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연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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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1> 연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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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명문가를 꼽을 때 연안(延安)이씨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연안이씨는 조선시대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이름을 떨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연안이씨는 이름 때문에 중국의 연안지역을 본으로 삼고 있는 성씨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렇지 않다. 연안은 지금의 황해도 연백지역의 옛 이름으로, 시조 이무(李茂)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생겨난 본관이다. 그렇지만 연안이씨는 우리 토착성씨는 아니다. 시조 이무는 당나라 출신으로, 고종 때 중랑장을 지내다가 나당연합군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이 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후 당나라 조정에서 측천무후의 섭정으로 심각한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환국을 포기하고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 이에 신라 왕실에서 이무의 공을 인정해 연안후(延安侯)로 봉하고, 식읍 1000호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대전 국립현충원 내에 있는 연안이씨 시조묘.
하지만 시조 이후의 계보는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繼代)를 알지 못한다. 당시 신라 왕족과 6부족을 제외하곤 성씨를 쓰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성이 일반화되면서 그 후손들이 각각의 중시조를 기점으로 10여 파로 나누어졌다. 이현려(李賢呂)의 판소부감사공파(判小府監事公派), 이습홍(李襲洪)의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송(李松)의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지(李漬)의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핵(李核)의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분양(李汾陽)의 이부시랑공파(吏府侍郞公派), 이방(李昉)의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이득량(李得良)의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이백연(李伯衍)의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이계연(李季衍)의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가 그들이다. 이외에 태자첨사공파의 파조 이습홍의 후손인 이인수(李仁守)를 시조로 하는 안산(安山)이씨도 연안이씨에서 갈라진 성씨이다.

이들 10여 파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파는 이습홍의 태사첨사공파, 이현려의 판소부감사공파 이지의 통례문부사공파 등 4개파이다. 그런데 이들 계파는 중시조가 이무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각 파조 간의 세대관계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족보도 합보하지 못하고, 각 파의 세대간 항렬자도 다르게 쓰고 있다.

연안이씨가 명문가로 발돋움한 것은 조선조 판소부감사공파에서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이 나온 이후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문과 급제자만 250명, 정승 반열의 상신 8명, 대제학 7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였다. 현재 연안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4799가구에 14만54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연안이씨를 명문가문으로 일으킨 가평의 이석형 묘.연안이씨의 연혁과 인물

연안이씨의 시조 이무는 중국 5호16국 시대 서량(西凉)을 세운 무소왕(武昭王)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 고종 5년에 소정방과 함께 신라원군의 장수로 참전해 백제 정벌에 나섰다. 백제를 정복한 후 소정방이 승세를 몰아 신라까지 정벌할 욕심을 보이자, 동료 장수들과 논의하여 소정방을 설득하였다. 이에 신라에서는 나당군이 대결을 벌이는 위험한 상황을 타개한 이무의 공을 높이 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백제 땅에 머물러 지키다가, 나당연합군이 고구려까지 정복하자 시염성(현 황해도 연안)을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그 후 당나라에서 권력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신라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연안이씨의 주축인 3대파 중에서도 판소부감공파가 단연 뛰어난데, 이 파에서만 상신 8명과 대제학 6명, 청백리 1명, 그리고 공신 10여명이 배출되었다. 파를 중흥시킨 사람은 문강공 이석형이다. 그는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을 섬긴 명으로, 당시 유학계의 4대 학파 중 훈구파로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했다. 한문학의 대가로 유명한 이정구(李廷龜)가 그의 현손이며, 이귀(李貴)는 그의 5대손이다.

문충공(文忠公) 이정구는 한문학의 대가로서 선조 때 대제학, 인조 때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학자와 문장가로서 명성을 멀리 명나라까지 떨쳤다. 그의 자손에서만 3대 대제학과 부자 대제학이 나왔다. 충정공(忠定公) 이귀는 인조반정을 주동하여 정사공신 1등으로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무렵 반정 주체세력이 ‘공서(功西)’가 되고, 반정에 참여치 않은 측이 ‘청서(淸西)’로 갈리자 그는 ‘공서’의 영수로 병조와 이조의 판서 등을 지냈다. 그의 두 아들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과 충정공(忠靖公) 이시방(李時昉)도 아버지를 따라 반정에 가담해 둘 다 정사공신 2등으로 시백은 연양부원군에 봉해져 효종 때 영의정에 올랐고, 시방은 연성군에 봉해져 효종 때 판서를 지냈다.

영종 때 좌의정으로 세자 사부를 겸한 충헌공(忠獻公) 이후(李厚)는 시백의 5대 손이다. 그리고 월사(月沙) 이정구의 두 아들 문정공(文靖公) 이명한(李明漢)이 인조 때 대제학을 지냈고,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이 형조참판을 지냈는데,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간에서는 이들 3부자를 송나라의 삼소(三蘇)에 비유하였다.

이명한의 아들 문숙공(文肅公) 이일상(李一相)도 효종 때 대제학을 지내어 3대 대제학이 나왔다. 그리고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문간공(文簡公) 이정보(李鼎輔)와 역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李天輔)는 이명한의 현손이요, 순조 때 좌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이존수(李存秀)는 이천보의 손자이다. 또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내고,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문숙공(文肅公) 이성원(李性源)은 정구의 6대손이며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이시수(李時秀)와 순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만수(李晩秀) 형제는 복원의 아들로 부자 대제학이다.

통례문사공파의 중추 인물로는 정양공(靖襄公) 이숙기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세조 때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으로 연안군에 봉해지고, 성종 때 좌리공신에 올라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선조 때 대제학을 지냈고 호성공신으로 연릉부원군에 봉해진 문희공(文僖公) 이호민(李好閔)은 숙기의 중손이다. 선조 때 광국공신 2등으로 연양군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녹선된 문청공(文淸公) 이후백(李後白)은 연안 이씨 최초의 양관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숙기의 아우인 문장공(文莊公) 숙감의 증손이며, 성종 때 좌리공신으로 이·형·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연원군에 봉해졌으며, 청백리에 추록된 충간공(忠簡公) 이숭원(李崇元)은 숙기와 4촌간이다.

태자첨사공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강호공(康胡公) 이귀령(李貴齡)이다. 그는 이성계와 친교가 두터워 조선 건국에 협조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올라 동북면 병마절도사를 거쳐 태종 때는 검교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아우인 이귀산(李貴山)의 현손 이곤(李坤)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4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호성공신에 녹훈된 이광정(李光庭)도 이 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연안이씨 근현대 인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동녕.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연안이씨 중에서도 근현대 인물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이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는데, 그의 집안은 경주이씨의 이회영 일가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문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동녕은 연안이씨 중에서 이습홍의 25세 손으로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그의 멘토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한문학을 공부했고 진사시험에 급제를 하기도 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그 해 북간도에 가서 이상설, 이여준 등과 용정에서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총무가 되었고, 1910년에는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의 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권업회(權業會)를 조직하여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이 되었고,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던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단결을 촉진했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했고 이어 대통령 대리가 되었으며 26년에는 국무령이 되었다. 김구가 상해임시정부 주석직을 맡게 된 것은 그의 지원이 큰힘이 되었다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 결성에 참가하여 항일전에 투신했다. 임시정부를 이끌고 창사(長沙)로 이전했다가 쓰촨성에서 병사하였다. 

이동녕과 임정요인 사진(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동녕 그 오른쪽 옆이 김구).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근현대 연안이씨 인물로 이동녕 외에 우리나라 시조문학에 대가를 이룬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를 들 수 있다. 이병기는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였는데,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해 1925년 ‘조선문단’지에 ‘한강(漢江)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시인으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 고전에 대한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자리도 굳혔다. 1926년 최초로 시조회를 발기하고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律格)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등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고 1939년에 ‘가람시조집’을 발간, ‘문장(文章)’지 창간호부터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를 발표하는 등 고전연구에 정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l년 가까이 복역하다 1943년 가을에 기소유예로 출감한 후 귀향하여 농사와 고문헌연구에 몰두했다.

광복 후에는 상경해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각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1948년 ‘의유당일기’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등을 역주 간행했고, 1954년 학술원회원이 되었으며, 이 해 백철과 공저로 ‘국문학전사’를 발간해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이외에도 이숭녕(李崇寧·국문학자), 이항녕(李恒寧·법학자) 등이 학자로 이름이 높으며, 경제인으로는 홍익대 설립자인 이도영(李道榮), 리연(李然·동원탄좌 회장), 리봉녕(李奉寧·쌍방울 회장) 등이 있다. 정관계 인사로는 리중재(李重宰·전 재무부 장관), 이웅희(李雄熙· 전 문화공보부 장관), 이치호(전 국회의원), 이돈희(전 교육부장관)가 있다. 또한 탤런트 이덕화도 연안이씨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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