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귀향,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 (10회)

종친칼럼 Wide & General Knowledges
홈 > 이야기마당 > 종친컬럼
종친컬럼

※ 회원 가입한 종친들의 이야기 공간입니다. 

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귀향,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 (10회)

관리자 0 434

 귀향,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 (10회)

  제2장 한국전쟁과 청소년기




인천(仁川)의 연순이 조카집


나는 할 수 없이 인천 금곡동에 살고 있는 연순이 조카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연순이 조카는 방 하나를 얻어 피난살이을 하는 형편이어서 나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건넌방에 하숙을 하고 있는 자기 시동생과 한방을 쓸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분이었다. 그 시동생은 인천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나는 그곳 인천 금곡동에 잠시 머물러 살게 되어 인천고교 또래들과 근처 창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도 하고, 모여 앉아 장래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빨리 학교에 복교(復校)를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일기도 하고, 한강이 뚫려야 장단 고향집에 갈수 있을 텐데 하는 조바심이 생겼지만, 한편으로 나는 이곳에 연순이 조카 덕으로 극장과 영화관에 원 없이 드나들기도 했다. 애관극장, 동방극장 등 참 많은 극장에서 마농, 풍구(風丘 - 바람 부는 언덕) 등의 명화를 그때 보았고 악극단 공연, 임춘앵(林春鶯)의 여성국극도 보았다.


그 당시 나는 17세의 사춘기였으니 당연히 인천에 있는 여학생들이 모두 천사처럼 예뻐보였다. 나는 다음에 커서 결혼을 하게 되면 필히 인천 여자를 배필로 맞겠노라고 혼자 다짐을 하기도 했었다. 


귀향,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


서울에 들어가는 것은 계속 금지되었고, 장단 고향에 갈 길이 막막해 나는 근심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연순이 조카와 아는 아저씨 한 분이, 김포 쪽으로 해서 강을 건너는 방법으로 장단에 갈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해주셨다. 과연 그 방법이 통할까, 반신반의하며 나는 길을 떠났다.

 

김포 끝자락,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이 삼도품이라는 데까지 간 나는 지금의 통일전망대 건너편 개풍군 쪽의, 그 넓은 바다 같은 강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강을 건널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개성 인근의 벌판에서는 그때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으로 멀리서 총성이 들려왔고, 우리 해병대의 고무보트가 삼엄한 경계 속에서 도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근처의 촌가에 들어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주인 아저씨는 나를 해병대 부대에 데려다주었고, 그곳의 부대 책임자는 내 교복과 교모를 살펴보더니 자기도 경복출신이라며 자정(子正)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부대에 찾아갔더니 대원 몇이 나를 고무보트 가운데에 태우고 개풍군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때 도착한 마을이 지금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한 전시(展示)마을이다. 그곳에서 해병대원들과 작별을 한 나는 장단 쪽으로 사천을 건너 내달려서 아침 10시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를 발견한 아버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시기만 하셨고, 누이동생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 도까밭에서 혼자 일을 하고 계셨는데, 나를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펄쩍펄쩍 뛰시는 것이었다. 어린 나를 홀로 피난 보내고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던지, 어머니는 무척 야윈 모습이셨다.


가족들은 그동안 계속해서 인편에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지내야 했는데, 피난민들이 수없이 굶어죽었다느니, 폭격으로 피난인파가 떼죽음을 당했다느니 하는 충격적인 소문들뿐이었다는 것이다. 총알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피난 보따리를 메고 달려가는 나를 보았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며칠 동안 자리에 눕기까지 하셨다 한다.


식구들은 나 때문에 너무나 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으로 잠을 못 이루신 어머니는 매일 밤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아들의 무사를 비는 것이 일과였고, 때로는 잿밥을 지어 바가지에 가득 담아 가지고는 들에 산에 뿌리며 비명횡사한 전쟁 귀신들을 달래기도 하셨다고 한다. 오직 아들의 무사귀환 만을 비신 것이다.

 

3d4f94eb879ff28eb4ff83b412043ca5_1604471202_1279.jpg
 

▲ 사춘기 때의 나


마지막 배


어머님 정성의 덕으로 무사히 장단 집에 온 나는 며칠 후 장조카 관수를 데리고 다시 인천으로 향하게 되었다. 관수는 장단에 큰형수님과 함께 왔다가, 어머니가 친정인 개성 집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홀로 남아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는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장단에서 임진강을 건너 서울 방면으로 나올 수도 없던 때였다. 할 수 없이 나는 개풍군으로 해서 강화도를 거쳐 인천으로 향하기로 하고 그때 일곱 살이던 관수와 함께 길을 떠났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어찌하여 개풍군 풍덕을 지나 영정포나루터 근처까지 왔는데,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부터 포소리, 기관총소리가 요란하더니 가까운 곳에서 소총소리까지 들려오는 것이었다.  


날이 밝으면서 국군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는데, 밤새 계속된 전투에서 후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모두들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우리가 묵었던 집 쌀독으로 몸을 숨기는 병사도 있었다.


너무나 놀란 나는 조카를 데리고 얕은 산 하나를 넘어 나루터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나루터에는 피난민과 군인들이 뒤엉켜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는데 강에는 작은 군함(軍艦) 하나가 떠있었고, 그 배가 국군이 이 지역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배라는 것이었다.


작은 체구에 어린 조카까지 데리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 배에 승선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때 군함 저쪽 끝에서 해군 한 사람이 나를 손짓해 부르는 것이었다. 조카를 끌고 그곳까지 가까스로 갔더니 그 군인은 줄사다리를 내게 던져주었다. 조카를 앞세워 뒤에서 밀어 받치면서 내가 겨우 배에 오르자 군함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함이라고는 하지만 경비정(警備艇)에 가까운 작은 선박이었는데, 그래도 기관총을 매달고 있었고 한쪽 끝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어쨌든 내게는 구세주 같은 배였다. 나는 나와 조카를 구해준 군인에게 고맙다고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지만, 말 한마디 나눌 사이도 없이 그 군인은 전투위치로 배치되었다.

 

개풍군에서 강화 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함정인, 우리가 탄 배가 양쪽 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하게 되었을 때, 개풍군 쪽에서는 박격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강화도 쪽에서는 국군이 개풍군 영정포구 쪽으로 기관포를 마구 쏘아대고 있었다. 우리는 격전의 한 가운데에서 다시 한 번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어야 했다.

0 Comments

Social Login

빠른 링크 Quick Links
사이트 현황 State 20180805
  • 현재 접속자 0 명
  • 오늘 방문자 997 명
  • 어제 방문자 1,015 명
  • 전체 방문자 672,170 명
  • 전체 게시물 798 개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