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합천이씨·함평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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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4> 합천이씨·함평이씨

관리자 0 1859

합천이씨는 경주이씨서 분적… 함평·함풍이씨는 같은 본관

합천이씨는

합천이씨(陜川李氏)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성씨이다. 합천이씨의 시조는 이개(李開)라는 사람으로, 고려 초에 합천호장(陜川戶長)을 지낸 사람이다. 호장이라는 벼슬은 고려 초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없는 곳에 지역의 호족세력에게 지방통치를 맡기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따라서 합천이씨의 시조 이개가 합천호장을 지냈다는 것은 합천지역의 유력한 호족세력으로서 합천지역을 통치하는 지방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천이씨 시조 강양군 이개의 묘. 이개는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39세 손으로 유구국 20만 대군이 신라를 침입했을 때 단독으로 적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합천이씨에서 펴낸 [임술보(壬戌譜)의 중시조사적(中始祖事蹟)]에 따르면, 이개는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39세 손으로 유구국(琉球國) 20만 대군이 신라를 침입했을 때 단독으로 적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물리쳤다고 하며, 이 공으로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또한 [문충공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는 그가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문인으로 유학의 진흥에 힘써 그 공으로 강양군에 봉해졌으며, 박경엽(朴敬燁)의 난을 토평하고 다시 문학(文學)을 진흥시켜 중국에 버금가게 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유구국에서 20만 대군이 침입했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위의 기록은 합천이씨 세보를 기록하며, 어느 정도 첨삭이 가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합천이씨에서는 시조 표암공 이알평으로부터 경주이씨의 중시조 소판공 이거명, 그리고 합천이씨의 시조 문충공 이개까지의 계대를 밝히고 있는데, 이 역시 역사적 실증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러한 일부 기록의 문제로 인해 합천이씨를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성씨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논란이 있다.

하지만 합천이씨 문중의 주장이나 신라 하(下)대에 존재한 이씨가 표암공 이알평의 후손일 것이라는 추측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합천이씨를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성씨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합천이씨 측에서도 이알평의 후손 중에서 33세 기와 위로 양분될 때, 나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알평의 후손 중에서 33대에 이르러 첫째 기의 후손으로 경주이씨의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이 있으며, 둘째 위의 후손에서 39대에 이르러 강양군 이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합천이씨는 세계가 매우 복잡하여 15개 파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전서공파(典書公派:守全)가 가장 번창하였다. 그밖에 목사공파(牧使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 등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전객령공파의 희민(希閔), 희증(希曾), 희안(希顔) 3형제를 들 수 있다. 합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3만6411가구에 11만54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합천이씨 시제 모습.합천이씨의 연혁과 인물

시조 이개의 아들 이인영은 고려시대 삼중대광에 올랐으며 후에 평장사를 지냈다. 이문저(李文著)는 음보로 벼슬에 나가 이부시랑, 상서좌승 등을 거쳐 1179년 김자광록대부 수사공특진 상서우복야 태자소보(金紫光祿大夫 守司空特進 尙書右僕射 太子少保)에 이르렀다. 이순목(李淳牧)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이신손(李信孫)은 좌서윤(左庶尹)을 지냈으며, 이덕손(李德孫)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승로(李承老)는 충목왕 때 밀직사사를 지내고 1354년 지밀직사사에 이어 정당문학에 승진한 후 강양백(江陽伯)에 봉해졌으며, 이운목(李云牧)은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냈다.

조선 중종 때의 이복로(李福老)는 1495년 사마시를 거쳐 151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봉상사판관(奉常寺判官) 등을 거쳐 초계군수를 지냈다. 이윤검(李允儉)은 1472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중종 때의 이희민(李希閔)은 151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이희증(李希曾)은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희안은 14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고령현감으로 부임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심했으며, 이윤서(李胤緖)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와 더불어 공을 세우고 이괄의 난 때 순절하여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태경(李台卿)과 이중필(李重弼)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曺參判)에 추증되었다.

한국 불교에서 수행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성철 스님.
근현대 합천이씨의 인물로는 불교계의 거장인 성철 스님과 정치계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꼽을 수 있다.

성철 스님의 속명은 이영주(李英柱)로 1912년 경남 산청에서 부농이었던 이상인씨 슬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혼 풍습으로 일찌감치 결혼을 하였으나 첫딸이 태어나기 전에 출가하였다. 출가하기 전부터 그는 지나가던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받아 읽고 구도의 길을 따라 수행 정진하였다. 출가 후 그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수계득도하였다. 이후 10년간 용맹정진을 단행하였는데 음식은 언제나 생식과 현미밥과 담식(談食)으로 일관했다. 의복은 24세에 만든 누더기를 일생 깁고 또 기워 입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끊기 위해 토굴 주위에 가시철망을 치기도 했다. 대한민국 선불교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으로 이름이 높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역임하다, 필화사건으로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과 원내총무를 지냈다.

공화당 시절에 실세였던 이후락씨와 김형욱 정보부장의 제거를 건의했는가 하면 3선 개헌을 반대하고 김종필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정풍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민주자유당에 영입되었다가 1997년엔 이인제 등과 함께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그 후 김대중 정부에서는 16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만섭씨는 주로 여당에서 정치생활을 했지만 ‘꼿꼿하고 바른말 잘하는’ 원로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 합천이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정관계에서 이희성(예비역육군대장, 전 교통부장관)·이상희(전 대구광역시장, 전 내무부장관)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이도선(교보문고 대표이사)·이중경(삼양제지공업 대표이사)·이영근(정화건설대표)·이대봉(동아항공화물 대표이사)씨 등이 있다. 또한 문화계 인물로는 이대엽(영화배우, 전 국회의원)·이병주(작가)·이만기(씨름선수)씨가 있다. 

함평이씨 시조 이언의 묘. 이언은 고려 광종 때에 신무위 대장군으로 봉해졌다고 전한다.함평이씨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시조는 이언(李彦)이다. 이언은 고려 광종 때에 신무위 대장군(神武衛 大將軍)으로 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충숙왕 때는 그의 고손되는 이광봉(李光逢)이 벽상삼한삼중대의 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이 되어 함풍(咸豊, 함평의 옛 이름) 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함평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주장도 있다. 지금도 함풍이씨(咸豊李氏)라고 쓰고 있는 문중이 그것이다. 즉, 그들은 함풍부원군에 봉해진 이광봉을 득관 조로 삼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언의 벼슬인 신무위대장군은 고려 초기에는 없는 벼슬이며, 그 후손 이순지가 왕의 사위라는 이유로 이언의 벼슬을 정해 주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 초기에 벼슬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언과 그의 4대손 이순지(공민왕)가 4대밖에 되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그들은 함평(함풍)이씨 시조 이광봉에서 이언으로 바뀌었던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숙종 14년, 함풍이씨 경향제종(京鄕諸宗)이 같이 족보하기로 발의하고, 세계(世系)를 논의해서 정하려는 때에, 족보 일을 주관하는 평릉파 종인 참봉 유인이 말하기를 “함풍부원군은 권한공과 더불어 권간(權奸:권세를 남용한 신하)으로 지목되어 종문에 누가 되니 부원군을 1세로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자, 이익겸과 이잔은 “부원군은 충숙왕 때에 삼사사에 제수되신 것을 보면 권간의 무리와는 다르다”며, “설사 권간에 이름이 있다 한들 자손으로서 조상에게 어찌 의심을 전하겠는가? 더욱이 틀림없는 조상을 조상으로 하지 않는 족보는 같이할 수 없다”고 자리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익겸과 이잔의 후손들은 이광봉을 시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을 함평이씨 대종회에 상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광봉 자손만으로 함풍이씨 대종회를 결성하고, 2011년에 이광봉을 시조로 한 함풍이씨를 등재하였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함평이씨와 함풍이씨는 같은 본관성씨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감정공파(監正公派)·교수공파(敎授公派)·기성군파(箕城君派) 등 18개 파로 나뉘어 있으며, 성씨인구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3만8852가구, 12만5419명으로 나타나 있다. 

전남 함평군에 있는 함평이씨 발상지.함평이씨의 연혁과 인물

이언의 4세손인 이순지(李順之)는 고려왕실의 사위로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고, 그의 큰아들 이림(李琳)은 상의원직장동정(尙衣院直長同正)을 지냈다. 이순지의 둘째아들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 때 삼한벽상(三韓壁上)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들어와 함평이씨의 인물로는 언(彦)의 10대손인 이종생(李從生)이 있다. 그는 세조 때의 무장으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오르고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는데, 함평이씨의 인물은 대부분 그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이양(李良)장군 또한 연산군∼중종 때에 전라·충청 수군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던 인물이다.

선조 때 이덕일(李德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의 참모로 기용되어 임진왜란을 종결시키는 데 크게 공을 세워 절충(折衝)장군(정3품)에 올랐다. 또한 통제사를 지낸 이원(李沅), 영조 때 훈련대장, 병조판서, 분무공신을 역임한 이삼(李森), 정조 때 어영대장, 도총관을 지낸 이창운(李昌運) 등도 무관으로써 함평이씨 가문을 빛냈다.

문신으로는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이춘수(李春秀)의 아들로 세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긍(李兢)이 있으며, 우윤 이관(李瓘)의 아들로 선조 때 대사간을 지낸 이효원(李效元),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춘원(李春元), 효종 때 대사헌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지익(李之翼), 인조 때 황해도 관찰사 이배원(李培元) 등이 명망 높다. 이렇듯 함평이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78명, 무과 14명 등 29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함평이씨 근현대 인물

함평이씨는 해방 후에도 사회 각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정관계에는 이계순(전 농림부장관)·이계철(전 미얀마 대사, 순국)·이자헌(전 체신부장관)·이용섭(전 행자부장관)·이치범(전 환경부장관)·이호범·이성우·이병헌·이우헌·이원범·이영일·이길범·이계안·이계경(이상 전 국회의원)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이건주(전 해양대 총장)·이준범(고려대 총장)·이계수(전남대 교수)·이돈명(경희대 총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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