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주말의 서울과 고향 왕래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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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주말의 서울과 고향 왕래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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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서울과 고향 왕래 (7회)

  제1장 내 고향 도라산




독사에 물리다


어느 토요일이던가, 장단역에서 내려 도라산 집으로 향하는데, 늦가을이라 날이 금세 어두워졌다. 사방이 깜깜해지자 겁이 난 나는 나보다 위인 조카 철수와 종낙이 형의 손을 꼭 잡고 가운데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마을 어귀나 다름없는 우리 집 능말밭이 있는 지금의 도라산역 근처에서, 발에 무엇이 물컹하고 밟히면서 발뒤꿈치가 뜨끔한 것을 느꼈다. 나는 소리쳤고 그때 담배를 피웠던 두 사람이 성냥인지 라이터를 급히 켰는데 큰 뱀 한 마리가 숲속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나를 업고 왔던 길을 되돌아 장단역전 병원으로 달렸고, 한 사람은 우리집으로 뛰어가면서 변고를 알렸다. 병원에 도착해 발뒤꿈치를 째고 독을 빨아내는 응급조치를 마치고 났을 때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는데, 내 곁에는 한 걸음에 달려오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걱정스런 모습으로 서계셨다.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운동화 뒤꿈치에 댄 고무판이 두꺼웠기에 그것을 파고 들어온 뱀의 독이 한번 빠진 상태에서 나를 물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을 뱀의 독은 무서운 것이어서 발 전체가 허벅지까지 퉁퉁 부어오르고 온 몸에 열이 나는 바람에 아주 혼이 났다. 장단의 공의(公醫)였던 윤만중 선생께서 그 바쁜 와중에도 우리집까지 여러 차례 왕진을 와주셔서 나는 무사히 나을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문 뱀을 잡아야 물린 내가 빨리 낫는다는 속설을 믿으시고 동네사람들과 며칠을 두고 근방을 뒤진 끝에 기어이 살모사 한 마리를 잡으셨다. 그 뱀을 내게 보이시면서 곧 나을 것이라고 안심시켜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의 도시락


토요일 날 저녁에 장단 집에 가면 다음 날 일요일에는 동네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았다. 자치기, 비사치기도 했고 개울가 넓은 잔디밭에서 옆 동네 아이들과 새끼줄로 만든 공으로 축구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여름에는 주로 대삼 웅덩이에서 개헤엄을 치기 일쑤였지만 어떤 때는 임진강 철교 밑까지 가서 헤엄으로 임진강을 건너기도 했다. 늦가을이면 참게 잡는 데를 쫓아다니다가, 시들해지면 지금의 통일촌 근방에 있었던 사과밭에 숨어들어 사과서리를 하기도 했으며 겨울이면 얼음 논을 옮겨 다니며 스케이트 타느라 해 지는 줄을 몰랐다.


그때 우리 집에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마작(麻雀)이 있었는데, 그것을 아버지 몰래 가지고 나가서는 철수 조카 집에서 엉터리로 마작놀이를 했던 기억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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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 추시는 어머니 (칠순 때)


나는 그러나 월요일이 되면 새벽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는데, 그런 나 때문에 어머니는 큰 고생을 하셔야 했다. 따뜻한 밥을 먹여 보내기 위해 새벽 세시쯤 일어나 아침밥을 지으셨고, 맛있는 아침상을 차려주시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어머니는 도시락에 밥을 두 사발씩 꾹꾹 눌러 떡처럼 담아 주셨는데, 그렇게 담으면 맛이 없다고 솔솔 피워서 담아 달라고 내가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막무가내이셨다. 자식에게 밥을 많이 먹이시려고 끝까지 떡처럼 눌러서 담아주시던 어머니 마음을 이제야 알 것만 같아, 그때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장단의 어른들


내가 중학교에 입학 했을 때쯤, 아버지를 찾아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몇 분의 존함(尊啣)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해방 후의 혼란기에 장단을 위해 애쓰시던 분들이다.


오풍근 선생님을 비롯하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김치권 단장님,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셨으며, 주치의나 다름없게 우리 가족의 건강을 살펴주시던 윤만중 선생님, 우리 일가 아저씨이기도 한 장단초등학교 박교만 교장 선생님, 아버지에게 국회에 나오지 말고 자기를 밀어달라고 자주 부탁하시던 백상규 의원님, 구새말에 사는 윤무중 군의 아버님으로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셨던 윤희명 선생님, 송서규 선배님의 아버님이신 송병세 선생님, 우리 집이 장단 역전에 있을 때 뒷집에 사셨고 나중에 종로경찰서 서장을 지내신 정중현 선생님 등이 자주 찾아와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셨다.


그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서울의 갑부이며 장단의 국회의원이셨던 백상규 의원은 납북된 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김치권 단장은 일본학교 밑에 있던 방공호(防空壕)에 끌려가 나와 국민하교 동기인 쌍둥이 아들 둘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나는 철사 줄에 세 사람이 묶여 무참히 죽은 모습을 수복 후에 직접 보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여러 날을 악몽에 시달렸었다.


늦둥이 동생 종방(鍾邦)이


그 무렵 우리 집에는 늦둥이 동생 종방이가 재롱을 부리고 있어서 때 아닌 웃음꽃이 피어나곤 했다. 종방이는 8.15광복 직전에 태어나서 대여섯 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지만 어찌나 잘 생기고 머리가 좋았던지 동네에서도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한 홍역에 결려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우리 집식구들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었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지순이 조카 등은 며칠이 지나도 눈물을 그치지 않아 오히려 우리 식구들이 달래느라고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잘 생기고, 기억력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사람도 잘 따랐던 종방이의 죽음은 한동안 우리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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