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박정희 장군과의 조우 (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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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박정희 장군과의 조우 (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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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군과의 조우 (19회)

  제4장 정치격변과 고교야구중계




박정희 장군과의 조우


나는 그들과 함께 보도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는데, 계단 앞에서 군모의 별 두개가 유난히 선명한 군 장성 앞에 세워졌다. 그 장성은 대뜸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잠시 그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그는 스타카토의 말투로 “지금 나라가 너무나 어지럽소.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서 북 학생들과 만나겠다고 하지를 않나, 국회는 매일같이 싸움질만 하고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소. 그래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군이 일어섰소. 5시에 이것을 방송해줘야겠소.”


하면서 전단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전단을 받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것은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로 앞부분이 시작되는 혁명공약이었다. 혁명공약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


북한군이나 여순사건 같은 정체불명의 군부대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나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혁명공약이 적힌 인쇄물을 내게 건넨 뒤로는 박정희 장군은 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몇 마디 더 보태면서 나를 설득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은 진지했고 조리가 있었다.


그런 긴박함 속에서도 위험에 처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사였을까. 박정희라는 박(朴) 자(字)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종 씨 시군요.’ 하는 말을 목구멍에서 억지로 참았다. 그러다보니 떨리는 가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작은 여유도 생겼다.


나는 용기를 내어, “박 장군님이 직접 방송하시고 제가 소개 멘트를 해드리면 안 될까요?”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장군은 “박 아나운서가 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단호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사라진 엔지니어


그런데 곧이어 내가 10년 감수하는 문제가 벌어졌다. 그때 시간이 4시 40분으로, 5시까지는 당장 2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엔지니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옆에 서 있던 이석제 중령에게, “저 혼자서는 방송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엔지니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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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나

 

그때부터 방송국 건물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방송국에 들어와 있던 5.16군들은 엔지니어를 찾으라는 긴급명령이 내려지자 건물의 구석구석, 하다못해 공개 방송실 의자 밑까지 뒤지며 난리를 쳤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방송국 내의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 날의 담당 엔지니어인 한영식 씨와 임시현 씨는 우리가 아래층에서 5.16군의 난입으로 떨고 있을 때, 2층의 주조종실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방송국 뒷담을 넘어 명동 쪽으로 피신을 했던 것이다.


방송시간은 다가오는데 기술담당 직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군인들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큰 키에 우락부락한 용모를 가진 한 사람이 “아나운서가 다 되는 거 아냐? 5시에 방송 안 나가면 당신 죽을 줄 알아!” 하면서 철커덕 권총을 장전하여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그가 나중에야 옥창호 중령인 것을 알았다. 그는 그 큰 군화발로 복도를 쾅쾅 울리며 윽박질렀고, 나는 현기증이 일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동창 김기주 기자는 훗날, 그때 내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까지 조마조마했었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5시 5분전, 그야말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은 그 절박한 순간에 아래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엔지니어가 돌아온 것이다. 헐레벌떡 2층으로 뛰어올라오는 두 엔지니어를 보는 순간,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내 얼굴에 핏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 방송 상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지체 없이 메인 키를 울렸고, 남산연주소와 연희송신소(延禧送信所)까지 방송되는 타령(打令)이 남산연주소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 했다.

 

훗날 5.16 첫 방송 이야기를 쓴 5.16군의 주체 한 사람이, 이 타령이 울려 퍼진 상황을 묘사하면서 ‘박종세를 자기가 잡아와 방송을 시켰더니 덜덜 떨면서 애국가를 틀어야 할 순간에 민요를 틀었다’고 써서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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