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긴 여정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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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긴 여정을 마치며

관리자 0 7046

(47) 긴 여정을 마치며


△ 각종 교류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고구려 무용총 현실 천장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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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 ‘어제’ 에게 ‘내일’ 을 묻다

타문명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걸어온 길
때로는 세계에 앞장서고 때로는 뒤좇다
지금, 한국의 위상은 어디에 와 있는가


‘문명교류기행’의 장도에 오른지 꼭 1년이 된다. 그간 겨레의 기나긴 문명교류 여정을 대강 되돌아 봤다. 그 여정은 우리 역사를 세계와 고립시켜 통시적으로만 보았던 구태를 벗어나 세계와 연관시켜 공시적으로 눈 높이를 맞추어 본 현장이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 그것이 바로 한국의 세계성이다. 이러한 세계성은 교류를 통해 세계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실현 가능했다는 것을 ‘문명교류기행’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역사의 세계성을 담보한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보편성은 우선, 일찍부터 우리가 세계와 문명간의 유대로 묶여 살아왔다는 데서 나타난다. 선사시대 우리 즐문토기는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동서 관통한 즐문토기 문화대의 동쪽 끝을 장식했다. 실제로 이땅은 세계 거석유물 5만 5천여 기 가운데 4만기의 고인돌(지석) 유물을 보유하고 있어 동아시아 고인돌 문화권의 핵심이자 세계 거석 문화대의 중추로 자리매김 되었다. 6세기께까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약 1천년 동안 전개된 황금문화권에서 이 땅은 황금문화의 꽃이라는 금관의 나라로서 단연 전성을 구가했다. 4세기 불교가 전해진 이래 복합문화인 불교문화는 장기간 전통문화의 주류를 이어왔고 오늘날도 그 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수천년간 유지되어 온 벼 문화는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충북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 중에서 가장 오래된 1만 3천여 년 전 볍씨(‘소로리카’)가 발견되어 5대주 110 여 개 나라를 망라한 벼 문화권에서 한반도가 그 원조일 개연성을 짙게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문명교류의 통로이며 세계로의 이음길인 실크로드 3대 간선이 한반도로 뻗음으로써 이 모든 문명적 유대는 끈끈히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우리역사의 보편성은 이러한 문명유대와 더불어 다른 문명을 적극 수용한데서도 나타난다. 겨레는 선진문명에 대한 수용성이 남달리 강했다. 신라는 전통문화 바탕 위에서 북방·남방 문화, 멀리 로마를 비롯한 서역 문화까지도 받아들여 유례를 찾기 드문 다원적 복합문화를 일궈냈다. 신라를 일컬어 ‘로마 문화의 왕국’이니, 동아시아의 ‘유리 보고’니 하는 찬탄어린 지칭은 신라 문화 특유의 수용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고유의 온돌문화에 당과 말갈의 다른 무덤 양식을 받아들였는가 하면 삼존불 협시보살의 목에 십자가를 거는 식의 독특한 복합문화를 창출했다. 고려 문화의 금자탑이라는 ‘팔만대장경’은 이웃 나라들의 판본을 죄다 가져다 꼼꼼히 검토하고 보완하여 결국 20여 종의 대장경 가운데서 5,200여 만 자로 씌어진 가장 방대하고 완벽한 ‘팔만대장경’을 완성해 불교 경전을 집대성했다. 서양종교를 타율적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오로지 조선뿐이란 사실또한 이런 수용적 자세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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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보문동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우리 역사가 세계적 보편성을 띨 수 있었던 것은 유대에 의한 결속이나 다른 문명에 대한 수용성에서만 기인된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기여에도 몫이 있다. 세계에 대한 앎, 세계와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하고 실천해온 발군의 위인들이 적지 않다. 신라 고승 혜초는 한국의 첫 세계인으로서 8세기 인도를 비롯한 서역 일원을 방문하고 불후의 여행기를 남겨놓아 동서문명교류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 무렵 고구려 유민 고선지는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서역 원정을 단행해 국제관계사에 하나의 획을 그어놓았다. 또 제지술의 서방 전파를 낳아 유럽 근대문명의 기폭제를 제공했다. 해상왕 장보고의 무역활동은 동아시아 3국의 국제 관계를 일변시켰으며, 해상강국 고려의 건국기틀을 마련했다. 이들에 의해 기염을 토하기 시작한 세계정신은 조선시대 이수광과 최한기, 유길준 등의 참신한 우주관과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부민(富民)교류의 큰별 문익점의 목화씨 재래는 면화의 세계적 전파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이나 기록유산, 무형유산으로 등록된 14건의 유물은 인류의 보편주의적 가치가 공인된 귀중한 문회재들이다. 우리는 핵무기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한’ 무가지보의 벽화를 보유중인, 몇 안되는 민족이다.


나라의 세계성은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보편성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가치의 창출, 즉 개별성에 의해서도 보장된다. 사실 모든 보편성은 교류를 통한 개별성의 승화다. 개별성을 떠난 보편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부실한 사변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의 응축이다. 이 점에서 우리문화의 창의성을 자랑할 수 있다. 우선,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전통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화에서부터 그 고유성이 감지된다. 예컨대, 고구려와 로마의 건국신화를 비교해 보면, 고구려 신화의 이념적 지향점은 조화와 상생, 합일에 맞춰졌으나, 로마는 갈등과 상극, 분열에만 두고 있으며, 신화소(神話素)나 그 짜임새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계 도자사를 빛낸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녔다. 청자장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영롱한 빛깔에다가 누구도 엄두를 내지못한 상감기법을 도입해 특유의 상감청자를 만들어냈다. 조선의 분청사기는 그 다양성과 질박함으로 말미암아 현대도예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조선의 백자는 색조나 모양새, 크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고고한 학문세계에서도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최한기는 자신이 개창한 기철학에 바탕해 독창적인 ‘조선식 우주론’을 제시했으며, 그 이론으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새로이 해석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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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청자의 최전성기 때 유물인 청차 참외모양 꽃병. 



이러한 고유문화의 창출과 함께 외국문명을 수용하는 데서 발휘한 선조들의 창의성은 더욱 돋보인다. 이질적인 외래문명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실정에 맞게 접변(接變)을 주어 받아들이는 슬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불교에서 석굴은 기원전 2세기께부터 근 1천년 동안 동서의 넓은 지역에 펼쳐진 하나의 보편적 문화현상으로서 모두가 자연석굴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경주 석굴암은 유일하게 인공석굴로 된 짜임식 건축물이다. 그 구조에서도 신라인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해 지상 세계인 전실은 네모꼴로, 하늘 세계인 주실은 둥근 모양의 돔 천장으로 꾸미는 독창성을 보였다. 근대화를 앞둔 시점에서 서학(西學)에 대한 조선인들의 대응자세도 남들과는 사뭇 다르다. 전면 수용과 부분 수용, 전면 거부 등의 논의를 거쳐 전통적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근대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는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책을 강구한다. 당초 금기시되던 서방종교도 차츰 발 붙일 여지를 얻게 된다. 

신라 때 처용은 비록 외모와 의상이 괴이한 이방인이지만, 배척하지 않고 수용해 설화의 주인공으로 윤색 승화시켰으며, 고려시대에는 ‘내자불거(來者不拒), 즉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라는 포용책을 펴 많은 외래인들을 귀화시키고, 우월한 고려문화의 용광로 속에 녹여서 문화 단일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 만든 것은 역사에서 보기드문 지혜의 소산이다. 어디서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수용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문명교류의 원리를 구현한 범례다.


세계 속에서의 우리의 위상과 세계성을 살펴보는 과정은 곧 교류사적 이해의 과정이다. 교류사적 이해를 떠난 위상 정립이나 세계성 재량이란 있을 수 없다. 세계와의 공시적인 관계 속에서 가졌던 것과 못 가졌던 것, 잘한 일과 모자랐던 일들을 더욱 또렷이 가려낼 수 있다. 특히 세계사적 지평에서 못가졌던 것과 모자랐던 일들을 추려낸다는 것은 일종의 역사적 성찰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일통삼한’의 내재적 한계성으로 인해 발해사가 민족사의 주류에서 밀려나 오늘날까지도 수난을 면치못하고 있다. 이른바 ‘쇄국’과 ‘당쟁’이란 자해적 식민사관의 덫에 걸려 우리 스스로가 조선을 ‘닫힌’ 나라, ‘처진’ 나라로 인지하면서 남이 멋모르고 한 ‘은자의 나라’란 비하에도 무감각해 왔다. 일본사람들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물적 증거로 육모창(여섯갈래 창)을 ‘칠지도’(일곱갈래 칼)로 변조해내고 걸어온 무모한 논쟁에 한 세기가 넘게 휘말려들기도 했다. 조선조는 중상주의로 강성했던 고려조를 계승해 남들에 못지않는 활발한 대외교류를 펴고 서학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보수적 유교사상에 물 젖은 봉건지배층이 기술을 잡기로, 통상을 모리행위로 경시하면서 다름(변혁)을 기피하는 ‘벽이증’(闢異症)에 걸리다보니 결국 근대화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만다. 같은 맥락에서 17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과 함께 세계 도자문화를 주도해 오던 조선이 도자기에 한해선 문하생에 불과했던 후발의 일본에 자리를 내주고 아직도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1377년)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우리 선조들지만, 70여 년 후에 나온 독일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그늘에 아직도 가리워져 있다. 통절한 역사의 교훈이다.


‘문명교류기행’은 교류사적 이해에서 시동을 건 긴 여정으로서, 그 지향점은 세계 속 한국의 위상, 즉 한국의 세계성을 가늠하는 데 맞춰지고 있다. 비록 영욕이 엇갈린 역사이지만, 그것이 우리와 운명을 같이해 온 역사이고, 또 그 연장선 상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좀더 냉철하게 어제를 성찰하고 오늘을 점검하며 내일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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