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성주 (星州)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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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19> 성주 (星州)이씨

관리자 0 1187

시조 이순유 망국의 恨품고 고려서 벼슬 않고 성주로 숨어

성주(星州)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 때 이부상서를 지낸 명신(名臣)으로 경주(慶州)이씨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매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고려조에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성주는 처음엔 육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 후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 본피현(本彼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16년에 성산군(星山郡)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조에 와서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었다가, 충렬왕 21년에 들어와서 성주목(星州牧)으로 다시 승격하였다. 그 사이에도 여러 번 현(縣)과 목(牧)으로 승격과 강등이 반복되다가 조선 말 고종 때에 와서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다. 지금은 성주읍으로 되어 있다. 

성주이씨 시조 이장경을 모신 오현재 전경(왼쪽)과 성주이씨 시향제를 지내는 모습.
성주이씨는 바로 성주지역에서 오랫동안 토착해온 성씨이다. 그것은 성주이씨의 시조 이순유가 신라 멸망 이후 성주에 옮겨서 숨어 살았다는 것과 성주이씨가 고려에서 대대로 성주지역의 호장 벼슬을 하는 호족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성주이씨의 주요 파는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초은공파, 광평군파, 판서공파, 도은공파, 경무공파, 평간공파, 문경공파, 총제공파, 판운공파, 동지공파, 참판공파, 간성공파, 고은공파, 장절공파, 도정공파, 문과공파, 봉례공파, 첨추공파 등이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5만8134가구에 총 18만6188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성주이씨 중시조 이장경.성주이씨와 농서이씨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성주이씨의 시조는 문성왕 때 이부상서를 지낸 이순유이다. 그는 우리나라 토착 이씨의 시조인 이알평의 32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주이씨의 중시조로 알려진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보다 4대가 앞선 것이다(소판공 이거명은 이알평의 36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신라가 망한 후 이름을 이극신으로 고치고 성주지역에 숨어 살았으나, 고려 태조가 그의 인물 됨을 아깝게 여겨 성주지역을 다스리는 호장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성주이씨는 대대로 호장 벼슬을 물려받으며, 성주 지역을 다스리는 호족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고종 때, 시조 이순유의 12세손인 이장경(李長庚)이 중시조가 되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장경의 자손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가문이 번성한 것은 그의 대에 와서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는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는 지역은 그 지방의 호족들에게 호장 벼슬을 주어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호족들 중에 중앙의 유력한 정계인물들과 교분이 쌓이면서 중앙정치로 진출하는 예가 많았다. 이장경은 강양군(江陽君) 이약(李若)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중앙정치의 인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슬하에 다섯 아들(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 이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웠으므로 원 황제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에 추봉하였다. 따라서 중흥시조 이장경이 농서군공이 되었기에 농서이씨(?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 성주목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라고 하게 되었다. 

“이화에 월백하고…” 등의 시조로 유명한 이조년 영정.성주이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성주이씨는 중시조 이장경 대에 중앙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가문이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의 위세를 떨쳤으며, 그의 손자 이승경도 평장사가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고,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함으로써 이장경이 농서군공에 봉해지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성주이씨는 고려 말에 성세(成勢)를 보였으며,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이장경의 아들 이만년을 비롯하여 이포(李褒)와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발(李潑)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숭문(李崇文)을 비롯하여 이지활(李智活), 이지원(李智源), 이견기(李堅基) 등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이직(李稷)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 등은 대사헌이 되었다.

그리고 이조년은 1285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다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났는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부모의 묘소에 처음으로 한글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 외에 이인복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검교시중 이포의 아들인데, 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도 제과에 급제하여 금주판관의 벼슬을 받고 돌아왔다. 조일신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웠고, 수사공 상서 좌복야 어사대부에 올랐으며 단성좌리공신이 되었다. 그 후 왕에게 신돈을 멀리 하도록 간하다가 파직당했으며, 후에 흥안부원군에 진봉되고 목은 이색과 함께 금경록을 중수하였다. 우왕 때는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인임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이포의 아들이다. 공민왕 초기에 좌부승선이 되고, 홍건적의 1차 침입 때 공을 세우고,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벼슬이 좌시중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에 이르고, 서북면 도통사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토벌, 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 이후 우왕을 추대했으며, 왕의 신임으로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을 견지하였다.

이숭인의 호는 도은(陶隱)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고려말 충신 오은(五隱)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문과에 급제한 후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한 뒤 정몽주·김구용·박의중 등과 함께 학관을 겸했다. 이색과 명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 예문관 제학에 오르고,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당했다. 그 후 정도전이 보낸 황거정에게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관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을 정도로 문장에 조예가 깊었다.

이직은 이인민의 아들이다. 13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공양왕 때 예문 재학을 지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헌하여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1397년엔 대사헌을 지내고,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으며,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이 되었다. 이듬해 대제학을 거쳐 왕명을 받아 주자소를 설치하였으며,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성산부원군으로 지봉되고, 우의정에 승진했다. 하지만 황희와 함께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성주에 안치되었다가 풀려나, 영의정에 올랐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은 이천년의 8세손으로 여원백 이성량의 아들이다. 이성량은 서자 출신이었는데 조선 사회의 서자에 대한 심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명나라로 귀화하여 요동총병관을 지냈다. 그의 아들 이여송은 명나라에서 출생하여 제독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황제의 명을 받아 원군 4만3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이여송은 일본군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유성룡 등의 재촉을 받고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평양성 탈환의 여세를 몰아 한성으로 남진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기세가 꺾인 이여송은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 교섭 위주로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 철군했다. 1598년 토번(土蕃)과의 전투 도중에 전사하였다.

조선시대 성주이씨에서 배출된 과거급제자를 보면 문과 102명, 무과 32명, 사마시 352명, 역과 2명, 의과 12명, 음양과 1명, 율과 2명, 주학 3명 등이 있다.

현대에 와서도 성주이씨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 여사를 비롯하여 그의 아버지인 이규동, 삼촌인 이규광씨가 있으며,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병희씨를 비롯해 이용택, 이대순, 이해봉씨가 있으며, 이종률(전 정무제1장관), 이재식(전 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 이학봉씨(안기부 차장) 등이 성주이씨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재계에서는 세방기업 회장 이의순씨가 대표적이다. 또 신영섬유(주) 회장 이운일씨, (주)국도화학공업의 이삼열씨도 성주이씨 재계의 인물이다.

성주이씨의 분파

밀직공파(密直公派)는 이장경의 장남 이백년의 후계로 성주군 벽진면(碧珍面) 봉계리(鳳溪里)와 자산리(紫山里), 가천면(伽泉面), 화죽리(花竹里), 수륜면(修倫面) 신파(新坡), 오인(五印), 포월리(浦月里), 용암면(龍巖面) 선송리(仙松里)에 각각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참지공파(參知公派)는 이장경의 차남 이천년의 후계로 손자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벼슬하였으므로 요녕성과 평양북도, 함흥 등지에 세거하였고 10세손 이천충(李天忠)이 경남 남해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시중공파(侍中公派)는 이장경의 삼남 이만년의 후계로 초전면(草田面) 검단(黔丹)에 집성촌이 있으며, 6세손 이지활(李智活, 호 孤隱)은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으며, 함양과 거창에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다.

유수공파(留守公派)는 이장경의 사남 이억년이 개성유수직(開城留守職)에 있다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지금의 경남 산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경남지역에 세거하고 있다.

문열공파(文烈公派)는 이장경의 오남 이조년의 후계로 성주읍 예산리(禮山里)에 집성촌이 있으며 고려와 조선 초에 정계에 많이 진출한 까닭에 그들의 근무지에 따라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특히 5세손 이직이 태·정·태·세(太定太世) 4대에 걸쳐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며 서울, 경기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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