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7〉 반남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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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27〉 반남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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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급제자 200명 넘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문가

반남박씨는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나주시 반남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조사에서 4만3300가구 총 13만9438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박씨 인구 중에서 밀양박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로 전체 박씨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반남박씨 시조 호장공 박응주 묘.
반남박씨의 시조는 박응주(朴應珠)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의 호장(戶長)을 지낸 사람이다. 호장이라는 벼슬은 지방관을 파견할 수 없는 지역에 유력가문의 수장으로 지방관을 대신할 수 있도록 호장이란 벼슬을 주어 지방을 통치했던 제도이다. 1세조 박응주의 선계는 밝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신라 말기에 국왕을 지낸 경명왕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남박씨대종회’에서는 “신라의 국운이 쇠퇴해지자 정국혼란으로 박씨(朴氏)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반남·고령·죽산·밀양 등지로 분산 거주하여 신라 경애왕(景哀王)으로부터 호장공(戶長公)까지 280여년간의 사적(史蹟)을 알 수 없어 계통(系統)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호장공의 4세손인 밀직공(密直公) 박수(朴秀)의 계축호적(癸丑戶籍)에 따르면, “호장공 박응주는 고려 희종 초에 반남에서 생장(生長)해 고려 고종 때에 반남 호장(戶長)을 지내면서 반남박씨의 가문을 열었다”고 했다.

반남박씨 중흥조 박은의 사당. 반남박씨는 밀양박씨 다음으로 많은 숫자로 전체 박씨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반남박씨로 본관을 정한 것은 문정공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었던 평도공 박은(朴?) 때였다. 박은은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라 반남군(潘南君)과 금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오랫동안 반남면에 세거했기 때문이다.

박은 이후 반남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을 배출하여 조선시대를 수놓았던 주요 명문가 중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을 열거하면 박은(朴?) 박숭질(朴崇質) 박세채(朴世采) 박종악(朴宗岳) 박종훈(朴宗薰) 박회수(朴晦壽) 등의 상신이 있으며, 박태상(朴泰尙) 박규수(朴珪壽) 등의 대제학, 박세당(朴世堂) 박지원(朴趾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박소(朴紹) 박응남(朴應男) 박응복(朴應福) 박태보(朴泰輔)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에서도 박정양(朴定陽) 박영효(朴泳孝) 등이 있다.

현재 반남박씨에는 참판공규파(參判公葵派), 세양공강파(世襄公薑派), 부윤공훤파(府尹公萱派), 지후공인파(祗候公仁派), 교위공귀근파(校尉公貴謹派), 학생공영창파(學生公永昌派), 도사공진창파(都事公震昌派), 정자공충파(正字公?派), 감찰공현수파(監察公玄修派), 학생공초생파(學生公初生派), 직장공송생파(直長公松生派) 등이 있다.

대전뿌리공원의 반남박씨 조형물.반남박씨는 밀양박씨의 분적성씨인가?

현재 반남박씨가 밀양박씨에서 갈라진 분적성씨라는 주장에 대해 반남박씨 측에서는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반남박씨 대종회에 따르면, “密陽朴氏(밀양박씨)와 반남박씨가 종씨지간임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종친(宗親)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기해년(己亥年, 1899년) 밀양박씨의 후손인 박성문(朴性汶)이 ‘신라박씨 선원보(璿源譜)’와 ‘범박 이천년사’를 펴내, 반남박씨의 시조 호장공이 밀양박씨의 30세손인 밀성대군 박언침(신라 54대 경명왕의 장자)의 후예인 42세손 박지길(朴之吉)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 종중에서는 이에 대해 고찰할 근거가 없으므로 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현재 반남박씨 대종회 측에서는 경명왕의 9아들(또는 8아들)에 대해 실체적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며, 따라서 반남박씨가 밀성대군을 시조로 하는 밀양박씨에서 분적된 성씨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남박씨 재실.
그 이유에 대해서 첫째, 고려 중엽 이전에는 항렬이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경명왕의 8아들이 언(彦)자 항렬을 썼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경명왕의 9아들에 대해 1000여년 간 알지 못하다가 조선말에 와서 밝혀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왕실종친에 대해 대군(大君)이라 칭한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 이후의 일이며, 신라시대에는 왕실종친에 대해 대군이라 칭한 적이 없음에도 경명왕의 8아들을 대군에 봉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시조와 계보를 인정하기보다는 ‘시조란 그 후손들이 자기들의 조상을 추적한 끝에 도달한 마지막 인물(송준호 교수)’이라는 원칙에 따라, 밀직공(密直公) 박수(朴秀)의 계축호적(癸丑戶籍)에서 밝혀진 호장공 박응주를 시조로 삼는 것이 올바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세채 영정.반남박씨의 연혁과 인물

박응주에 의해서 개창된 반남박씨는 고려 말 문정공 박상충(朴尙衷, 시호는 문정)으로부터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문정공 박상충은 신진 유생(儒生)으로서 친명파(親明派)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親元派)에 대항하였다. 박상충의 아우로는 판서를 지낸 박상진, 사은직장을 역임한 박상경, 박천두, 박상질의 아들 대에서 참판공파(시조 박규, 예조참판), 세양공파(시조 박강, 금천군), 경주공파(시조 박훤, 경주부윤), 지후공파(시조 박인, 예문지후), 교위공파(시조 박근, 창신교위), 감찰공파(시조 박여해, 감찰), 군사공파(시조 박진창, 군사), 정자공파(시조 박충, 교서정자), 사정공파(시조 박문부, 영사정), 동정공파(시조 박상질, 영동정), 직장공파(시조 박송생, 직장) 등이 나뉘어졌으며, 이후 다시 여러 지파로 갈라졌다.

박상충의 아들 평도공 박은(朴?)은 이방원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그 후 반남군과 금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도 크게 이름을 떨치어 반남박씨를 명문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박은의 큰아들 박규(朴葵)는 세종 때 동지충추원사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최근 세계 최초의 로켓포인 ‘대신기전’을 개발한 인물로 밝혀지기 시작한 둘째아들 박강(朴薑)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좌익삼등공신에 책록되고 금천군에 봉해졌다. 그는 군기감에 봉해진 뒤 최무선 때부터 사용하던 ‘주화’에 소발화라는 포탄을 부착하고 200m를 비행할 수 있는 ‘중주화’와 대형포탄을 탑재해 500m 이상을 비행할 수 있는 ‘대주화’를 개발했다. 이들 무기는 세종 30년 총통등록이 발간되면서 ‘중신기전’ ‘대신기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셋째아들 박훤(朴萱)은 경주부윤(慶州府尹)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조년(朴兆年)의 아들 박소(朴紹)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며, 맏아들 박응천(朴應川)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했고, 둘째 박응순(朴應順)은 선조의 장인(의인왕후의 아버지)이며, 셋째 박응남(朴應男)은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박응천의 둘째 아들 박동선(朴東善)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인조반정 후 대사간(大司諫)으로 등용되었으며, 후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박응복의 아들 박동열(朴東說)은 광해군 때 예조참의(參議)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둘째 아들 박동망(朴東望)은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셋째 박동량(朴東亮)은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하여 호성2등공신(扈聖二等攻臣)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또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巨頭)인 박세채(朴世采)는 연암 박지원(朴趾源)과 함께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박세채(朴世采)는 영·정조 때 탕평책 시행에 기반을 제공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구체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참판(參判) 박정(朴炡)의 아들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했던 박세당(朴世堂)은 숙종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저서인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朱子)를 비판하였으며,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을 풍자했다 하여, 노론의 반격으로 유배당했다.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實學者)인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하다. 그는 1737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의 손자로 태어나 처숙인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하였다. 정조 때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사양하고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연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熱河, 현재 중국의 하북성 승덕)를 다녀온 것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그는 이 책과 함께 또 다른 저술인 ‘양반전(兩班傳)’ ‘허생전(許生傳)’을 통해 조선 양반사회의 허실과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아들은 군수를 역임한 박종채(朴宗采)이며, 손자가 개혁사상가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이다. 박규수는 고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박영효 초상화.
한말에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을 지낸 박정양(朴定陽)과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었던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형제가 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이었던 박찬익(朴贊翊)이 있다.

박영효는 1861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진사 출신인 박원양(朴元陽)이다. 12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금릉위(錦陵尉)의 작위를 받았다.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1884년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였지만, 삼일천하로 그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오개혁으로 귀국하였고,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반역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한일합방 후 일제에 의해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와 동아일보사 사장, 중추원의장을 지냈다.

그 외 반남박씨의 현대 인물 중에서는 학자로는 박광서(법학자, 중앙대학원장), 박동서(서울대 교수), 박찬기(고려대 교수), 박찬웅(의학박사, 서울대), 박찬무(의학박사, 을지병원장)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박태서(제일제당, 전주제지 사장), 박도언(삼성물산 사장), 박응서(전 국제종합금융 사장) 등이 있으며, 문학계의 거목 박완서씨도 반남박씨 문중이다.

박완서씨는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1970년 장편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초기 작품에서는 중산층의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과 풍자에 주력했으며, 일상적인 삶을 정확하게 그려냄으로써, 한국사회 변화의 핵심에 접근하였다. 또한 한국전쟁에 의해 초래된 비극적 체험에서 비롯된 내면의식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대표작으로 ‘나목’(1970), ‘엄마의 말뚝’(198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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