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고령박씨·충주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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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31> 고령박씨·충주박씨

관리자 0 1939

고령박씨는

고령박씨(高靈朴氏)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8대군 중 둘째인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박언성의 후손에서 어사공(御史公) 박섬(朴暹), 부창정공(副倉正公) 박환(朴還), 주부공(主簿公) 박연(朴連)이 나와 3파를 형성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중 박섬의 사인공파(舍人公派)와 박환의 부창정공파(副創正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고령박씨에서는 조선시대에 56명의 문과 급제자, 1명의 상신, 4명의 청백리가 배출되었다. 사인공파의 대표적 인물은 박은(朴誾)·박장원(朴長遠)·박문수(朴文秀)·박상신(朴相臣)·박영원(朴永元) 등이고, 부창정공파의 대표적 인물은 박광순(朴光純)·박광우(朴光佑)·박우생(朴雨生)·박임종(朴林宗)·박만(朴蔓)·박처륜(朴處綸)·박영준(朴永俊)·박난영(朴蘭英)·박정번(朴廷?) 등이 있다. 또 현대에 들어와선 제3, 4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朴正熙)와 그의 딸인 박근혜(朴槿惠) 의원이 있다.

경북 고령군 개진면의 고령박씨 재실인 이남재. 고령박씨는 경명왕의 8대군 중 둘째인 박언성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현재 고령박씨에는 교수공파(敎授公派)·영참판공파(嶺參判公派)·직강공파(直講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경참판공파(京參判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읍취헌공파(?翠軒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현감공파(縣監公派)·무숙공파(武肅公派)·감사공파(監司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판관공파(判官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우윤공파(右尹公派) 등의 분파가 있다. 또한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총 1만2301가구에 3만92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령박씨 족보.고령박씨의 연혁과 인물

고령박씨는 경명왕의 8대군 중 둘째인 박언성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령박씨의 본관인 고령은 경북지방에 있는 지명인데, 조선 태종 때 고양군과 영천현의 지명을 따서 고령현이라고 하였다. 그 후 고종 때인 1895년에 고령군이 되었다.

고령박씨는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밀양(密陽)박씨와 반남(潘南)박씨에 이어 세 번째의 명문가로 꼽힌다. 대표적인 인물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어사공 박섬의 8세손으로 조선 세조 때 한성부 판관을 역임한 박담손(朴聃孫)의 아들 박은이 있다. 그는 한시(漢詩)를 잘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동래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어사 박문수의 묘.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있다.
박은은 3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장남 박인량(朴寅亮)은 참판을 역임했고, 둘째 박공량(朴公亮)은 공조참판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글씨를 잘 써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또 박은의 증손 박경업(朴慶業)은 광해군 때 청주목사를 거쳐 대간(臺諫)에 재직하면서 부패한 관료들을 수없이 삭직시켰는데, 인조반정 후 삭직되었던 인사들이 정권을 잡게 됨으로써 거꾸로 탄핵 유배되는 운명이 되었다.

그 외에 이조판서로 효행이 뛰어났던 박장원의 증손 박문수가 있다. 그는 어사 박문수로 인구에 회자하는 인물이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영조조에 암행어사로 나가 숱한 일화를 남겼으며,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민생을 구제하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특히 함경도에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 이를 구제하여 함흥 만세교 앞에 공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박문수의 손자인 박영보(朴永輔)는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고령박씨의 유일한 상신(相臣)인 박영원은 예조참의 박종순(朴鐘淳)의 아들로 철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3, 4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현대에 들어와서는 제3, 4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와 그의 딸인 박근혜가 유명하다. 박정희는 직강공 박숙동(朴叔童)의 후손이자 한말에 사과를 지내고, 동학 접주를 지내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박성빈(朴成彬)의 아들로 경상북도 구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료, 국군창설에 참여하였으며, 육사 2기생으로 졸업한 뒤 육군소장으로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다.

대통령에 오른 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 수출주도형 국가경제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민의 정신혁명을 일으켜 대한민국 국가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특히 좁은 국토, 빈약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국가주도형 계획경제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눈부신 업적이었다. 하지만 18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독재는 반대자들의 민주화투쟁을 불러일으켰고, 끝내 부인인 육영수 여사와 그 자신이 총격으로 생을 마치는 불행을 맞았다.

그의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은 1952년에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나왔으며, 75년 퍼스트레이디였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79년에 아버지마저 갑작스레 서거한 후 오랜 세월 동안 칩거했다.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한 후 19대 총선까지 5선의 경력을 쌓았다.

그는 한때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염두에 두고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여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으나 대선 전에 복귀했다. 2002년부터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로 등장하였지만, 2007년에 이명박 대통령과의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석패하였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지금,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다. 종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천주교 세례명은 율리아나, 불교 법명은 선덕화로 알려져 있다. 

대전시 서구에 위치한 충주박씨 재실인 영모재.충주박씨는

충주박씨(忠州朴氏) 시조 박영(朴英)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왕(沙伐王) 박언창(朴彦昌)의 11세손으로서 ‘충주박씨세보(忠州朴氏世譜)’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충주박씨 대종중에서는 박영 이전의 상계가 실전되어 정확한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에 따라 상주박씨와 충주박씨와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선 여러 문헌에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충주박씨성화보는 1474년(성종 5년)에 박원창이 처음 편찬하였는데,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이는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2년 앞선 것이다). 충주박씨가 충주를 관향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신라사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로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가 유리왕 때 그곳을 점령해서 진흥왕 때 소경(小京)으로 삼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동경(東京·경주의 옛 이름)에서 옮겨와 대를 이어 살면서 상주박씨에서 분관하여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라사에 의한 추론일 뿐 그 외 자료는 없다.

충주박씨의 시조 박영의 아들 박신(朴臣)은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孫子) 박원숭(朴元崇)은 삼사우사(三思右使)를 역임했다. 또 증손인 박득승(朴得升)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현재 충주박씨의 분파는 의정공파(參議公派)·강릉공파(江陵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제주공파(濟州公派)·집의공파(執義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함경도파(咸鏡道派)·평안도파(平安道派)·찬성공파(贊成公派)·영동공파(永同公派)·첨정공파(僉正公派)·문간공파(文簡公派)·의정공파(議政公派) 등이 있으며,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분포 자료는 총 8559가구에 2만748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암 박순의 영정.충주박씨의 연혁과 인물

충주박씨세보에 의하면 중시조 박영은 고려조에서 첨의정승에 오른 박원정(朴遠挺)의 둘째아들로 부정(副正)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현재의 충주인 중원경에 세거하였으므로 본관을 충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 와서는 권신이었던 임견미의 전횡을 탄핵한 것으로 유명한 개성소윤 박광리(朴光理)가 있으며, 그의 아들 박진은 사헌부 감찰을, 둘째 박소는 은산군사(殷山郡事)를 지냈다.

조선조에서는 박효함이 있는데, 그는 청주목사를 거쳐 강릉대도호부사에 이르렀다. 또 박지흥의 세 아들 박정(朴禎), 박상(朴祥·청백리녹선), 박우(朴祐)는 도덕 문장가로 유명하다. 특히 사암 박순(朴淳)은 충주박씨가 자랑하는 명덕재상이다.

일찍이 이황이 극찬했던 박상은 성격이 활달하고 도덕이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성격으로 그는 여러 번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중종 때 담양부사로 나갔다가,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상소했다가 왕의 진노를 사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의빈부 도사를 지냈다.

권신이었던 심정이 양천에 소요당을 짓고 현판을 걸려고 할 때, “반산(半山)에 음식상을 차렸고 가을 추학(秋壑)에 술잔을 열었도다”라고 풍자했다. 반산과 추학은 중국 송대의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과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둘은 송나라를 망친 대신으로 유명하다. 박상의 아우 박우는 중종 때 우승지를 지내다가 김안로가 권세를 부리자 스스로 남원부사로 나갔다. 후에 해주목사와 대사성을 거쳐 명종 때 전주부윤과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충주박씨의 유일한 상신이었던 박순은 청백리로 이름이 높은 박상의 조카이며, 개성유수를 지낸 박우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서경덕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시(詩)·문(文)·서(書)에 뛰어났다. 그는 격심한 동서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14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옹호하다가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그는 명종 때 대사간에 있으면서 권신이었던 윤원형과 요승 보우를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그는 우의정에 있을 땐 명나라 신종의 등극을 하례하는 사신으로 갔었다. 대궐 옆문으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배신(培臣)이 출입할 때에, 혹 표문을 받들고 왔다면 황제에게 바칠 것인데, 어찌 옆문으로 들어간단 말인가”라고 하여 정문 출입 허가를 받아냈다고 한다. 이렇듯 그의 행동이 담대하고, 경서의 깊은 뜻을 헤아려 행동했기 때문에 명종은 그를 가리켜 “박순은 송죽(松竹) 같은 지조가 있고 수월(水月) 같은 정신이 있다”고 했다.

그밖에 충주박씨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박광옥·고경명 등과 함께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무공을 세운 박희수(朴希壽·부사 박민제의 아들이었으나 박민중에게 입양)가 있으며, 박이룡(朴以龍)은 능성현령으로 갔다가 황간에서 창의하여 전쟁에 공을 세웠다.

박진영(朴震英)은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또한 함흥 판관을 거쳐 평안도사를 지낸 박해(朴海)와 인조 때 유탁의 모반을 공주진에서 진압했던 박홍우(朴弘祐)는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에 봉해진 박세화는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박동형(朴東亨)은 이인좌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에 책록되고 충원군에 봉군되었으며, 박주흠(朴周欽)은 공조참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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