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9.28 서울수복과 1.4후퇴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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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9.28 서울수복과 1.4후퇴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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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서울수복과 1.4후퇴 (9회)

  제2장 한국전쟁과 청소년기




장단에서 보낸 무서운 여름


제부동 형님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계속 내정신이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신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서둘러 장단으로 향하셨다. 오히려 북쪽으로 역 피난을 떠나게 된 것이다.


경의선 기차길을 따라 장단으로 향해 가는데, 그동안 전투가 치열했던 곳곳에는 우리 국군장병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인민군의 시체는 모두 치워서 그런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금촌역에서 문산을 향해서 가다보면 나오는 구름다리 언저리와, 그 앞쪽으로 넓게 펼쳐진 파주의 들녘에는 너무나 많은 시체가 쌓여 있어서 그 참혹함이 숨을 멎게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그곳을 지날 때면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게 된다.


나는 장단 집에서 그 무서운 여름을 숨어서 지내다가 9.28수복을 맞았다.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고 편안해지나 했더니 안도의 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우리 국군은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누이동생 정순, 경순이는 물론 몸이 안 좋아 장조카 관수와 함께 우리집에 와 있던 큰형수님까지 장단 집에 그대로 남고 나만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으로의 피난


내가 서울에 온지 며칠 되지 않아 1.4후퇴가 시작되었다. 나는 서울에 계시던 큰어머니를 모시고 조카와 함께 손수레에 이불과 먹을 것을 싣고는 꽁꽁 언 한강 인도교 밑을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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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후퇴 당시 얼어붙은 한강의 인도교를 건너는 피난민들 [출처 ;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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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출처 ; 오마이뉴스]


남태령고개를 수레를 끌고 억지로 넘었을 때, 과천 쪽에서 나타난 미군 비행기들이 피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중공군이 피난민 사이에 끼어 있어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총격을 가했던 것이다. 남태령고개 북쪽인 사당동 네거리와 남태령고개 남쪽에 있는 주막집에는 네이팜탄까지 투하했다.


우리는 그 주막집이 건너다 보이는 길 밑의 물 내려가는 토관에 숨어서 이 끔찍한 공격을 피했다. 비행기가 물러간 뒤 나와 보니 기총소사에 맞은 사람과 네이팜탄으로 인해 몸 한쪽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아비규환을 이룬 가운데 주막집 앞에 매어져 있던 소와 말들도 미쳐서 날뛰고 있었다. 완전히 아군과 중공군 사이에서 샌드위치 공격을 당했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우리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재촉, 고천을 지나 수원 지지대고개를 넘어 노송동까지 왔는데, 결국 중공군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할 수 없이 큰어머니 조카들과 헤어져서 남자인 나만 홀ㄹ고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학생복에 교모를 쓴채, 등에는 회색빛 담요와 쌀 조금, 그리고 밥지을 코펠 하나를 얻어 메고 발길을 재촉했다.


오산 근방에서는 심한 설사를 만나 고생을 했고, 펑펑 내리는 함박눈 속에 노숙을 하기도 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남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있어서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남하를 계속하던 나는 천안 바로 아래 서정리역 근방까지 와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천안의 아군 전선이 중공군을 물리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나는 중공군을 밀어 올리는 아군을 따라서 다시 북상을 하다가 수원 바로 아래 병점역까지 왔는데, 마침 덮개가 없는 열차가 남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같이 가던 피난민들이 모두 기차에 올라타기에 나도 그들을 따랐다.


그런데 기차가 대전에 도착하자 앞뒤에서 군인들이 올라타서는 피난민들을 모두 쫒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맨 가운데에 위치한 화물칸에 타고 있었는데, 앞에서 온 군인들은 내 앞 칸까지, 뒤에서 온 군인들은 바로 뒤 칸까지만 조사하고 막상 내가 탄 화물칸은 뒤지지 않아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대단한 행운을 만난 것이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기차는 대구를 지나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다. 내가 부산을 피난의 목적지로 삼은 것은 부산진구 수정동에 큰 조카 연순이의 시집이 있는데다가, 먼저 피난길에 오른 큰형님이 부산 서면의 유력자이신 이종선 씨의 댁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때문이었다.


부산에 도착한 나는 수소문 끝에 연순이 조카의 시집을 찾을 수 있었다. 수정동 언덕배기에 있는 일자(一字)집이었는데, 형님을 찾을 때까지 신세를 지기로 하고 그곳에서 부산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문을 닫은 마루에 보따리를 베고 누워있는데, 왠 겨울비는 그렇게도 많이 내리는지, 부산이어서 춥지는 않았지만 처량한 생각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청주(淸酒) 도가(都家)에서의 숙식


다음날부터 당장 형님을 찾기로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돈댁에 부탁해서 일하며 숙식을 할 수 있는 집을 알아보기로 하고 당장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나는 부산일보사와 국제신보사에서 신문을 받아가지고 관해에서 초량, 부산진, 서면까지 뒷길을 달리며 신문을 팔았다. 한 일주일가량 신문팔이를 했는데, 어느 날은 한분이 신문을 몽땅 팔아주셔서 크게 감격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분의 경복의 선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뒤 바로 큰 점포의 서사자리를 사돈댁에서 알선해주셔서 나는 뛰어다니지 않고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진 시장 바로 앞, 큰 길가에 있던 이 점포는 정종이라고도 불리는 청주 도가였는데 창고에서는 콩나물을 많이 길러 콩나물 도가도 겸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하는 일은 시간 맞춰 콩나물에 물을 주고 콩나물을 솎아서 큰 그릇에 담아 도매(都賣)형태로 파는 일이었다. 청주는 마산(馬山)에서 나무통째 운반해와 다시 병에 담아서 파는 것이었는데, 호스를 나무 통에 넣고 입으로 빨아서 병에 담곤 하는 바람에 나는 청주맛을 알게 되었고, 좋은 술과 나쁜 술을 나는 곧잘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내게는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청주를 구별할 줄 알고, 일본에 가서도 각 고장의 정종을 찾아서 마시는 버릇이 있는데, 피난시절에 얻은 노하우를 아직까지도 써먹는 셈이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마산 청주는 꽤 맛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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