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서울 피난살이와 경복고 졸업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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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서울 피난살이와 경복고 졸업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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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피난살이와 경복고 졸업 (11회)

  제2장 한국전쟁과 청소년기




서울에서의 피난생활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그 군함에 타지 못했다면 나와 관수는 북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장단 집에 그대로 있었으면 나중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후퇴할 수가 있었는데, 큰일 날 뻔한 것이다.


강화도에 무사히 배가 도착하자 나는 우리를 살려준 고마운 해군 아저씨를 찾아 헤메었다. 가까스로 만난 그 군인은 “네가 경복 모자를 쓰고 경복 교복을 입고 있기에 비상 로프를 내려주었다”며 웃는 얼굴로 등을 두들겨주더니 말을 건넬 시간도 주지 않고 바쁜 걸음으로 가버렸다. 나는 훗날 경복 교지(校誌)에 이 이야기를 써서 알리고 고마웠던 선배를 찾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해 안타까웠다.


나와 관수는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 금곡동의 연순이 조카에게 갔는데, 그 뒤 곧바로 한강이 뚫려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보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동생은 임진강을 건너 이미 서울에 와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 가족은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오거리 아저씨, 당숙 댁에서 어려운 피난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당숙 댁 한쪽 모퉁이에 조그마한 가게를 지어 장사를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동대문시장까지 가셔서 좌판을 벌이고 떡을 파시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언덕 너머 자하문밖까지 가서 나무를 해다 방에 불을 때기도 하시는, 그야말로 비상생활을 계속 하셨다. 어머니는 나와 두 누이동생에게 험한 일을 시키지 않으시려는, 오로지 그 일념으로 그 억척을 부리신 것이다.


나는 그때 옥인동의, 한때 보안사령부로도 쓰였던 그 건물에 위치한 미군부대 SAC에서, 세탁담당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 부대에는 큰 형님도 다니셨는데, 나는 낮에는 미군부대 근무를 하고 저녁에는 덕수상고 자리에 있었던 동부훈육소 야간부에 다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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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수, 진수, 현수 조카와 세검정에서


그때 친구로 8군에 다니면서 같이 야간에 공부를 했던 김두홍(金斗洪) 군은 지금 캐나다에서 성공한 삶을 살고 있고, 그 동생 두만(斗萬) 군은 나와 가까이에서 지내고 있다.


또 한 사람 ‘위그아만’이라는 이름의 미군 대위가 있었는데, 나를 잘 봐서 그랬는지 자기가 주선해 줄테니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너무나 간절하게 말하는 바람에 한때 마음이 움직이기도 했었다. 그때는 피난 와서 어렵게 살고 있는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고 그 꿈을 접었지만, 두고두고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던 일이다.


어려운 피난생활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결코 흐트러지는 일 없이,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돕는 가운데 꿋꿋하게 살았다.


동생 정순(丁順)이 경순(庚順)이


어머니의 억척생활로 마침내 우리는 서울에 집을 갖게 되었다. 종로구 누하동 219의 3번지, 비록 판잣집 같은 작은집이었지만, 지금 나의 가호적(伽戶籍)의 본적이 된 집이다. 방 두개에 손바닥만한 가게가 딸린 이 누하동 집에서 어머니는 쌀도 팔고 장작, 구공탄도 팔면서 우리 삼남매를 키우셨다.


나는 경복고 2학년에 복학을 했다. 부산 피난학교 시절에 등록을 안 한 탓으로 입학 동기들이 3학년인데, 나는 한 학년 아래인 2학년으로 복교를 하게 되어 경복고 30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피난생활 중에 장단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오빠인 나와, 동생인 경순이 사이에 궂은일을 도맡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정순동생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정순이는 늙으신 아버지 뒷바라지와 어머니 장사일도 도우면서 살림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희생을 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번 보인 적이 없는 도량이 넓은 동생이었다.


결국 정순이 동생은 우리 삼남매 중에서 가장 아버지를 닮아 머리도 좋고, 영리한 편이었으면서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빨리 직업전선에 나가겠다며 꿈을 접은 것을 생각하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작은 동생 경순이는 매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옆에 있는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를 거쳐 이화여대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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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고 시절 이경환 선생님과


이경환 선생님과 장일준 선생님


나는 경복고 졸업반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 아이들 몇 명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생활로 학비를 벌었다. 그때 담임이시던 이경환(李敬換) 선생님은 별명이 ‘삶은 돼지’였을 정도로 허여멀겋게 잘 생기시고 따뜻하신 분이었다. 기하(幾何)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나를 자주 도우미로 불러주셨고 특별 지도도 해주신 잊지 못할 분이시다. 나중에 그 분의 따님이 아나운서로 내 후배가 되어 인연이 계속되기도 했다.


또 한 분, 유난히 나를 아끼고 귀여워해주시던 장일준(張日準) 선생님도 오래도록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분이다. 선생님은 경기고, 서울법대를 나오신 분으로 공민(公民)을 가르치셨는데, 훈육주임을 오래 하셔서 학생들이 한결 같이 무서워했다. 그런 분이 유독 나만은 늘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로 대해주셨다.


선생님은 사직공원 근처 필운동에 사셨는데, 가끔 등교하시면서 우리 누하동 집에 들러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가시기도 했고, 학교 때도 나를 기다렸다가 집에 오는 길을 함께 걸어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셔서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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