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한국전쟁의 발발과 필사의 탈출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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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한국전쟁의 발발과 필사의 탈출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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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과 필사의 탈출 (8회)

  제2장 한국전쟁과 청소년기




6월 25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전날 토요일에 장단 집에 내려온 나는 곤한 잠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때 6.25가 터졌다.


경복중학교 3학년 때다. 쿵쿵 대포소리가 멀리서 들려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기 위해 집밖으로 나가봤더니 동네 앞 석포천을 따라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 9시를 전후한 시간이었다.


38근처에 가끔 있었던 교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38선에서 50리쯤 떨어진 우리 동네 앞까지 포탄이 떨어지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라디오를 통해 북한의, 기습 남침이 알려졌다. 라디오에서는 우리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있다고 했지만 코앞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를 즉각 서울로 보내시고 당신은 서울 집에 남으셨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를 돌보셔야 했기 때문이다.


장단을 뒤로 한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는 거구리라고 하는 거곡리 쪽에서 배를 얻어 임진강을 건너, 파주를 거쳐 밤새도록 걸어서 서울 형님 집으로 피난을 했다.


일요일 새벽에 적막을 깨고 기습남침을 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남쪽 한국군에는 한 대도 없는 소련제 최신예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한국전쟁 초기의 참상을 우리나라 중심지인 광화문 주변에서 목격했다. 트럭을 타고 태극기를 펄럭이며 군가소리도 드높이 일선으로 투입되는 우리 국군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던 서울시민의 모습도 그곳에서 보았고, 곧이어 나타난 북한 야크기가 시청 앞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거리를 기총소사로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혼비백산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목격했다.


방송에서는 우리 국군이 인민군을 곳곳에서 물리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지만, 전쟁이 발발한지 사흘도 안 되었는데, 의정부, 미아리, 수색, 신촌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서울 사대문 안은 피난민들로 들끓었다.


6월 29일 새벽, 나는 다시 지금의 광화문인 중앙청 앞으로 나가 보았다. 북한군 탱크들이 일제히 용산, 노량진 쪽으로 포문을 향해놓고 있었는데 발포 명령을 기다리는 듯 분위기가 긴박했다. 일부 북한군은 지금의 정부청사 자리인 체신도장 담장에서 총살시킨 사람들의 시체를 치우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달리다가 총격을 받았는지 벌집이 된 지프타가 시신과 함께 나동그라져 있었으며, 피난 보따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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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발발 3일째인 6월 28일 북한 인민군의 소련제 T-34/85 탱크대가 시청앞을 퍼레이드 하고 있다. [출처 ; 유용원의 군사세계]


그 중에 우리 경복중학교 모자를 쓰고 흰 여름 교복에 교표인 ‘복(福)’자를 달고 쓰러져 죽어 있는 학생을 발견한 나는 몸이 굳어버린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학생은 치안국장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한 인민군이 한 말을 들었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25일 새벽부터 파죽지세로 남하를 거듭한 자기 부대가 동두천 가까이 왔을 때 드디어 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의정부까지 오는 동안에는 육박전도 여러 차례 치렀다고 한다. 그때 싸운 국군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바람에 한때 자기네들이 밀리기도 했는데, 육박전에서 총칼로 찌르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죽어가더라고 몸서리를 쳤다. 그 용감무쌍했던 국군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철모에 해골을 그려 넣은 백골부대원들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필사의 탈출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고 며칠 되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소집통보가 왔다. 나오지 않으면 제적처분 한다는 협박조의 통보였다. 할 수 없이 소집된 날 학교로 나갔더니 몇몇 붉은 학생들이 북한과 인민군을 찬양한 뒤, 1학년과 2학년은 집으로 보내고 3학년 이상은 수송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나도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는데, 수송국민학교에 도착하자 한 사람씩 호명을 한 뒤 의용군 지원 서류를 주며 서명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파랗게 질려서 무서워하는 학생들에게는 총 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아느냐며 자그마한 따발총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한 학생들은 방산국민학교로 옮겨 갔고, 나를 포함해 서명을 거부한 학생들은 다시 수송국민학교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숙명여자중학교로 이동을 시켰다. 또 다시 설득할 모양이었다.


나는 수송초등학교 문을 나와 숙명여중 쪽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때다 하고 옆으로 슬쩍 빠져나온 후 죽을 힘을 다해 승마장이 있는 쪽으로 내달려 도망쳤다.


금방이라도 뒤에서 소리치며 저놈 잡으라고 소리치며 뛰어올 것만 같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때 끌려가는 사람이나 끌고 가는 사람이나 내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나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나는 그 일을 신이 도와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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