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개성 남대문극장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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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개성 남대문극장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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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남대문극장 (3회)

  제1장 내 고향 도라산




개성 남대문극장


아버지는 마지막 직장생활을 개성세무서에서 하셨다. 그래서 우리집은 도랍산 고향집에서 연천군 전곡으로 잠깐 옮겼다가 아버지가 통근을 하시기 편리한 장단역 앞의, 일본인 학교가 있는 개울가로 이사를 했다.


나아 두 누이동생도 장단 공립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학교 다니기가 좋았고, 장단의 당거리에서 살게 되니까 시골생활에 비해 모든 것이 편리했다. 이때는 가정적으로 비교적 안정이 될 시기로, 큰 형님의 큰딸인 조카 연순(延順)이가 개성여중에 입학을 해서 우리집에 와있는 바람에 아버지와 같이 개성으로 통학을 하기도 했다.


나는 가끔 아버지를 따라 기차를 타고 개성에 가곤했는데 개성역 광장 왼쪽에 있는 일본 가게 겸 음식점에서 일본 우동과 요깡(양갱)을 사먹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입에 군침이 돌게 한다.


또 하나, 개성에 갔다가 아버지가 늦게까지 근무를 하시거나 친구 분과 술잔이라도 나누시는 날이면, 그 짬을 이용해 남대문(南大門) 근처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는데, 그 재미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보기도 했다.


그처럼 영화를 즐겨보았던 어린 시절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싹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부치[馬淵] 씨     


아버지가 개성세무서에 다니실 때 장단 우리 집에는 가끔 ‘마부치’ 씨라는 일본사람이 손님으로 오실 때가 있었다. 그 분이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은 우리들이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와 그 분은 몇 시간 동안 마작(麻雀)을 하시고 저녁에는 항상 일본요리 ‘스키야키’를 드셨는데, 스키야키는 야채를 많이 넣고 간장, 설탕, 아지노모도로 간을 한 다음 얇게 썬 쇠고기를 얹어서 익히는 요리로, 우리는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부터 부엌 쪽을 기웃거리곤 했었다. 지금도 나는 일본에 출장을 가면 그때 그 맛의 기억이 떠올라 스키야키 집을 먼저 찾곤 한다.


마부치 씨는 가끔 아들을 데리고 올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에는 장단역에서 개성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사천(沙川)이라는 제법 큰 냇가로 나가 천렵을 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붕어와 수제비를 넣은 얼큰한 천렵국에 술을 드시는 동안 나는 마부치 씨의 아들과 뛰어놀다가 뒤엉켜 씨름을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어울리면서 우리는 친해지고 정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이 패망하면서 마부치 씨 일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난 1961년, 중계방송 관계로 일본에 갔을 때 나고야가 마부치 씨 고향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 몇 가지 흔적을 가지고 헤매어 보았지만 결국 찾을 수가 없어서 기권하고 말았다. 


그 후 40년이 지난 2002년 말, 이북(以北)5도청 모임에서 나는 뜻하지 않게 반가운 분을 만났고, 그 분과 마부치 씨에 대한 애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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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운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이)와 망원경을 든 마부치 씨


그날 나는 그 모임에서 개성이 고향이신 곽교신(郭敎信) 선생을 만났는데, 그 분은 나를 보자 그렇잖아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며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곽 선생은 우리 아버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곽 선생의 선친은 개성 곽 선생 댁에서 밤새워 약주를 드시면서 세상 이야기를 나누시기도 한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곽 선생은 그 어른의 아드님이 종세라는 것을 알고부터 한번 만나고 싶었다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곽 선생이 우리 아버님들처럼 한잔 하자는 바람에 우리는 술잔을 나누며 여러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자리에서 마부치 씨가 화제에 올랐다. 곽 선생은 마부치 씨가 개성 세무관계 협회 회장이셨던 것 같다면서 아주 멋진 일본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곽 선생으로부터 두 아버님과 마부치 씨의 술에 얽힌 얘기들을 들었다. 


묘목(苗木)사업과 아버지의 선견지명


아버지는 1940년, 우리나라 산야에 나무 심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시고 행동에 옮겼다. 대한제국과 일제 총독부의 탁지부에 근무하시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신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산천(山川)이 너무 헐벗었음에도 누구하나 나무를 심고 사방사업(砂防事業)에 나서는 이가 없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셨던 것이다.


머지않아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신 당신은 산에 나무를 많이 심지 않으면 후손이 큰 일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자, 고향 땅에 묘목을 심어 가꾸기로 하고 묘포(苗圃)를 대대적으로 일구기 시작하셨다. 도라산 마을에서 석포천을 넘어 백련리 야산과 거기 딸린 도까밭에 묘포를 일구시고 본격적으로 묘목 가꾸는 사업에 매달리신 것이다.


개성의 직장에서 퇴근을 하시면 곧바로 묘목 밭에 나가셔서 밤늦도록 일을 지시하시던 아버지는 너무 힘이 든 나머지 병이 나시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몇 중으로 바쁘고 힘드신 생활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가 몸이 불편해 쉬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동네에서 동원된 젊은 일꾼들을 전체적으로 지도, 감독하시면서 점심 준비도 해야 되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시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일 때, 내가 다니던 장단초등학교 4, 5, 6학년 전원이 우리 묘목밭으로 일을 나온 일도 있어서 그 무렵의 장단초등학교 졸업생들은 지금도 아버지가 하시던 묘목밭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B29로 불리는 커다란 폭격기가 임진강 철교에 폭탄을 투하 하는 바람에 임진강 철교 가까이에 있는 묘목밭에서 일을 하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산으로 뛰어올라가 나무 아래에 몸을 숨겼던 일도 있었다.


어는 날엔가는 개성여중에 다니는 우리 집에 와있던 장조카 딸 연순이와 함께 묘목밭에서 밤나무를 심고 있었는데, 연순이가 얼마 전에 보았다는 영화 이야기를 너무도 실감나게 해주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가 두고두고 놀림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아버지의 큰 뜻은 나라가 광복(光復)을 맞으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헐벗은 산야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우리 도까밭에서 자란 묘목들은 장단역에서 기차에 실려 전국으로 펴져 나갔다.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시고 헐벗은 국토를 푸르게 가꾸시고자 묘목밭에 정성을 쏟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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