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대학 입학과 방송국 운영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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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대학 입학과 방송국 운영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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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과 방송국 운영 (12회)

  제3장 대학 진학과 방송국 입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입학


졸업반 때 나는 참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때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서 몇분의 교수들이 학교로 찾아와 영어, 국어, 수학 등을 자기네 학교의 입시 경향에 맞추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나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했는데, 너무나 걱정이 되어 두달 동안 독일어 학원에 다녔던 생각이 난다. 그것은 내 수험생활 중의 유일한 과외수업이었다.


대학진학을 두고 아버지와 나는 생각이 달랐다. 평생을 통해 관리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법과대학(法科大學) 쪽을 권하셨고, 나는 집안 형편의 어려움을 들어 졸업과 동시에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범대학(師範大學)에 진학을 하겠다고 우겼다. 결국 내가 뜻한 대로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아버지와 나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사범대학으로 향했다. 그런데 참으로 우연하게도 내 수험번호 121번은 경복중 입시 때의 바로 그 번호였다. 나는 합격을 확인하고 환호하면서 두 번씩이나 합격을 가져다 준 수험번호에 대해 어떤 신비로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지금까지도 121번을 행운의 숫자로 삼고 있다.


발표장에 뒤늦게 큰형님이 달려오셨고, 우리 삼부자(三父子)는 근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옯겼다. 두 분이 내 합격을 축하해주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곳에서 큰형님은 내게 말 한마디를 해주었는데, 어찌 보면 형이 아우에게 들려주는 일상적인 말이 될 수도 있는 그 말이 내게는 사회생활에서의 진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종세야, 이제부터 공부만 하는 것은 접어두려무나. 사회도 알고, 호연지기도 기르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면서 살아가기 바란다.”


이 말은 마음에 깊이 새겨져 내 대학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합창반에 들어가 윤태림(尹泰林)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CEO합창단을 만드는데 한 몫 하기도 했고, 연극반 활동을 할 때는 ‘순둥이’라는 작품으로 대학 연극경연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으며, 방송반에 들어가 방송경연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큰형님의 조언대로 나는 생활자체에 활력이 가득하도록 열심히 살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한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때 장학금을 받아 사기가 충천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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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사대에 입학한 경복 친구들 / 김인환, 한홍승, 백운택


학교 방송국 운영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물리과에 재학 중이던 박종옥(朴鍾玉) 선배를 부추겨서 학교에서 예산을 따냈고, 용두동 교사에 앰프시설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은 내가 방송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와 박 선배는 학교 건문 왼쪽 공간에 방송실을 마련하고 각 교실과 가로수에 스피커를 연결해서 본격적인 교내방송을 시작했는데, 아침에 30분, 점심시간에 한 시간, 오후 하교 시간 때 30분으로 하루 두 시간을 방송하는 것이었지만 준비하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여러 가지 어려움도 뒤따랐다.


내가 스튜디오 안에서 방송을 하고 밖에서 박 선배가 기계를 조작했는데, 방송 프로그램은 음악과 간단한 교내소식, 명작 낭송 등으로 꾸며졌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며 온갖 정성을 다했던 이 시절에 나는 방송의 기술에 대해 꽤 많은 것을 터득했다.

 

서울대학교 전체 체육대회가 열릴 때면 아예 방송시설을 서울운동장으로 옯겨 중계방송을 하기도 했다. 우리 사대는 여러 종목에서 결승 상대로 공대(工大) 팀과 만났는데, 운동을 잘 하는 공대와 사대의 체육과 팀들이 결승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나와 전영우 선배가 사대 아나운서였고, 공대 쪽에서는 나중에 공보부(公報部) 이인관 서기의 사위로 정통부(情通部) 장관도 지낸 서정욱 씨가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아나운서 실력은 분명 이쪽이 나았지만 상대가 공대여서 스피커 성능은 그쪽이 우세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가끔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한 박종옥 선배, 전영우 선배, 서정욱 장관 등과 만나면 그때 이야기로 웃음을 나눈다.


대학 2학년이던 1856년 말, 몹시도 추웠던 그 겨울에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대강당에서 ‘플레이보이’라는 연극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그 무렵 나는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고, 연극준비에도 최선을 다해야 했으며, 학교에서 전차를 타고 광화문까지 가서, 내가 광화문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댁의 손자 공부를 한 시간 쯤 봐주는 가정교사도 해 야했다. 나는 몇 가지를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그때부터 몸에 익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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