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2〉 선(구)·후(신)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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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12〉 선(구)·후(신)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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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는

현재 안동김씨(安東金氏)에는 뿌리가 다른 두 개의 성관이 존재한다. 선(先, 또는 구)안동김씨와 후(後, 또는 신)안동김씨가 그것이다. 이는 금녕김씨가 김해김씨에서 금녕김씨로 바꾸기 전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선김)와 알지계의 김해김씨(후김)가 있었던 것과 같다.

선(구)안동김씨는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평하여 상락군 개국공신에 봉해진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반면 후(신)안동김씨는 안동의 성주로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 삼광태사에 오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선(구)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시조인 김사렴의 영묘재와 묘소.
선(구)안동김씨의 중시조 김방경의 아들과 손자들이 고려 말에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 전기에는 김영후(金永煦)의 후손들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현재 15개 파가 존재한다. 그 중 김익달(金益達)의 제학공파, 김사렴(金士廉)의 안렴사공파,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가 60∼70%를 차지한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42만5264명으로 조사되었다.

후(신)안동김씨는 조선 중기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가 정승이 되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 이후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후(신)안동김씨의 막강한 세도정치가 펼쳐졌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동김씨의 시조 출생연대나 안동을 본관으로 삼은 시기를 보면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후(신)안동김씨가 앞서 있다. 그런데 시기가 앞선 김선평계의 안동김씨를 후(신)안동김씨로 쓰고, 뒤에 안동을 본관을 정한 김숙승계의 안동김씨를 선(구)안동김씨로 쓰고 있다. 이는 선(구)안동김씨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중기에 세력을 떨쳤고, 후(신)안동김씨가 조선 중기·후기에 세력을 떨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안동김씨가 배출한 백범 김구 선생 동상.#선(구)안동김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선(구)안동김씨는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을 시조로 하고,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평정한 상락군 김방경(충열공·忠烈公)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중시조 김방경 이후 다섯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고려와 조선의 명신록(名臣錄)에 오를 정도로 이름을 떨쳐 명문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장남 선은 전법판서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고, 차남 흔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 셋째 순(恂)은 삼중대광 상락군, 넷째 논은 천호위 상장군이 되었다.

그중 순의 아들 중에서는 조적의 난을 평정한 후 좌정승으로 상락부원군이 된 영돈(永敦)과 우정승인 영후(永煦)가 유명했다. 영돈의 손자 대에서 직제학지공조사사에 오른 김익달에서 제학공파가, 영후의 손자로 안렴사에 오른 김사렴에서 안렴사공파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 된 김사형에서 익원공파가 생겨났다. 이들을 제·안·익 3파라고 하며, 그 외에도 도평의공파나 문온공파 등 총 15개 파가 있다.

그중에서 형제지간으로 다른 길을 걸은 김사렴과 김사형에 얽힌 일화가 많다. 김사렴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불어 고려말 충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였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좌사간(左司諫) 제수를 마다하고 청주근방(청원)에 은거하였다. 반면 동생인 익원공 김사형은 조선 개국에 적극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일등공신이 된 후 좌의정에 오른 김사형이 형의 좌사간 벼슬 제수를 전하려 청주에 도착했으나 만나지 않고, 더 깊은 도산(지금의 안동)에 은거하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 세력을 떨친 선(구)안동김씨의 인물들은 주로 김사형(익원공)의 후손에서 나왔다. 후손 김질은 세조 때 우의정에 올랐고, 김수동(金壽童)은 중종 때 영의정에, 동생 수경은 정국삼등공신 영양군에 봉해졌다. 그외에도 공조판서에 오른 김질의 아우 김무, 이조판서에 오른 김질의 손자 김찬이 있다.

또한 선(구)안동김씨에서는 무인(武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9명의 역대 충무공(이순신 등) 중 2명이 나왔으며, 삼도수군통제사만도 10명이나 배출되었다. 2명의 충무공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金時敏) 장군이며, 다른 한 명은 광해군 때 훈련대장으로 강홍립과 함께 후금(청)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장군이다. 그 외 원주목사로 원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제갑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 성천부사로 있다가 순절한 김언(金言)도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와 중기에 승승장구하던 선(구)안동김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조 때에 김자점(金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부터이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후 영의정에까지 오르고, 인조의 딸 효명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권세를 휘둘렀으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탄핵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선(구)안동김씨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근대 이후 선(구)안동김씨의 인물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김구는 15세에 한학을 배웠고,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동학혁명을 지휘했다. 그 후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여 사형이 언도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으며, 1898년 탈옥했다. 탈옥 후 공주 마곡사에 은신했다가 봉양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았다. 1909년 안중근 의사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10년엔 황해도 대표로 신민회에 참가했으며, 105인 사건으로 또다시 투옥되어 종신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14년에 출옥했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내무총장, 국무령을 거쳐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으면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으며,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했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하며 남북협상에 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김신(金信)은 공군참모총장이 되었고, 손자 김양은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했다.

그외 선(구)안동김씨의 인물로는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김학응,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 입안에 공을 세운 김재익 경제수석, 서예가 김사달 박사,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 등이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 김선평·권행·장정필 삼태사(三太師)를 제사 지내는 안동의 향사(享祀).#선(구)안동김씨의 또 다른 혈족들

해주김씨(海州金氏)에는 계통이 다른 세 혈족이 있다. 그중 하나가 김문동(金文東)계인데, 김문동은 김사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해주김씨 김문동계는 시조를 김사렴으로 삼고 있으며, 전라도사 김문동을 1세조로 삼고 있다. 김사렴의 후손들이 어떻게 해서 해주에서 세거하고, 해주김씨로 분적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외에도 해주김씨에는 병조판서 김헌의 후손인 김맹(金孟)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으며, 나주김씨 김세(金世)의 후손인 김우한(金佑漢)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해주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5864명으로 조사되었다.

철원김씨(鐵原金氏)는 후금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을 시조로 하는 혈족이다. 김응하가 철원 출생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안동김씨에서 철원김씨로 분적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392명으로 조사되었다.

후안동김씨인 김옥균.#후(신)안동김씨의 연혁과 인물

후(신)안동김씨는 고창(안동)의 성주였던 김선평이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고려에 귀부함으로써 생겨난 성관이다. 이때 함께 공을 세웠던 김행(후에 권행)은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장정필은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신)안동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김상용과 김상헌 대에서 크게 일어났는데, 그중 청음 김상헌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로 위세를 떨쳤다. 후(신)안동김씨를 가리켜 “후(신)안동김씨의 곳간엔 금관자(金貫子, 관자는 갓끈을 고정하는 도구로 금관자라는 것은 높은 벼슬을 가리키는 말)가 서 말”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곳간은 6명의 창(昌)자 돌림을 창고에 빗댄 말이다.

첫째 김창집(金昌集)의 후손에서는 왕비 3명·영의정 4명·좌의정 3명·판서 13명이 배출되었으며, 둘째 김창협(金昌協)의 집안에서는 부자(父子) 대제학이 나왔다. 그 후손들이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판서 김수근의 두 아들(김병학·김병국)은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셋째 김창흡의 집안에서는 뛰어난 문장가들이 나왔으며, 벼슬은 우의정(김달순)과 공조판서(김선근)가 나왔다. 넷째 김창업의 집안에서는 진경산수화가 김윤겸, 형조참판 김양행, 병조판서 김이익 등이 나왔다. 다섯째 또 다른 김창집의 집안이다. 김창집은 왕자의 사부가 되었으며, 공조판서 김용겸이 나왔다. 여섯째 김창립의 집안에서는 공조, 이조판서 김학순, 공조참판 김연근, 공주의 부마이며 창녕위로 봉해진 김병주, 형조판서 김석진 등이 나왔다.

이렇듯 후(신)안동김씨의 김상헌 후손에서는 수많은 벼슬이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김상헌의 후손인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순원숙황후)가 되면서부터다. 그 후 60여년 동안 정승과 판서를 독차지하면서 세도정치를 펼쳤다. 그리하여 정승이 15명(영의정 8명·좌의정 4명·우의정 3명), 판서가 50명 이상이나 나왔다.

그외 후(신)안동김씨의 주요 인물을 보면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金炳淵),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있으며, 독립운동가인 김가진(金嘉鎭·충청도 관찰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김학규(金學奎·광복군 제3지대장), 김복한(金福漢·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 옥사) 등이 있다.

그중 김옥균(고균·古筠)은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으나 당숙인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다. 박규수에게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일본이 영국과 같이 되는 것을 보고 조선은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 정권을 장악한 다음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할 것을 생각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으나,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좌진은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다. 1905년 자신의 집에서 부리던 노비 30명을 모아놓고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논밭을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1907년 호명학교를 세우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안창호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세운 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투옥되었다. 이후 만주에 건너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3300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대립적이던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그의 아들로 알려진 국회의원 김두한(金斗漢)은 애첩이었던 기생 김계월의 슬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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