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할아버지와 아버지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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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할아버지와 아버지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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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아버지 (2회)

  제1장 내 고향 도라산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나의 존경과 사랑은 신앙에 가깝다. 1959년 4월 일흔 둘의 연세로 내 품에 안겨 운명을 하시는 순간에도 젊은 아들 걱정뿐이시던 아버지는 “내 죽어서도 네 머리 위에 언제나 맴돌면서 떠다닐 거다. 마음 놓고 세상을 살아가거라.” 하시며 내게 용기를 주셨다. 그때 그 말씀이 깊이 가슴에 박혀 나는 지금도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저절로 “아버지 도와주십시오.” 하며 아버지에게 기대곤 한다.


창원(昌原) 박씨(朴氏) 장단파(長端派)의 상징이시자, 100호 가까운 우리 동네 일가들의 수장이셨던 나의 할아버지는 장단이 배출한 석학(碩學)으로 문묘직원(文廟直員)이기도 하셨는데, 노후에는 도람산에서 글방댁, 글방 할아버지로 불리며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준수한 외모에 엄격하면서도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만신들에게 절하시면서 먹을 것을 벽장에 감추어두셨다가 손자ㆍ손녀들에게 몰래 내주곤 하시던, 정갈하고 자애로운 할머니 사이에는 아드님만 두 분이 계셨는데, 큰 아드님이 나의 아머지 박교준(朴敎駿) 씨이고 작은 아드님이 박교덕(朴敎德) 씨이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 할아버지의 45세손인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 ‘영’ 할아버지를 증시조로 한 창원 박씨  18세 손으로 1887년, 할아버지 박항묵(朴恒默) 공과 해주 오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태어나신 때는 국운이 쇠한 조선말의 혼란기였다. 영민하신 데다 성격이 진취적이셨던 아버지는 시골집의 할아버지 글방 교육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신학문(新學問)에 목말라하셨다. 당시 임진강에 철교를 놓기 위해 장단에 와있던 일본인 측량기사들을 찾아가 일본말과 측량기술을 배울 정도였다.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의지와 신학문 습득에의 열망은 결국 아버지를 서울로 올라오시게 하였다.


아버지는 구한말 대한제국의 탁지부에서 관원생활을 시작하셨다. 탁지부는 조선 후기의 관청인 탁지아문(度支衙門)이 개칭된 곳으로, 당시 국가의 재정, 토목, 산림업무 전반을 담당하던 부서이다.


아버지는 지방근무를 많이 하셨는데, 함경남도 도청에 근무하실 때는 그곳에 주둔하던 젊은 장교 신태영(申泰英) 대위와 절친하게 지내시며 술에 얽힌 일화를 남기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때의 일들을 내게 가끔 들려주셨는데, 흥남에 주둔해 있던 신 대위가 함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두 분이 술이 잔뜩 위해 말을 타고 눈보라 치는 벌판을 헤메어 다녔다는 얘기는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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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할아버지 박항묵(朴恒默) 공


그때의 신태영 대위는 훗날 우리나라 초대 국방장관을 지내신 분이다. 해방 후 혼란기를 지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4후퇴 때 장단에서 서울로 올라오신 아버지는 그 어려운 서울에서의 피난생활 중에서도 막내 아들인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어느 날 신당동에 있는 신태영 장관 댁에 나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기도 하셨다.


한번은 신태영 장관이 헌병을 앞세우고 장관차 비상등을 번쩍이며 누하동의 초라한 피난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오시는 바람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기도 했었다.


신 장관도 아버지도 돌아가셨지만 나중에 신 장관의 아드님이신 신응균(申應均) 장군과 나는 로터리클럽을 함께 하면서 가끔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로터리 리더이신 신 장군과 나는 그때마다 옛날 얘기와 함께 두 아버님 말씀을 나누곤 했는데, 신 장군은 나이가 한참 아래인 나를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해주셨고, 세상살이에 대한 많은 조언도 해주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 장군의 명복을 빈다.


가족을 살린 아버지 덕행


아버지의 숨은 덕행이 우리 가족을 살린 일도 있었다.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主事)이셨던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총독부 탁지부 판임관(判任官)이 되셨다.


아버지는 한때 평안북도 강계에서 근무하신 적도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압록강 뗏목 도둑을 단속하는 일이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다. 뗏목 도둑들은 대개 중국인이거나 일본인인 경우가 많았는데, 어느 날 잡혀온 뗏목 도둑의 우두머리가 똑똑하고 잘 생긴 한국사람이어서 고민을 하던 아버지는 이 사람을 몰래 빼내 방면했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는 서울로 피난을 갔고,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모시고, 장단 집에 그냥 남아계셨는데, 그곳에 갑자기 인민군 대좌 한 사람이 사병 몇을 데리고 나타나서, 아버지의 함자를 대며 찾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 남아 있던 식구들은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사태를 감지한 아버지가 숨어계시던 뒷방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인민군 대좌는 자기가 강계에서 잡혔다가 풀려난 그 뗏목 도둑이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그동안 그때 자기를 살려 준 분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장단이 고향인 아무개 씨라는 것을 알았고, 전쟁이 일어나 선봉으로 남한에 처내려오는 길에 장단을 지나며 아버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 대좌는 고마웠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쌀과 북어, 미역을 얼마간 우리 집에 억지로 놓고는 총총히 전선을 향해 떠나갔다고 한다.


그 사람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만약 아버지가 강계에 계실 때 그 사람을 모질게 대했다면, 우리 식구들은 그에게서 큰 화를 입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장단으로 돌아온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들으며 아버지의 숨은 덕행이 우리 식구들ㅇ르 살린 인과응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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