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이강석(李康石)과 조병옥(趙炳玉) 박사 (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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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이강석(李康石)과 조병옥(趙炳玉) 박사 (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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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李康石)과 조병옥(趙炳玉) 박사 (17회)

  제3장 대학 진학과 방송국 입문




이강석(李康石)과 M아나운서


나는 여기서 이강석 군과 얽힌 얘기를 하고 싶다. 이강석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다. 1959년, 그러니까 4.19혁명이 일어나기 한해 전의 12월은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이강석은 그 혹독한 추위를 마다않고 남산 KBS 방송국엘 자주 찾아왔다.


육군 소위 신분이던 그가 KBS를 자주 찾은 이유는 미모의 M아나운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간에서 황태자로 불리는 그를 M아나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M아나운서는 당시 국회부의장을 지낸 유명한 야당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강석은 군복을 입은 채로 말을 타고 오기도 하고, 지프를 타고 오기도 했는데, 그를 맞는 아나운서실은 언제나 냉랭하여 그때마다 그는 여간 거북해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나는 가끔 그를 상대해주었는데, 같이 옥상의 리셉션홀로 가서 애기를 나눌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내 앞에 자신의 도시락을 풀어놓기도 했는데, 그때 그의 도시락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싸준 것으로, 보통 가정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샌드위치’였고 거기에 몇 개의 바나나가 들어있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샌드위치와 바나나를 한쪽씩 나누어주기도 했고, 어떤 때는 아예 내 도시락과 그 맛있는 경무대 도시락을 바꾸어먹기도 했다.


의외로 강직한 면이 엿보이던 그는 관심조차 안 보이는 M아나운서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얼마 후부터는 아나운서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곧이어 4.19가 일어나고 1960년 4월 28일, 나는 그가 부모와 동생을 차례로 쏘고 자결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나는 큰 충격에 빠졌지만, 내가 느꼈던 이강석 군의 성격으로 봐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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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복차림의 이강석 군과 함께 


부흥(復興)과 복흥


1960년은 벽두부터 정국이 몹시 시끄러웠다. 3.15 대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당 후보는 물론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야당에서는 신파(新派)와 구파(舊派)의 갈등 속에 가까스로 유석(惟石)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후보로 결정이 되었다.


대통령 후보들은 방송국에 와서 선거연설을 했고, 연설 내용을 그때 처음 도입된 녹음테이프에 담았다가 20분씩 방송을 내보냈다.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해온 조병옥 박사는 이 선거방송을 위해 남산 KBS 연주소(演奏所)에 나오셨고, 마침 내가 소개 담당이어서 스튜디오로 모시고 들어갔다. 마이크 앞에 앉은 조 박사는 예의 나비넥타이를 맨 채였고 호상(虎相)에 위엄이 뚝뚝 흘렀다.


내가 대통령 후보 조 박사의 방송이 있겠다고 소개를 하자, 그는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원래 사자후(獅子吼)로 유명한 분이 아니던가. 그런데 중간 쯤 가다가 부흥(復興)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조 박사가 그 단어를 ‘복흥’이라고 발음을 하시는 것이었다.


한번이면 그런대로 지나칠 수도 있겠는데, ‘나라를 복흥하려면......’ 하는 식으로 이 실수는 몇 차례 계속되었다. 나는 물론 밖에 있던 PD, 조 박사를 수행한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간에 어떻게 할 수는 없어서, 방송이 끝나자마자 나는 조심스럽게 조 박사에게 다가가, “녹음을 한 번 다시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말씀 드렸다.


조 박사는 왜 그러느냐고 하시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복흥’이라고 하신 것을 ‘부흥’이라고 해서 다시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자 나를 한참 바라보시던 조 박사는, “내가 복흥이라고 했으면 복흥이야!” 하시면서 벌떡 일어나시는 것이었다.

 

밖에 있던 PD, 관계자들도 다시 한 번 녹음을 하시라고 했고, 녹음기라는 것은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조 박사는 끝내 그냥 방송국을 떠나시고 말았다.


결국 그날 저녁 선거연설은 수정 없이 그대로 전파를 탔고, 방송이 나가자마자 전화가 방송국으로 걸려오기 시작했다. 학자 한 분은 두루마리에 복흥, 부흥에 대해 자세히 쓴 글을 보내면서 이런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이끌 대통령에 출마했느냐고 일갈을 하기도 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연희전문을 나와 미 컬럼비아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당대의 석학(碩學)이 그 글자 구별을 못하실 리 없고, 연설을 할 때 원고를 읽는 체질이 아니어서 잠시 실수를 하신 것 같았다. 방송 생활을 시작한 후로 그런 사례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 뒤 조병옥 박사는 지병의 치료를 위해 도미(渡美),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선거를 1개월 앞둔 그해 2얼 15일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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