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韓山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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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2> 韓山 이씨

관리자 0 1304

중시조 목은 이색 이후 크게 번성… 조선조 명문가로
고려시대 충남 한산지방 토착 호족 후예
시조 다른 호장공·권지공계 두파로 이뤄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2005가구에 총 13만6615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산이씨에는 한 뿌리에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하지만 이와 다른 한산이씨의 권지공계(權知公系)에서는 시조를 이윤우(李允佑)로 내세우고 있다. 이윤우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올라 권지문하사사(權知門下司事) 혹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이윤경과 이윤우에 대해 두 사람이 형제였다는 주장이 있고(권지공계),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호장공계).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의 묘는 원래 한산현 동헌마루 밑에 있었다.
호장공계의 시조 이윤경은 한산 지방에 토착하여 세거해온 호족(豪族)의 후예이다. 그는 고려 중엽에 향리(鄕吏)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다. 원래 호장은 고려시대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는 곳에 그곳의 유력가문의 장으로 지방관을 대신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따라서 이윤경이 한산지방(지금의 충남 한산)의 호장을 역임했다는 것은 한산지방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집안은 이때부터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해 오면서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한산이씨의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다. 하지만 그가 지은 ‘가정집’에 ‘차마설(借馬說·말을 빌려타는 것)’을 쓴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이 유력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경북 영덕의 목은 이색 선생 생가터(이색은 외가인 이곳 영덕의 괴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320년(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다. 원의 벼슬은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에 오르고, 고려에서의 벼슬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정했다. 이색 이후 호장공계의 한산이씨는 조선조에서 유력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가문이 되었다.

한편 이와는 다른 권지공계(시조 이윤우)는 4세손 이무(李茂)가 충렬왕조에 사설직장(司設直長)이 되고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으로 공을 세워 대호군(大護軍)에 오르고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에 이르러 한주군(韓州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한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산이씨의 중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는 목은 이색 영정.한산이씨의 연혁과 인물

한산이씨는 이곡, 이색 부자에 이르러서 유력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가정 이곡의 아들 이색은 고려말 길재, 정몽주 등과 함께 삼은(三隱) 중의 한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공민왕 때 괴과(魁科)에 뽑히고, 또 정동성(征東省) 경시(卿試)에 장원을 했다. 정당문학(征堂文學)을 거쳐 58세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원(元)의 국자감에 유학하면서 중국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특히 주자(朱子)와 정자(程子)의 새 유학(儒學)이론에 심취하여 성리학(性理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등이 배출되었는데, 공민왕(恭愍王) 때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자 정몽주,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을 채용하여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그의 세 아들인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은 각각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냈는데, 조선의 개국세력에게 이색이 밀려나자, 종덕은 복사(伏死)당했고 종학은 교살당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민심수습을 위해 그를 한산백(韓山白)에 봉하고, 그의 아들들도 복관되었다. 그는 신라의 최치원, 고려 중기 후기의 이규보, 이제현을 잇는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는데 ‘목은집(牧隱集)’ 50권이 전해지고 있다.

이색의 후손은 태종 조에서 복권된 후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이종선의 아들 이계린은 세조 때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그의 동생 이계전(李季甸)은 세조 때에 정난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이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고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이맹균(李孟畇)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이숙치는 청백하므로 이름이 있었고, 세종조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으며, 이숙무(李叔畝)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다.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이축(李蓄)의 아들 이훈(李塤)은 성종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였고, 관직은 참찬(參贊)에 이르렀는데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토정 이지함 가족 묘역.
또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진 학자이다. 하지만 토정비결이 그가 지은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가 역학과 수학, 의학은 물론 천문 지리에 밝고, 마포나루에 흙집을 짓고 사는 등 기행을 보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토정은 선조 11년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걸인청’이란 것을 만들어 관내의 거지들을 돌보기도 했다.

이지함의 조카는 북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이다. 그의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이며, 숙부는 지함이다. 그는 숙부인 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명종 때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윤현(尹晛)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또한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하거나 귀양 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서화에도 뛰어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으며, 이이(李珥), 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는 ‘아계집’이 있다. 그의 딸은 이지함의 권유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에게 출가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렇듯 한산이씨는 조선조에서 명문가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재상만 4명, 대제학 3명, 청백리 6명, 공신 12명을 냈고, 과거(문과) 급제자만도 198명으로 이(李)씨 중에서는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연안이씨(延安李氏) 다음이다.

하지만 명문가문으로 이름을 떨친 한산이씨에서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가문이 위태로웠던 때가 없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추진하다 참형을 당한 이개(李塏)이다. 그는 목은(牧隱)의 증손으로 일찍부터 시문에 뛰어나 세종(世宗)18년 문과에 급제했고, 뒤에 중시(重試)를 거쳐 호당(湖堂)에 뽑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 복위를 꿈꾸다 사형을 당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몰살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 후 정조 때 사육신이 복위, 복관되기 전까지 역적으로 취급되어야 했다.

한산이씨의 근·현대 인물

한산이씨 중 근·현대인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이다. 그의 본명은 계호(季皓)이며,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었다. 박정양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했다. 그때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 김옥균(金玉均) 등과 사귀었으며, 1884년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 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 참찬(參贊)에 임명되었다. 그 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 차 한규설(韓圭卨), 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현 YMCA) 종교부 총무를 역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북경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현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또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이상재 외에 근·현대 한산이씨 인물 중에서는 학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이훈구 박사와 이헌구 교수(이화여대·82년 사망)를 비롯해 이현복 박사(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도 한산이씨 문중이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장을 지낸 이일규씨가 있으며, 이영복, 이상원 판사 등도 한산이씨다.

또한 재계에서는 대우그룹 부회장이었던 이우복씨를 비롯해 동성제약 이선규 사장, 아시아중석 이수복 회장, 대성고무 이관직 사장, 풍림산업 이준원 회장, 동서산업 이영직 사장 등이 있다. 언론계에서는 합동통신, 서울신문 사장과 대한언론인회 명예회장을 지낸 이관구씨, 기자협회장과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긍규씨가 있다. 관계에서는 제헌의원 이훈구, 전 체신부차관 이진복, 전 농진청장 이태현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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