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중계방송과 대한뉴스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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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중계방송과 대한뉴스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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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방송과 대한뉴스 (15회)

  제3장 대학 진학과 방송국 입문




생애 첫 중계방송


1958년과 1959년에 나는 내 생애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맞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향후 ‘박종세’ 하면 ‘야구(野球)중계방송’과 ‘대한뉴스 해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두 가지의 시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나의 첫 야구중계 방송은 동대문에 있는 서울운동장 메인 스타디움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일본 프로야구계의 신화적인 존재가 된 장훈 선수가 재일동포 고교선수 대표로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고교 대표와 경기를 하는 실황을 중계방송 한 것이다 .


메인 캐스터는 윤길구, 황우겸 아나운서였고 나는 경기 시작 전에 양쪽 선수 오더를 소개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그때의 정경(情景)이 지금도 가끔 꿈에 보인다.


1958년 당시 서울운동장 야구장 확장공사의 마무리가 안 된 상태여서 야구경기와 중계방송은 주로 용산에 있는 미8군 야구장과 육군야구장에서 이루어졌는데, 나의 첫 번째 야구 방송은 서울운동장의 축구장에서 시작되었다.


축구 골대를 뽑아낸 운동장에 육상경기에서 쓰는 ‘허들’을 일렬로 세워 외야 펜스로 삼고 동쪽 끝의 아래쪽에 홈베이스를 만든 원시적인 시설에서 치러진 대전(對戰)이 내가 야구 경기에 첫 입을 뗀 경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길고 긴 나의 야구중계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대한뉴스 해설


그 무렵 공보처 김영권 국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대한뉴스 해설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대한뉴스 해설은 강찬선 선배가 해왔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해설자를 뽑기 위해 국립영화제작소 관계자들이 방송 뉴스를 들어보며 고심한 끝에 나에게 맡기기로 최종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국립영화제작소 녹음실에서 예비 녹음을 해 본 후 본격적으로 대한뉴스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대한뉴스 해설의 제작은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아나운서가 스튜디오 안에 감독과 함께 들어가 손짓에 맞춰 해설을 하고, 밖에서는 메인 기술자가 10분짜리 36밀리 녹음테이프를 걸어놓고 믹스를 하는데, 그때 한쪽 디스크에 걸린 음악과 효과, 그리고 멘트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화면에 맞게 10분 동안 돌아 믹스가 되어야 OK사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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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야구중계 방송 / 박준병 엔지니어와 


내가 아무리 제때 화면에 맞추어 아나운서 멘트를 멋들어지게 했다 해도 음악과 효과가 삐끗 한다던가, 메인 기술이 믹스를 잘못하면 삑 하는 NG소리가 울리고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9분이 넘어 거의 다 되어 가다가도, 오류가 발생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이어서 OK사인이 날 때까지는 전 스태프가 마음을 졸여야 했다.

 

10분 동안 읽을 원고가 100장 가까이 되고, 그것을 화면에 맞게 글자 하나하나를 자고저(字高低)에 맞추어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화면에 맞도록 감정까지 넣어야 했으므로 10분 작업으로 기운이 다 빠지곤 했다.


음악 따로, 효과 따로, 아나운서 멘트 따로 하여 믹스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당시에는 그런 방법으로 녹음할 기술이 없었다. 녹음 기술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것도 하나씩 하나씩 느린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영화제작소 관계자들은 이처럼 초보 단계의 녹음시스템 아래에서도 감정을 살리며 정확하게 원고를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아나운서를 찾다가, 나를 적임자로 지목했던 것이다.


방송이 끝나면 나는 영화제작소로 향했다. 나는 그곳에서 대한뉴스, 문화영화, 기록영화 등의 해설을 했는데, 어떤 때는 청와대 경호실, 보안사령부, 정보사령부에도 불려가야 했고, 중앙정보부에 들어가는 손도장을 찍은 후 비밀 영화 해설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이 밀리는 바람에 밤을 새워 녹음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그 시절 대한뉴스는 양후보, 정연주, 강신규, 정기창 씨가 기술을 담당했고, 정연구, 강래식, 강대철, 윤성기 씨가 감독을, 음악효과는 김용환, 정연주, 백명재, 최형래 씨 등이 맡았었다. 모두 다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견을 가진 분들이었다.


대한뉴스 해설이 계기가 되어 나는 나중에 국방부 홍보관리소에서 제작하는 ‘국방뉴스’, ‘배달의 기수’ 해설도 맡게 되었는데, 국방뉴스를 1966년 1월의 1호에서부터 1996년 4월의 1,469호까지 장장 30년간 해설을 맡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나는 국방뉴스와 함께 각 TV방송국에서 방송했던 배달의 기수를 비롯하여 각 군(軍)에서 제작하는 특집, 월남 파병에 따른 특집, 예비군 관계 특집 등 특히 군 관계 홍보영화 해설을 많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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