우리의 것을 첫권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역주하게 되었습니다.”

감옥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집필에 쏟는 그의 초인적 공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새벽 4~5시까지(“남들 다 자는 새벽 시간이 글쓰기에는 좋다”고 그는 말했다) 하루 14, 5시간씩을 자료 조사와 집필에 할애한다. 오전에 일어나 뒷산에서 조깅과 체조(중국 기공 등을 응용해서 그가 나름대로 만든)를 하고, 하루 세 끼 밥 먹고 저녁 텔레비전 뉴스(와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말고는 그야말로 집필에 ‘올인’하는 셈이다. 이번 학기에는 한양대 대학원에 1주일에 세 시간 출강하고, 한달에 서너 번 외부 강연을 다니는 게 그의 단조로운 일상을 흔드는 변수들이다.


“그동안은 문명교류사와 이슬람 등에 관한 강연이 많았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후에는 혜초와 불교에 관한 강연 요청이 부쩍 늘었어요.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혜초는 우리 겨레의 첫 세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급 진서이고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입니다. 그 원전이 지금 프랑스의 한 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는데, 반환운동을 벌여 국보로 등재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올려야 합니다.”

문명 교류사의 큰 한 축이 이슬람문명이고 그가 〈이슬람 문명〉이라는 저서를 낸 바 있다는 이력을 감안해 이슬람과 중동사태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서구문명 중심주의에서 결과한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평화적 이념을 지닌 이슬람교를 ‘호전’과 ‘폭력’의 종교로 매도하다 보니 ‘한 손에는 꾸르안(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 양 인구에 회자되고 있어요. 또 나름의 역사성과 조건부를 띤 일부다처제를 비롯한 이슬람 사회 고유의 현상들이 부정적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거죠.”

중동사태의 핵심이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중동사태의 발단은 서방세력의 배후 조정 하에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의 심장부에 들어선 데서 비롯된 겁니다. 해법이라면 서로가 한 걸음씩, 가해자인 이스라엘이 더 큰 걸음으로 물러서서 공존을 모색하는 데 있겠죠. 이라크 침공과 포로 학대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어요. 목욕할 때도 벗은 몸을 남한테 안 보일 정도로 치부를 중요시하는 무슬림을 발가벗기고 조롱한 것은 패륜과 범죄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이전에, 합당한 명분도 없이 문명을 악용해 문명을 파괴하고 문명인을 도륙한 전쟁부터가 반문명적·반인륜적 범죄라고 해야겠죠.”

정 교수는 문명교류사에 대한 이해가 상생과 공영이라는 인류사적 화두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했다.

“상생과 공영은 보편 가치이고 인류 공동의 지향점입니다. 그런데 이 지향점을 향해 가는 첩경이 바로 문명 교류죠. 교류를 통해서만 인류는 서로 이해하고 상부상조하며 함께 번영할 수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미래 세계에 대한 이른바 ‘문명대안론’입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

   

“21세기 인류 공존의 대안, 문명교류 확대서 찾아야”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가 최근 서울 옥인동에 문을 열었다.

문명교류와 관련한 국내 최초의 전문연구기관인 이곳은

김정남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사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함께 설립하고 문명교류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정수일씨(74)가 연구소장을 맡았다.

문명교류학은 21세기 들어 새로운 연구 분야로 동 · 서양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국내의 사정은 열악하다. 변변한 개설서 하나 없는 데다 몇몇 대학에 교과목이 개설됐으나 동양사 등 비전공자에 의한 강의가 이뤄지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까지 서른 차례 정도 실크로드를 답사했다는 정수일 소장은 지난 10년간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번 연구소 개설로 더욱 충실하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21세기는 문명교류의 무한확산시대로 문명교류를 통해 공생공영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그를 지난달 28일 인왕산 밑자락에 자리잡은 연구소에서 만났다.



- 한국문명교류연구소는 어떻게 발족하게 됐나요.

“2006년 여름 중앙아시아 답사를 계기로 그해 8월 ‘실크로드학교’를 세워서 1년에 4번씩 실크로드를 답사했습니다. 답사를 가기 전에는 매번 관련 강의를 했고요.

이런 식으로 토대가 구축되면서 문명교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소를 열게 된 겁니다.

연구소를 열면서 3가지 목표를 잡았어요.

첫째는 문명교류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것이고 둘째는 문명 교류에 관한 고전들을 독해 · 번역하는 것입니다.

세번째가 지식의 사회적 환원 차원에서 실크로드학교를 계속 운영하면서 문화교육강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문명교류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 문명교류학이란 무엇인가요.

“문명은 늘 움직이고 오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좋으면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문명교류입니다.

모두들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학문적으로 정립이 안 됐을 뿐입니다.

사실 문명교류를 연구하려면 여러 분야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동 · 서양 교류는 중간지대인 서아시아나 아랍 세계를 거치는데

이 중간지대에 관한 연구가 언어부터 걸리다보니 어렵습니다.

물론 동 · 서양 문화교류사라는 게 일찍부터 있었지만

주로 동양사 전공자들이 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요.”

 


- 왜 지금 문명교류가 관심을 받고 있습니까.

“저는 문명교류가 21세기의 화두라고 말해왔습니다.

대학 때 공부한 국제관계사라는 게 사실 정치관계사, 즉 힘의 논리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인류가 당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어요.

인류사는 한마디로 인류가 봉착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19세기 말 서양에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찾은 것이 이성주의였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 갈등과 모순만 심화되면서 결국 세계대전이 터졌지요.

이 같은 상황에서 토인비 같은 지성인들은 다른 방도를 찾았습니다.

모든 민족, 국가, 계급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공통분모로 찾아낸 게 문명(civilization)이었어요.

사실 1990년대 냉전이 무너지니까 모두들 평화세계가 올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종교 분쟁, 민족 분쟁이 다발하고 있습니다. 이걸 정치나 경제 이론으론 설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나 독일의 문명공존론 등 문명담론이 하나의 대안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아직 구상 중이지만 문명대안론을 내세웁니다.

교류를 통한 보편적인 문명의 창조가 시대의 화두라는 생각이지요.”



- 최근 발생한 인도 뭄바이 테러 등을 보면

문명교류보다 문명충돌이라는 말이 더 맞는 거 아닌가요.

“역사적 뿌리가 깊다 보니 그 같은 문제가 단시간에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같은 시각에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주범인데 이 이론의 가장 큰 오류는

문명을 아주 단순화해서 종교가치로 축소해 8개 문명으로 나눴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종교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문명 충돌과 분쟁은 숙명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종교를 하나의 문명현상으로 공통분모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지

자꾸만 충돌을 강조해선 안 됩니다. 테러는 이슬람의 본연이 아닙니다.

이슬람은 평화적이고 관용적인 종교예요.

테러는 극소수의 정치적 극단파들이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저지르는 정치적 행태지

종교 문명 행태가 아닙니다. 이라크의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도 종교 교리에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누가 정권을 잡느냐는 다툼일 뿐입니다.”



- 문명교류 연구에 왜 그렇게 몰두하시는 겁니까.

“실크로드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게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제일 처음 착안했던 게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설로 박사 논문도 ‘신라-서역교류사’였습니다.

저는 답사를 가도 항상 우리와 관계가 있는지를 살폈어요.

제가 연구를 하는 동력이라면 겨레에 대한 관심 같은 민족주의라고 자부합니다.

저는 당당하게 민족주의는 역사의 보편 가치라고 주장합니다.

요즘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이 잘못돼서 완전히 고루한 사상으로 지탄받는 게 안타깝습니다.

민족주의를 운동이론이나 정책이념으로만 봐서 그렇습니다.

물론 민족주의를 남용·악용하면 파시즘으로 나갑니다. 히틀러도, 박정희도 그랬습니다.

‘배타적 민족주의’라고들 하는데 민족주의는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체화된 생태적인 생각이나 이념, 감정이 민족주의입니다.

민족주의의 속성은 연대의식과 수호의식, 그리고 발전지향성입니다.

내 민족과 나라를 발전시키자는 겁니다. 그러자면 문을 열고 가슴을 펴고 교류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교류를 가장 많이 했을 때 강성했습니다. 고구려나 통일신라를 보세요.

진정한 민족주의는 배타나 폐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시류에 영합하는 게 아니라 태생적인 겁니다.

김치나 된장을 좋아하면 다 민족주의입니까.

‘빠다(버터)’를 먹는 사람도 있지 모두 똑같은 걸 먹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김치를 발전시키고 또 누가 ‘빠다’를 발전시키고

그것들이 교류되어서 더 좋은 게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최근 실크로드나 중앙아시아 등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계화와 관련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특징은 문명교류의 무한확산시대라는 겁니다.

정보화 시대라는 것도 사실 교류를 전제로 합니다. 이제 교류를 떠난 생존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 실크로드’, ‘철의 실크로드’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그곳을 알고 싶다는 욕망도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명분과 실리가 합치된 정책을 써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실리만 챙기고 상대를 무시할 게 아니라 서로가 공존하고 상부상조해야 합니다.”



- 문명교류와 관한 국내 고전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연구소에서 앞으로 1년 동안 세계 인식에 대한 우리 고전을 연구하는 작업을 할 건데 자료가 꽤 많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둔의 나라, 폐쇄적인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게 있습니다. 1402년에 만든 세계 지도인데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만든 지도학의 역사 표지로 나왔어요.

당시로는 가장 우수한 세계지도였기 때문입니다.

그 지도에는 중앙아시아가 나오고 당시 처음으로 아프리카가 나옵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세계에 관한 여러 가지가 기술돼 있고  최한기의 <지구전요>는 세계백과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 시절에 그런 세계지도를 만든 걸 보면 우리 역사가 상당히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통시적·수직적으로만 봤지 공시적 · 수평적으로 못 봤어요.

그러다 보니 세계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부분을 제대로 못 본 겁니다.”



- 실크로드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어디입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요.

“지금까지 실크로드를 30번 가까이 다녀온 것 같습니다. 금년에만 5번 갔다왔고요.

어디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게 저는 항상 우리와 관련된 문화유산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와 교류했거나 우리와 비슷한 곳이지요.

투르크메니스탄이나 이란 같은 곳에 가면 물레 같은 농기구가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런 게 적지 않게 있어요. 올해 몽골에서 시베리아까지 초원로를 갔다왔는데 내년에는 이를 글로 묶는 작업을 할 겁니다.

오아시스길과 초원길을 갔으니 앞으로 해로를 따라가서 실크로드 3대 길을 모두 돌아볼 생각입니다.”



■ 정수일은 누구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흘러간 유랑민의 자손으로 1934년 중국 옌볜에서 태어났다.

중국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수석 졸업했으며 국비 장학생으로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유학한 뒤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63년 북한으로 가 평양국제관계대 및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교수를 지냈고 튀니지대와 말레이대에서도 연구했다.

84년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들어와 단국대 초빙교수 등으로 활동하다가 96년 간첩 혐의로 검거됐다. 이른바 ‘간첩 깐수 사건’이다.

대법원에서 1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0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연구와 강연, 집필 활동에 매진해왔다. 동서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중국어 · 일본어 · 영어 · 아랍어 · 위구르어 · 티베트어 · 몽골어 등 12개 언어에 정통하다.

<세계 속의 동과 서>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문명교류사연구> <실크로드 문명기행> 등을

썼고 <이븐 바투타 여행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을 번역했다.
- 경향, 20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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