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밀양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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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6> 밀양 박씨

관리자 0 1973

3대 악성 박연… 여성 정치인 박순천… 역사 속 걸출한 인물 많아

밀양박씨는

밀양박씨(密陽朴氏)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94만6307가구로 총 303만14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박씨 중 77.8%를 차지하는 숫자이며,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에서도 김해김씨(412만5000명) 다음으로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밀양박씨의 시조 박언침(朴彦沈)은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신라 말기에 박씨에서는 3명의 왕을 배출했다.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이 그들이다. 경명왕과 경애왕으로 모두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아우가 경애왕이다.

경명왕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밀성대군 박언침(밀양박씨, 반남박씨, 진원박씨의 시조)이며, 둘째가 고양대군 박언성(朴彦成·고령박씨의 시조), 셋째가 속함대군 박언신(朴彦信·함양박씨, 삼척박씨의 시조), 넷째가 죽성대군 박언립(朴彦立·죽산박씨, 음성박씨, 고성박씨의 시조), 다섯째가 사벌대군 박언창(朴彦昌·상주박씨, 충주박씨의 시조), 여섯째가 완산대군 박언화(朴彦華·전주박씨, 무안박씨의 시조), 일곱째가 강남대군 박언지(朴彦智·순천박씨, 춘천박씨의 시조), 여덟째가 월성대군 박언의(朴彦儀·경주박씨의 시조), 아홉째가 국상공 박교순(朴交舜·울산박씨의 시조)이다. 그런데 아홉 번째인 박교순에 대해서는 경명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경애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밀성대군 박언침이 배향된 재실(경남 밀양시).
밀양박씨의 연혁

밀양박씨는 박언침의 8대손인 언부(彦孚·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가 있으며, 그 외에 도평의사사사공파(都評議使司使公派),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문하시중공파는 종파인 은산공파(銀山公派, 永均), 행산군파(杏山君派, 世均)를 비롯하여 좌상공파(左相公派, 尙禮), 규정공파(糾正公派, 鉉),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 元), 밀성군파(密城君派, 陟) 등으로 갈라지며, 이들은 또 여러 파로 나뉘어 있다. 이 중에서 규정공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다. 또 규정공파에서 나누어진 파 중에서 특히 낙촌공파(駱村公派, 忠元), 강수문도공파(江?文度公派, 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밀양박씨는 박혁거세를 고시조로 하고 30세손인 박언침을 중시조로 한다. 박언침의 8세손에서 6개 파로 나누어지고, 그 후손 중에서 다시 6개 파로 나뉘어 모두 12개 파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밀양박씨에서는 10세손 박환(朴桓)을 시조로 하는 영암박씨(靈巖朴氏), 12세손 박원의(朴元義)를 시조로 하는 태안박씨(泰安朴氏)가 분적되었다. 또한 진원박씨, 운성박씨, 구산박씨, 나주박씨, 창원박씨, 문의박씨, 여주박씨 등도 밀양박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렇듯 밀양박씨는 인구 수만큼이나 대단히 복잡하고 수많은 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계통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밀양박씨의 인물

밀양박씨는 인구가 많은 만큼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서도 문과급제자 261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2명을 배출하였다.

그중 대표적 인물을 거론하면 규정공파에서 박강생(朴剛生) 박심문(朴審問) 박중손(朴仲孫) 박건(朴楗) 박훈 박충원(朴忠元) 박계현(朴啓賢) 박승종(朴承宗) 박영(朴英) 박성원(朴聖源) 등이 있고, 사문진사공파에서 박의중(朴宜中) 박거겸(朴居謙) 박종남(朴宗男)과 박영신(朴榮臣) 부자, 박연(朴堧) 박열(朴說)이 있으며, 밀성군파에서 박신규(朴信圭) 박이서(朴彛敍) 등이 있다. 이 중 박충원은 명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박승종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인조반정 후 자결하였으며, 박열은 중종 때, 박신규는 숙종 때의 청백리이다. 이 밖에 밀양박씨의 두드러진 인물로서 실학(實學)의 대가 박제가(朴齊家)가 있다.

근현대 들어와서 밀양박씨에서는 더욱 더 많은 인물이 나왔다. 정관계 인물로는 60연대 야당인 민중당을 이끈 거물여성정치인 박순천(朴順天) 여사가 있으며, 1979년 10·26사태 이후 국무총리 서리와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한 박충훈씨,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박병권씨, 내부부장관과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박경원씨가 있다. 재계 인물로는 두산그룹 초대회장인 박두병(朴斗秉)씨가 있고, 해태그룹 창업주인 박병규씨, 화신백화점 사장이었던 박흥식씨, 대농그룹 박용학 회장 등이 있다.

또한 학계에서도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박대선(전 연세대 총장) 박철웅(전 조선대 총장) 박종홍(전 서울대 대학원장) 박술음(전 외국어대 총장) 박길진(전 원광대 총장) 박기혁(전 연세대 상경대학장)씨 등이 있으며, 문화예술계에서는 박시춘(작곡가) 박용구(소설가) 박화성(여류작가) 박동진(국악인) 박종화(소설가) 등이 있다.

박연은 고구려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 우왕 때 충북 영동에서 삼사좌윤이었던 박천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앙의 관직을 역임한 가문이었는데, 난계(蘭溪)는 어릴 때부터 집에 난초가 많아 붙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수재로 소문이 났고 효자로도 유명했다. 또한 피리를 잘 불고 비파나 거문고, 가야금 연주를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출세를 보장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를 보고 관료로 성장했다.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 출세가도인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그러다가 세종이 임금으로 즉위한 뒤 박연을 관습도감(조선 초기 음악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제조로 임명하여 국가 행사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으며, 문묘제례악 등 아악(궁중음악)을 정비하였다.

한때 설화에 얽혀 파직되기도 했지만, 곧 복직되어 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세종이 죽고 난 뒤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막내아들이 처형되고, 며느리는 홍윤성의 노비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앞에도 죽음이 닥쳤지만 원로라는 점 때문에 파직으로 그쳤다. 낙향한 뒤 8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으며,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지금도 영동에서는 매년 난계음악제가 개최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밀양박씨 집안에서 서얼로 태어나 실학자로 유명해진 박제가.
박제가는 승지(承旨) 박평(朴坪)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로 북학파(北學派)의 거장이다. 중국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본받아 생산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현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출생에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았으나 일찍부터 시(詩), 서(書), 화(畵)로 유명했다. 19세 무렵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따르며,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다. 29세 때 청나라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된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연경(燕京)에 가서 건륭(乾隆)시대 청조(淸朝) 문물을 접하고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세 번에 걸쳐 청의 수도인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왔다. 그의 대표작인 ‘북학의(北學議)’는 청나라에 가서 보고 들은 견문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내편에는 농기구·수레 등 생활기구의 개량에 대해서, 외편에는 사회적 폐단을 성찰하고 사회제도의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글씨는 예서와 행서에 능했는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였으며, 그림은 문인화풍의 산수·인물화와 생동감 넘치는 꿩과 물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 ‘정유집(貞?集)’ ‘정유시고(貞?詩稿)’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으며, 글씨와 그림으로는 ‘대련글씨’ ‘목우도(牧牛圖)’ ‘어락도(漁樂圖)’ ‘야치도(野雉圖)’ 등이 있다.

박순천 여사는 해방전후 한국정치를 이끈 여성 정치사의 대모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대표적 야당 인사다.
박순천의 본명은 명련(命連)이다. 그는 경상남도 동래(東萊)에서 출생하였는데, 마산의 의신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지도적 활동을 하다가 수배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피신하여 요시오카(吉岡)여자의학전문에 편입하였으나 수배인물임이 탄로나 체포되어 마산으로 압송된 후 1년간 복역하고 출감하였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니혼여대(日本女大) 사회사업과를 졸업하였다. 결혼 후 경북 고령(高靈)의 시댁에서 농사를 돕다가 1939년 상경하여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열중하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부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을 겸하다가 정부수립 이후 감찰위원에 임명되었으며,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부터 2·4·5·6·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대표적 여성정치인 중 1인이 되었다. 20년 가까운 정치인 생활에서 민주당 총재, 민중당 최고위원, 신민당 고문 등 시종 야당지도자로서 일관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이사장이 되고,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다. 



박두병 회장은 거상 박승직의 맏아들로 1945년 동양맥주주식회사를 창설해 지금의 두산그룹에 이르게 했다.
박두병은 1910년 서울에서 거상(巨商) 박승직(朴承稷)의 맏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두산(斗山)그룹 초대회장이다.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과 동시에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에 들어가서 기업 실무와 경험을 쌓았다. 4년 후엔 아버지가 창설, 경영하던 박승직 상점의 상무이사로 취임하였다. 상점의 관리에 있어서 근대적인 경영방식의 하나인 출근부제도와 보너스제도를 도입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상점의 문을 닫고 소화기린맥주 영등포공장의 지배인이 되었다. 적산기업이었기 때문에 그는 정부수립 이후 사장직에 취임하게 되었다. 취임 후 명칭을 동양맥주주식회사로 바꾸었으며, 1952년 5월 정부의 기업체 불하계획에 따라 정식 인수하였다.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또 합동통신사를 경영, 언론사업에도 참여하였다.

박중빈(朴重彬)은 원불교의 창시자이다. 그의 호는 소태산(少太山)이며 189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우주의 자연현상에 깊은 의심을 품고 20년간 구도에 힘쓴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1916년 4월 28일에 대각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날이 원불교의 개교일(開敎日)이다. 1924년 전북 익산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를 조직, 일원(一圓)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하고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대체(大諦)를 밝혔다. 이것이 원불교의 시작이었다. 1943년 대법문(大法門)을 강설하고 입적하였다. 저서에 ‘원불교교전(敎典)’ ‘불조요경(佛祖要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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