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후 김해김씨, 사성 김해김씨, 강릉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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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14>후 김해김씨, 사성 김해김씨, 강릉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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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김해김씨는

지난번 필자는 김녕김씨(金寧金氏)를 서술하면서, 조선 말까지 후 김해김씨(後 金海金氏)로 불렸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후 김해김씨의 시조 김렴(金濂·경순왕의 손자)이 고려초에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진 데 따른 것이다.

김녕김씨는 시조 김렴의 후손인 김시흥(金時興·김녕김씨의 중시조) 대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으나, 김시흥의 8대손인 백촌 김문기(金文起·사육신 중 한 명)에 이르러 단종복위 운동으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가락 수로왕계의 김해김씨(선김)와 구분이 되지 않아, 가문의 뿌리가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백촌 김문기가 복권되고 가문을 정비할 상황이 되자, 수로왕계의 김해김씨(선김)와 구분하기 위해 본관을 김해의 옛 지명인 김녕으로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사정으로 가문의 모든 지파(枝派)가 정리되지 못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가락 수로왕계보다 자신들이 먼저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는데, 단지 수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본관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김해김씨를 고집하고 있다. 따라서 스스로를 김해김씨 법흥파(法興派)·익화파(益和派)·종남파(從南派)·종민파(宗敏派) 등으로 지칭하며 존속하고 있다.

후 김해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20만명 내외(2000년 인구조사 19만9544명, 사성 김해김씨 포함)로 파악되고 있다.

 

김알지의 21세손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5세손인 명주군왕 김주원을 추모하는 능향제.
# 김해김씨 법흥파

김해김씨 법흥파는 시조 김렴의 14세 손으로 김해군수였던 김춘(金春)을 파조로 하고 있다. 김춘은 멸문지화를 당한 백촌 김문기의 8촌 동생이었는데, 김문기가 화를 당하자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을 했다. 그 후 성종 2년에 다시 평북 용천군 법흥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로 인해 김해김씨 법흥파를 일명 법흥김씨라고도 한다.

김해김씨 법흥파는 법흥동으로 자리를 옮긴 후 크게 번창했다. 그 후손 중에 문관이 39명, 진사 9명, 무관 20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무관으로 이름을 떨친 후손들이 많았다. 김덕순(金德純)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고, 정묘호란 때도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김종민(金宗敏)은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워 벼슬이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근세에 들어서는 광복군 총참모장과 외무장관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이 유명하다. 그는 1918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에 참전하였으며,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장을 맡았고, 5·16 직후에는 최고회의 의장과 외무장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가 귀화하여 본관을 하사받은 김충선 장군의 영정.# 김해김씨 익화파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공로로 좌명일등공신, 의정부 좌찬성에 오른 익화(지금의 양평)군 김인찬(金仁贊)을 파조로 하는 지파이다. 이들은 시조 김인찬이 경기도 양근(양평)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양근김씨(楊根金氏)로 지칭되어 오다, 일부는 김녕김씨로 합보를 했고, 일부는 김해김씨 익화파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지역에서 자리를 잡은 익화군파는 경주김씨로 본관을 쓰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김인찬의 선계가 뚜렷하지 않다. 양근김씨의 시조 김인찬은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북청천호(北靑千戶)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동북지방의 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그가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조선 개국 후 중추원사,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로서 태조의 친병(친위부대)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런 공로로 사후에 조선개국일등공신, 익화군에 추증되었다. 그 후손들은 조선시대 대대로 무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무과 급제자만 10명이 배출되었다.

# 사성 김해김씨는

앞에서 이야기한 김렴계 김해김씨, 그리고 가야계 김해김씨와는 전혀 다른 김해김씨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사성 김해김씨(賜姓 金海金氏)이다. 사성 김해김씨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가 귀화하여 본관을 하사받은 왜장 사야가(김충선·金忠善)를 시조로 한다. 이때 함께 귀화한 장졸들이 3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잇따라 터진 병자호란으로 함경도 등 북방지역 방어에 집중 배치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함경도에 정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가창면 우록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로 인해 사성 김해김씨가 우록김씨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성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일본계 성씨이다. 시조 사야가(沙也可, 金忠善, 호는 모하당·慕夏堂)는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부산 동래에 상륙하였으나,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귀순하기를 청하였다. 귀순 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 절도사 이덕형(李德馨), 체찰사 정철(鄭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협의 후 함께 귀화한 일본인 김계수, 김계충과 함께 조총과 도약지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 후 울산과 경주전투에서 적을 대파하게 되자 권율과 한준겸이 주청하여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자헌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의관제복도 하사받게 되었다. 이때 하사받은 성씨가 김(金)이며, 본관은 김해(金海), 이름은 충선(忠善)이었다. 난이 끝난 후 또다시 북쪽 변방이 시끄러워지자 임무를 자청하여 10년 동안 북방지역 방어를 맡았다. 인조 때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려고 출전하여 이괄의 부장인 서아지(徐芽之)를 체포하여 참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을 했으나, 남한산성에 도달하기 전 화의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 우록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후손들이 가창면 우록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어 우록김씨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슬하의 5남이 모두 벼슬을 하고(장남 김경원은 병조참판, 차남 김경신은 공조참판, 삼남 김우상은 상호군, 사남 김계인은 부호군, 오남 김경인은 이조참판에 추증), 손자 김진영이 좌승지 겸 참찬관을 역임하는 등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최근의 인물로는 김치열 전 법무부장관 등이 사성 김해김씨의 후손이다. 현재 김충선은 달성군 녹동서원에 배향되어 있는데, 일본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대구시문화관광코스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귀화한 일본인 장수 김성인(金誠仁)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가 있다. 이들은 후에 본관을 함박김씨로 변경하였다. 김성인의 후손들 역시 무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운 김귀성(金貴成), 영조 때 이름을 떨친 김득추(金得秋), 김수태(金守泰) 부자가 있다. 

강릉시 성산면의 강릉김씨 집성촌.# 강릉김씨는

강릉김씨(江陵金氏)는 김알지의 21세손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5세손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김주원은 각간으로 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선덕왕이 후계가 없이 승하하자 군신회의에서 김주원을 추대했으나, 큰 비가 내려 알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즉위를 마다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명주)에 내려가 살게 되었다. 이에 왕위를 이은 김경신(원성왕)이 그를 명주군왕에 봉하고, 명주(강릉)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 후 김주원은 명주성을 쌓고 명주 일대를 통치했으며, 그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릉김씨의 지파에는 청풍파·안동파·임경공파·강릉노암공파·양양공파 등 70여개 파가 존재하고 있으며, 2000년 인구조사에서 5만2050가구에 16만5963명으로 파악되었다.

# 강릉김씨의 연혁과 인물

강릉김씨는 김주원이 명주 일대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를 행해오면서 신라 하대에 수많은 왕위계승 싸움에서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은 헌덕왕 때 공주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고 칭했으나 실패로 끝나 자결하였으며, 첫째 증손자 김양(金陽)은 민애왕을 제거하고 신무왕을 추대하여 각간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셋째 김신(金身)은 명주에 근거지를 갖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후손들도 정치적 부침에 화를 입지 않고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후손 김순식(金順式)은 경순왕이 귀부했음에도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강릉왕씨(江陵王氏) 성을 하사받아 그 후손들이 번영을 누렸으나 조선시대 들어와 왕씨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자 다시 김씨로 복귀하였다.

강릉김씨는 김주원의 9세손 김상기(金上琦) 때 크게 번성했다. 김상기는 평장사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김인존은 문하평장사 상주국으로 익성공덕공신으로 책록되고, 중요한 국사가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을 맡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은 조선의 신동과 생육신으로 유명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있다. 그는 세종 17년 서울에서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한시를 지었으며, 5세에 중용과 대학을 통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승려가 되었다. 여러 차례 세조의 소명을 거절한 후 금오산실에 은거하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산거백영’을 지었다. 잠시 환속하여 아내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다시 입산하여 충청도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다.

그 외 예조판서 김첨경(金添慶), 판서 김시환(金始換)·김시형(金始炯)·김시위·김상성(金尙星), 우참찬 김노진,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이 있고, 40년간 대사성을 지낸 김반(金泮)의 후손들은 강서김씨(江西金氏)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릉김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만 114명을 배출하였으며, 판서가 8명이 나와 ‘팔판동(八判洞)’이라는 동네가 생기기도 했다.

근대 들어서는 강릉김씨의 인물로는 ‘날개’ ‘오감도’ 등으로 유명한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이 있으며,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 김진선 전 강원지사,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등이 있다. 또 축구선수 김남일, 탤런트 김래원도 강릉김씨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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