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건국과 경주정착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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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건국과 경주정착 경위

관리자 0 1906

신라(新羅)건국과 경주정착 경위 



아래글은 박혁거세의 출자(出自:어디에서 기원했는가)와 신라건국에 관한 글입니다. 


중요한 논지(論指)는 박혁거세는 지금의 몽골과 북부중국지방인 황하 상류 근처에서 살던 고대민족인 동호족(東湖族)에서 나온 오환족(烏丸族)이며, 인근의 흉노족에게 크게 패하여 그 무리중 일부가 혁거세의 아버지인 우거수에 지도하에 훙노족과 전란을 피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쳐 지금의 서울(서라벌)에 정착하였고, 혁거세 사후 인근(한강유역)의 백제의 전신인 십제(十濟)와 평양근교의 낙랑등과 다투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충북지방과 경북의 상주지방을 거쳐 경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박혁거세는 처음부터 오늘날의 경주(慶州)에서 탄생하여 신라를 건국한걸로 압니다. 그러나 시조탄생설화는 문자가 아직 발달하기전 그분의 존엄성과 위대성 그리고 신비성을 제고(提高)할 목적으로 후세의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다소 윤색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신화속에는 역사적 사실이 은유적으로 들어있게 마련입니다. 


삼국사기 혁거세조 기록에 보면 마한이나 십제(十濟) 말갈, 낙랑등과 외교,전투 관련사항들이 나옵니다. 당시 낙랑이나 말갈 그리고 십제등은 모두 지금의 평안도(평양),경기도(서울) 강원도 등지에 위치해 있던 것들입니다. 


경주에 위치했다면 이들과 접(接)하지 않았으므로 그들(낙랑,말갈,십제 등)과 그렇게 다투거나 할 수 없으며 또한 기록도 남지 않았겠죠. 


동호족(東湖族)은 선비족(鮮卑族)과 오환족으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거주한 지역에 따른 분류였습니다. 오환족은 자신들의 선조인 동호족이 흉노족에게 크게 패한 역사적 사실로 다시 흉노에 대적했으나 크게 패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그런 오환족의 한 지파(支派)가 혁거세의 아버지인 우거수(군장) 였고, 그 우거수가 이끄는 오환족 무리들이 만주와 한반도북부를 거쳐 오늘날 서울 근처에 정착했는데 마침 이곳에 고조선 유민들이 여섯개부족으로 나뉘고 거주하고 잇었고 이들과 연합 혹은 정복을 통해 서라벌(徐羅伐)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오환족의 한 지파인 혁거세 무리가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을 전해들은 오환족들은 계속 차례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쳐 내려와 합류하게 됩니다. 


박혁거세를 고대 지금의 몽골과 북중국인 황하(黃河)를 근거지로하는 오환족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여러 명칭(지명)과 풍속등이 오환족의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새라블(서라벌)-서울 

우거수 (오환족의 추장,군장,우두머리) 

혁거세 거서간(칸,汗,kahn)인 거서간은 오환족식 우두머리(首長) 명칭입니다 등등... 



1.신라(새라불)의 건국 


2천년의 대제국 단군조선이 망하고 부여(북부여,졸본부여)가 일어서면서 동북아시아는 힘의공백이 발생했고, 중국에서도 주(周)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소국들의 패권싸움으로 지새는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던 시대였다. 


당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은 말쥬신(馬朝鮮)의 관활지역으로서 몰락한 단군조선왕손들의 봉지(封地)역활이나 하는 낙후된 공지(空地)와 같았다. 


이때 전통적인 기마민족인 동호족(東胡族)은 황하(黃河)의 강변초원지대를 국경개념없이 이동하며살았던 황하문명을 일으킨 원조들로서 쥬신제국을 종주국으로 수두3神사상에 철저했으며 서쪽으로는 훈족(흉노족)과 화합하며 살았던 종족이었다. 


(우리 배달민족은 쥬신(조선)족을 원류로 부여족,동호족,크게 세종족이다.) 

그런데 흉노족의 수장 모돌이 쥬신제국이 망하는 틈을타 쥬신제국의 영토와 중국의패자 한(漢)나라까지 격멸하는등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됨에따라 동호족과의 결전이 불가피하게되었다. 


이때 동호족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한(漢)족과 힘을합쳐 살길을 찾는 선비족 (鮮卑族)과 끝까지 흉노에 항전하는 오환족(烏丸族)이다. (오환족은 내몽고 오환산으로 이주한데서 붙인 종족이름) 


B.C.87년 오환족집단의 우두머리 우거수(右渠帥)호공(弧公)이 흉노족과의 싸움에서 크게패하여 일부는 전한(前漢)으로 투항해버리고 호공이 이끄는 나머지 무리는 고구려건국전의 가우리땅으로 넘어오게된다. 

이들을 실라족이라한다. 

실라(新羅,SILLA)는 황하유역을 일컫는 당시말로서 지금도 몽고에서는 황하(黃河)를 실라로 부른다. 실라는 '새로운 땅 혹은 강'을 의미 


당시 가우리(고구려)는 이복형제간인 졸본부여의 고무서세력과 신흥세력 고주몽간의 싸움이 치열한 때인지라 우거수호공은 계속 남으로이동하여 아리수(한강) 북쪽에 자리를잡고 마한(馬韓)의 속국으로서 대실라건국의 첫발을 내딛게된다. 


B.C.57년 그동안 부족을 이끌던 우거수호공이 죽자 그의아들 불구래(弗矩內)가 13세의 어린나이로 수두(蘇塗)에나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거서간(居西汗)의 위(位)에오르니 이분이 바로 신라(新羅)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이시다. 

(불구래,혁거세는 '밝음'의 의미로서 하늘의 아들을 뜻함) 

혁거세 거서간의 아내인 알영부인은 역시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들어온 선비족 계열로 보고있다. 


불구래 거서간은 소불(서울)의 아리수(한강)북쪽에 성을쌓고 마한에 조공을 폐지하고 독립을선언하여 나라이름을 새라불(徐羅伐)이라 정하였다. 

(새라불은 새로운 강변터라는 뜻으로 실라와 같은의미임) 


불구래거서간이 이끄는 초기 새라불은 북방의전란을 피해오는 유민들을 아리수(한강)를 건너기전 소불(서울)에 안착시켜 큰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세력이커진 박혁거세는 49세때 마한의 왕이 죽은틈을타 일격에 쳐부수니 마한의 잔존세력은 곰나루(웅진;이때는 백제건국3년전)로 도망치고, 동시에 마한동쪽에있던 경기진한(辰韓)까지 공격하여 아리수의 패자(覇者)가된다. 

이로서 장차 신라(新羅)로 성장할 큰뿌리를 내리게되었고 소불(서울)에서 큰무라(경주)까지의 장정(長征)준비를 마친셈이되었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장정의뜻을 이루지못하고 경주근처에도 가보지못한채 65세의 나이로 죽었다.(B.C.5년) 


2. 새라불(신라)의 경주정착과정 


서기61년 혁거세의손자 새라불3대왕 노례(弩禮)이사금(尼師今)은 북쪽의 낙랑침범과 남쪽의신흥국 십제(十濟)의 북침에 못이겨 아리수를 십제에 양보하고 남으로내려가 낭자곡성(지금의청주)을 취득한다. 

서쪽평야지역을 갖고싶어 계속백제를 침공해보지만 번번히 실패하여 와산성 (지금의보은)으로 쫓끼다가 결국 소백산맥을 넘게된다. 


소백산맥을넘은 실라족은 사벌(沙伐;지금의 尙州)땅에정착하여 먼저와있던 신쥬신(辰朝鮮)의 유민 金씨집단과 합류하게된다. 

(우리는 경상도의 김씨집단을 원주민이라 부르지만 실은 북방에서 가장먼저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실라족과 쥬신족유민들은 다같이 북방에서 부여족(백제주류)에게 많은 핍박을 받은관계로 쉽게동화될수있었다. 그러나 백제천황은 이들의 사벌정착을 가만두지않았다. 


초기백제의 엄청스런공격에 실라족과 쥬신족 김씨집단은 온힘을합쳐싸우니 험악한 산세에 백제도 더이상 건드릴수없어 자연스럽게 소백산맥이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이되었다. 


겨우 백제의 추격을벗어난 새라불은 서기93년 사벌을떠나 고소부리(古所夫里)를 거쳐 이듬해 드디어 큰무라(建牟羅;경주의 북방)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곳엔 이미 석타래집단이 성책을쌓고 완강히 버티고있었다. 

석타래(昔脫解)는 오래전 진시황에게쫓겨 건너온 동이족으로서 

용성국(龍城國;대동강하류)을 세워 왕이되는데 원래 해상무역을위한 야철술(冶鐵術)의 명인이자 바다로부터 생명의안전을 비는 용왕이라 불리는 무당이었다. 


이 용성국이 낙랑의 침략을 받게되자 2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김수로왕이 있는 구야(拘耶;김해)(가야국의성립과정은 다음호에 살펴본다)땅에 상륙하여 김수로왕과 협상끝에 아돌포(阿珍浦;지금의감포)로 옮겨 알천(閼川)에 이서국(伊西國)을세우고 서울을 큰무라(建牟羅)로 정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김수로왕과 싸움끝에 석타래가 하서지촌(下西知村)으로 쫓겨 간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무라(牟羅)는 마을을 뜻하는 옛말로서 우리민족의 分國인 일본은 지금도 마을을 무라(村)라 부른다.) 


한동안 싸움으로 대치하던 朴,金씨측의 새라불과 昔씨측의 이서국은 협상으로 해결키로 뜻을모아 뱍(朴)씨계, 김(金)씨계, 석(昔)씨계의 군장회의를 열어 3성씨가 다같이 동참하는 연합공화정부를 세우기로합의하고, 나라의 왕위도 돌아가며 맡기로 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상상키어려운 민주공화정부 체제였다. 


따라서 3대 노례이사금(朴씨)다음의 4대왕은 석타래(昔씨)가 맡게되면서 큰무라 월성(月城)을 축성한다. 

박혁거세의 최초신라(도읍:소불)는 고구려와는 같은시기,백제보다는 40년앞서지만 경주에서의 박,석,김 신라는 백제보다 120년후에 이루어졌다. 

박씨족을 오환족(烏丸族)으로 인식하는 이론적 근거. 아래주소로 가보시면 보다 상세히 나옴. 



박혁거세는 인도인이 키웠다?


신화에 나타나는 우리말과 타밀어의 유사성, 힌두교문화의 흔적


지난 10월 말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BC69~AD 4)를 키웠던 진한 6촌장의 사로육촌 중 고허촌의 유적이 대량 발굴되면서 이들의 정체 규명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 왕궁에서 키워지다가 자력으로 만주지역에 고구려를 세우고,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난 지 반나절 만에 성인이 돼 보름 지나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사로육촌의 6촌장 손에 13년간 키워지고 나서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된다. 


진한 6촌장 인도 타밀 출신 추정


필자는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 및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설화 속에 언어적 유사성 및 해양교류 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인도 남부의 타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혁거세의 설화에 나오는 주요 명칭들이 당시 타밀어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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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나정. (경향신문)  3232235521_PkdlXfut_347ae36258217d4fb4ffb02754acbc797323e41e.jpg

인도 ‘공화국의 날’ 에 수도 뉴델리에서 낙타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이는 병사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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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하는 기원전후의 우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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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설화가 실린 삼국유사. 

 

 

더구나 윷놀이와 제기 등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도 타밀어 명칭과 놀이 형태가 완전히 똑같다. 박혁거세의 대부 격인 6촌장이 타밀 출신이라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도 남부 및 스리랑카 북부 출신으로 토론토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의 타밀인들 가운데 타밀인협회 및 여성단체 관계자, 힌두교성직자, 교수, 교사 등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타밀어 사전 및 역사서 등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는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서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 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의 알평은 아리야판(Aryappan)과, 자산 진지촌의 지백호는 치빠이코(Chippaiko)와,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는 구레마(Kurema)와, 금산 가리촌의 지타는 치타(Cheetha)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은 호친(Hochin)과 각각 일치한다. 


이들의 출신에 대해 학계에선 “이곳(서라벌)에 오래 전부터 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는 여러 역사서의 내용과 유물 등을 분석하여 박혁거세 및 6촌장 모두를 북방유목민출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박혁거세와 6촌 주민들이 북방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서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라고만 전해오는 6촌장 만큼은 허왕후나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당시 막강한 해상력으로 아시아 전체를 누비고 다니던 인도의 타밀 출신으로 추정된다. 


둘째, 박혁거세의 탄생지 근처에 있는 우물 ‘나정’은 타밀어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을 뜻하는 ‘나중(nazung)’과 거의 일치한다. 타밀어의 나주쿠(nazukku)는 “땅을 파헤쳐 이랑이나 도랑을 만들다”(=make a shallow furrow)라는 뜻의 능동형 동사인데 그 수동형동사 ‘나중구(nazungku)’는 ‘이랑이나 도랑이 만들어지다’ (=be ploughed with shallow furrows)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이라는 뜻의 명사 ‘나중(nazung)’이 바로 박혁거세의 우물 ‘나정’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8월 문화재청은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경주 시내 우물 나정을 발굴한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발굴팀은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나정의 정중앙 8각형 건물지(한 변 8m, 지름 약 20m) 주변에서 이 8각형 건물지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도랑, 즉 구거 같은 대형 구상 유적을 확인했다. 이로써 박혁거세가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로 자리매김된 것이라고 문화재청측은 설명했다. 


알영 부인 이름도 타밀이름과 유사


셋째,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는 현재 타밀 나두주(州) 땅에 있던 당시 타밀인들의 촐라 왕국 바닷가 마을 ‘부르구나이(Purugunai)’와 거의 일치한다. 필자는 신라 4대 왕 석탈해의 고향이 동서양 무역으로 크게 흥했던 고대 국제도시 나가파티남(Nagapattinam)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도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부르구나이가 있다. 박혁거세의 후견인 6촌장들이 이곳을 출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신들의 고향 이름을 박혁거세의 별명으로 붙여 막강한 영향력의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부르구나이는 현재 벨란간니(Velankanni)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가톨릭 교회 ‘안네 벨란간니(Annai Velankanni)’가 들어서서 명소가 됐다. 


넷째, 고구려의 주몽이나 가야의 김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나지만 혁거세의 알이 박에 견주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박은 우리말과 당시 타밀어가 그 발음과 뜻에서 똑같다. 박은 현대 타밀어로는 수라이라이(Suraikai)라고 불린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 등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인도에서 건너온 6촌장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 필수품 중 하나인 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타밀인들은 일년내내 무더운 날씨를 견디려고 박을 파낸 표주박 등으로 만든 물통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목을 축이곤 했다. 이 물통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리며 호리병박으로 만든 작은 물통은 수라이 쿠담(Surai Kudam), 호박으로 만든 큰 물통은 푸사니 쿠담(Pusani Kudam)이라고 칭한다. 


다섯째, 신라 이전의 나라 이름인 ‘서나벌’은 당시 산스크리트어 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밭(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 ‘벌’의 옛말이나 거센말은 ‘펄’인데 고대 타밀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아울러 ‘서라벌’도 ‘아름다운(nice)’을 뜻하는 ‘서라(Sora)’가 ‘벌(Pol)’과 합쳐져 ‘아름다운 들판’을 뜻해 새 나라의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민속놀이 명칭도 거의 비슷


여섯째,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BC 53 ~?)부인은 아리영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Ariyam)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Kaththabarayan)왕의 부인 이름인 데 이를 신라 초대 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알영부인이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는 내용도 인도 힌두교 신화에서 지혜와 총명의 여신(Goddess of Learning and Wisdom) 사라스와티(Saraswati)가 백조(swan)의 부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 알영부인은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추앙받았다는 것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 타밀인들이 사라스와티를 숭배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힌두교와 관련된 것들이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는 데 이들 모두 힌두교와 관련 있다. 힌두교의 주요신 시바(Shiva), 부인 파르바티(Parvati), 두 아들 가네쉬(Ganesh)와 무루간(Murugan)을 각각 고대 타밀어로 ‘이비가지(Ibigaji)’ ‘정견(Chongyon)’ ‘뇌질주일(Noejil Juil)’ ‘뇌질청예(Nojil Chongye)’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펴낸 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개정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곱째, 박혁거세왕은 재임 17년(기원전 40년)에 알영부인을 대동, 6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고 전하고 있다. 즉, 삼과 누에로부터 얻은 실로 길쌈해서 삼베옷과 비단옷 등을 해입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곡식생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다. 또 제3대 유리왕은 추석 때 길쌈놀이를 실시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경악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은 농경사회의 주요 명칭들을 다음의 비교표로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새해 첫날 우리가 즐기는 윷놀이, 제기놀이,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당시 타밀어로 각각 ‘윷노리(Yuddh, Yuth Nori)’ ‘제기노리(Jegi Nori)’ ‘추불 노리(Chupul Nori)’ ‘ 팡이 노리(Pamgi Nori)’로 불리며 그 형태도 완전히 똑같다. ‘놀이’는 고대 타밀어로 ‘노리(Noori), 또는 노루(Nooru)’로 불렸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빌햐야들(Vilaiyattu)’로 불린다. 다음의 비교표를 보면 타밀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웃 사람으로 느껴진다. 


고인돌 문화 인도에서도 발견 


현대 타밀어에서도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난(나), 니(니)””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바나깜(반갑다)” 난, 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모땅(몽땅)””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등 거의 똑같은 단어와 어구들이 적지 않다. 


이는 박혁거세 부부의 대부격인 6촌장들이 인도 타밀의 것을 한반도에 소개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 이전에 중국대륙을 통해 벼나 보리농사가 이미 도입됐다고 하더라도 농사 관련용어 및 민속놀이 등은 타밀출신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우리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박혁거세와 석탈해 등 신라 초기의 왕들의 난생설과 경주와 포항 등 신라지역에서 대거 발견되는 고인돌 등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인 한양대의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 등의 지리적 분포가 인도-동남아시아-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인도 문화의 영향을 시사했다. 김교수는 또 “신라주민은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중국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그리고 고구려에게 멸망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지적했는데 필자는 토착 농경인들을 이끌던 6촌장들이 타밀출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주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인도 남부 해안지대의 타밀인들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까지, 동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활발하게 진출하다가 대만 북쪽으로 흐르는 흑조 난류를 타고 북상, 급기야 한반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타밀인들은 사로 6촌 가운데 동해안과 접한 금산가리촌에 도착한 뒤 내륙으로 들어가 경주의 사로 6촌을 개척,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타가 통치한 영일만 부근 금산가리촌은 현재 동해안과 접한 경주시 감포읍과 양남면, 양북면 등 3개 지역 모두를 포함했다. 


또, 필자가 인도 타밀 출신으로 간주하는 신라 제4대왕 석탈해의 알이 담긴 궤짝도 동해를 표류하다가 동해안의 아진포에 당도하는데 이 곳이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라고 석씨전국대종회가 밝히고 있어 이래 저래 금산가리촌은 당시 인도 타밀인들의 도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경주 덕천리 유적 발굴작업에서 출토된 목관묘 11기와 청동기 항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그리고 매장된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알려주는 오리모양 토기 11개와 말과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고리 등이 당시 인도 타밀의 역사적 유물들과 비교, 추적해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6촌장들은 물론 박혁거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 


김정남〈타밀학회장·캐나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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