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姓 씨氏 별 인구 수 (2015년-5년 단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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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姓 씨氏 별 인구 수 (2015년-5년 단위 조사)

관리자 0 1982

대한민국 성 씨 별 인구 수 (2015년-5년 단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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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姓氏)는 전통적으로 270여 개가 있다.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외국에서 귀화하여 생긴 성씨까지 합하면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한자로 표기할 수 있는 성씨는 1,507개이고, 한자가 없는 성씨는 4,075개로 조사되었다. 본관별 성씨는 2000년 4,179개에서 2015년 36,744개로 증가했다. 인구 1,000명 이상인 본관은 858개로 전체 인구의 97.8%를 차지한다.


성씨는 부계 혈족을 표시하는 문자로, 그 혈족이 사는 지역, 국가 이름과 밀접한 관계있고, 한자 뿌리인 갑골문자 발생 때부터 시작됐고, 현재 한국과 중국의 성씨 대부분은 노비 출신이라 해도, 상商나라, 주周나라 성씨에 부계 혈족 뿌리가 있습니다. 같은 혈족이라도, 나라를 세우거나, 큰 벼슬을 한 경우, 성姓에서 >씨氏로 새 문자로 표시하는데, 한국에선 신라 때, 왕실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도 왕, 어머니도 왕, 부모가 모두 왕인 진골 귀족이 존재했던, 근친 혼인 신라 마지막 여왕에서 알 수 있고, 고려 초기 태조 왕건 토착 호족과 연대를 위해, 많은 왕비가 있었고, 가문 권력 승계를 위한 배 다른 자녀 혼인도 있었으며, 새 국가가 창건 되면서 공신 중에서 성씨가 없던 하층민 출신에 성씨를 하사했는데, 중국과 교류가 늘어났고, 성씨는 혈족을 표시하는 문자, 동본이성 근친혼 예방 위해, 문자를 바꾸기 보단, 지역 분파를 표시하면서, 한국의 성씨는 중국처럼 바뀌지 않게 됐습니다.


한국의 성씨별 인구 수를 볼 때 참고해야 하는 것은, 조선 시대 1910년 민적법 시행 이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289만 4,777호 중 양반 가구는 5만 4,217호로서, 약 1.9% 비율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노비의 수 = 한영국은 1609년의 울산부 호적에서 인구의 47%가 노비임을 확인하였다. 노진영은 1606년의 산음현 호적에서 41.%, 1630년의 동 호적에서 34.5%, 한기범은 1606년의 단성현 호적에서 무려 64.4%에 달하는 비중을 확인하였다. 일찍이 사방박이 1690년의 대구부 호적을 통해 확인한 노비의 비중은 44.3%이다. 즉, 조선 시대 인구 50%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재산과 동일한 노비=노예였습니다.


조선 후기 신분제가 문란해지면서 상민과 노비들이 부역을 면제 받기 위해 족보를 위조하는 일이 허다했다. 고려 초기에는 가계를 기록한 보첩이 없었다. 따라서 향리에서 힘을 갖게 된 집안이나 신흥 문벌들은 자신의 조상을 얼마든지 바꾸고 이어 붙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 예로, 17세기 말 경상도에 살았던 노비의 후손들은 다수가 김해 김씨로 편입되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종래의 신분제가 없어져 성씨의 일반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일제에 의해 새 '민적법'의 시행으로 누구나 모두다 법적으로 성과 본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성이 없던 사람들이 새 성을 갖게 되자 호적 담당 관리나 경찰이 임의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고, 노비의 경우는 종전 주인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쉬운 인구가 많은 흔한 성씨로 편입되면서, 특정 성씨에 인구가 치중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성씨는 임금 성씨인 김,이,박 3 성이고, 임금 성씨는 권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손이 번창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구가 많기도 합니다.


최근엔 질병 예방 건강 위해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있고, 비용도 저렴한데, 조금 더 추가 신청하면, 자신의 진짜 성씨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는 자료 축척 하는 곳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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