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진실 (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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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진실 (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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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진실 (21회)

  제4장 정치격변과 고교야구중계




혁명공약 전단의 트릭


라일락 꽃 향기가 몹시도 진하던 5월의 그 새벽에 나는 잠시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국가와 민족의 명운이 걸린 군사혁명이 바로 내 입을 통해 전파를 타고 공식적으로 국내외에 선포되었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남산 연주소 2층에 있던 제7 방송실은 그 후 5.16방송 기념관이 되어, 내가 방송을 하느라고 떼는 자리를 표시하고 밑줄을 그은 원고가 사진에 넣어져 벽에 걸리고, 그때 사용하던 마이크와 그 당시의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한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혁명공약이 인쇄된 전단을 받아들고, 두려움 속에서도 실소를 금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 전단의 앞면에는 혁명공약이 인쇄되어 있고 뒷면에는 소설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5.16 전야에 종로구 안국동 광명인쇄소에서 비밀리에 혁명공약을 인쇄하면서 사장 이학수 씨의 지시로 한 면은 소설을 인쇄하여 그 면을 위로 가게 쌓아놓았었다. 소설을 인쇄하는 것처럼 트릭을 썼던 것이다.


9시까지 방송을 계속하고 있는데, 강창선 선배가 가장 먼저 출근을 해서 교대를 해주어 나는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 시각은 야전군 사령관인 이한림 장군과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의 움직임이 혁명군들은 긴장시키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절망의 소리까지 돌고 있을 때여서 퇴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방송국 현관을 나올 때 군인 몇 사람이 격려의 말을 건네 왔는데, 그 중의 한 장교가 걱정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지금 인천 앞바다에 여차하면 혁명군을 싣고 해외로 도피할 선박이 준비되어 있으니 박 아나운서도 함께 떠나자’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집이 누하동에 있다는 것도 안다면서, 유사시에 사람을 보낼테니 집에 가서 푹 쉬시고 있으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안심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못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걱정만 키웠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진실


나는 이렇게 5.16 첫 방송을 마쳤다. 그런데 훗날 수많은 사람들이 5.16에 관한 글을 쓰면서 첫 방송 장면의 묘사를 중구난방으로 해대는 바람에, 그런 글을 대할 때마다 혼자 쓴웃음을 짓곤 했다.


혁명주체들이 쓴 글에는 5.16 아침 방송국에서 저마다 나를 방송을 시켰다는 내용이 많았고, 심지어는 책상 밑에 숨어 있는 것을 발길로 차서 끌어냈다고 쓴 사람도 있었다. 박종세 아나운서가 너무 놀란 나머지 애국가틀 틀어야 할 것을 우리 민요 타령을 틀었다는, 방송 메카니즘을 모르는 얘기는 차라리 애교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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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내외에게 "그때 나 때문에 혼났지?"하고 말하는 박 대통령 


그 중에 시인 박목월(朴木月) 선생이 쓴 ‘육영수 여사’라는 책도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저자가 원고를 보여주며 고쳐달라는 부탁을 해왔기에, 첫 방송 장면을 사실대로 바로 잡아주었는데, 정정(訂正) 부분은 싹 무시하고 이전 원고대로 잘못된 묘사를 그대로 살려 책을 발간한 것이다. 발간된 책에는 첫 방송이 예정시간인 5시 정각에서 10분 정도 늦게 방송됐다는 엉터리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일 몇 초만 방송이 늦었어도 혁명이 실패한 것이 되어 혁명군 내부에 큰 혼란이 일었을 것이고, 총을 들고 설쳐대는 살벌한 혁명군이 내 목숨을 그대로 놔두었을 리가 없는데,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내용이 책으로 나온 것은 몹시 섭섭했다.


김형욱(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도 혁명 첫 방송을 언급하고 있는데, 나와 박정희 장군이 나눈 대화가 뒤바뀌어 있는 것을 빼고는 비교적 정확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조갑제 씨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5.16 첫 방송 부분이 꽤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당사자인 나도 놀랄 정도로 묘사가 정확했다.


기사를 읽으면서, 그때까지 안 나왔던 텔레타이프실 얘기라든가 박정희 장군이 나를 설득하던 대화 장면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취재 경위도 물을 겸 조갑제 씨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부재 중이어서 초준명 국장과만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 때문에 혼 났지?”


1972년, 김종필 총재 등의 추천으로 5.16민족상을 받게 된 내가 내자(內子)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 전에도 몇 번 청와대 초청을 받아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별 말씀이 없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날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박종세 씨, 그날 아침 나 때문에 혼났지?”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도 “왜 총을 쏘고 들어오셔서 모두를 놀라게 하셨습니까? 조용히 들어오셨으면 우리가 만세를 부르면서 맞이했을 텐데요.” 하고 농담 비슷하게 대꾸를 했다.


그랬더니 “너무 급해서 그랬어! 혁명군이 한강 인도교까지는 별일 없이 왔는데, 한강에서 대항하는 군인이 있어서 지체한데다 kbs남산 방송국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 돌격 명령을 내린 거야. 그렇지만 위험사격이었지. 총구는 모두 하늘을 향했으니까. 아무튼 미안했어.”


하시면서 크게 웃는 것이었다. 모두들 따라 웃었지만 나는 내 평생에 지워지지 않을 충격이었던 그날의 새벽을 떠올리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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