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도쿄 해프닝과 일본과의 경기 (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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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도쿄 해프닝과 일본과의 경기 (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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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해프닝과 일본과의 경기 (25회)

  제4장 정치격변기와 야구중계방송




도쿄의 해프닝


대만에서 경기를 마친 우리 선수단은 일본 도쿄로 왔다. 돈이 없는 선수단은 일본 YMCA 숙소에 들었고, 나는 그래도 미리 예약이 되어 있던 <프린스호텔>에 묵게 되었다.


달러가 너무도 귀할 때여서 선수단은 관광도, 쇼핑도 포기한 채 모두들 외출을 자제했다. 일본에 사는 친지가 찾아와 함께 나가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다다미’ 신세를 지거나 YMCA의 커다란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이나 죽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선수 몇이 거리에 나갔다가 호객꾼의 꼬임에 빠져 포르노를 보러 간 것이다. 그들은 골목을 돌아 돌아 어느 2층으로 안내되어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려고 하자 ‘야쿠자’들이 문을 가로막은 채 한 편을 더 보아야 한다면서 흉기를 꺼내 보이더라는 것이다.


야쿠자들의 위협에 어렵게 마련해간 달러를 모두 빼앗기고 나서야 놓여난 선수들은, 숙소로 돌아온 뒤 분이 안 풀려 다다미를 치면서 울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해프닝과는 상관없이 선수단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백인천 선수가 다른 선수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떨어져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내막을 알아보았더니 일본의 프로야구 도에이(東映) 팀에서 백 선수와 접촉을 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모두가 선배인 선수단에서 백 선수가 이상한 위치가 되고 만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선수들이 백인천 선수와 같이 앉기를 껄끄러워 해서 내가 같이 앉았는데, 용기를 갖고 일본 프로야구에 뛰어들어 보라고 격려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백인천 선수는 일본 프로야고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 파이터스) 포수로 가게 되고, 장훈(張勳) 선수와 함께 활약하면서 우리나라 야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드디어 일본을 누른 우리 야구


1963년으로 접어들면서 고등학교 야구붐에 이어 실업야구도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중계방송의 위력을 실감한 나는 고교야구 뿐만 아니라 실업야구 중계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는데, 이때 상업은행, 제일은행, 서울시청, 체신부 등 여러 곳에서 야구단을 창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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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천 선수와 나


우리 실업팀들은 일본 사회인 야구팀을 초청하는가 하면 미8군 영내에 있는 야구장에서 미국 군인 팀들과 경기도 가졌는데, 나는 이 경기들을 중계방송하기도 했다. 이 해에는 대학야구도 활발해서 우리 야구계 전체가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1963년 9월, 마침내 서울에서 제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우리 대표팀은,

감독  박점도

코치  김영조

투수  신용균(재일동포), 백수웅, 김설권, 최관수, 김창옥

포수  서정리(재일동포), 김금현

내야수  김응룡, 성기영, 오춘삼, 김희련, 박정일(재일동포), 하일

외야수  박현식, 배수찬(재일동포), 김삼용, 박영길

등으로 짜여졌다.


일본 팀은 사회인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세키스이화학(積水化學)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역대 최강팀이었고, 그밖에 필리핀 팀, 대만 팀이 모두 우승을 노리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그동안 이 대회는 일본의 독무대여서 어느 팀이나 일본 팀에게 한 차례라도 이겨보는 것을 목표로 삼을 정도였다.


9월 21일,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가, 증축(增築)으로 새 단장을 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 날은 관중도 2만 5천 이상이 들어 열기가 대단했다.


중계방송석은 야구장 백네트 뒤 꼭대기에 마련되어 있어서 운동장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지만, 운동장과의 사이가 너무 멀어 처음에는 투수의 구질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몇 번 중계방송을 하다보니 익숙해져서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관중들 함성이 운동장을 울리면서 중계방송 마이크에 흡수되어 극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대회의 일본 팀과 우리 팀 경기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 있을 정도로 감격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야구가 일본에게 너무 눌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팀과의 첫 경기는 재일동포 투수 신용균 선수와 포수 서정리 선수의 활약을 발판 삼아 5대 2로 승리를 거두어 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뿐만 아니라 중계방송을 청취한 국민들에게 우승의, 예감을 안겨주었다.


드디어 2차 리그가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 결승전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우리 팀은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하게 되는 좋은 조건이었다.


1차 리그와 마찬가지로 투수 신용균과 포수 서정리 배터리를 이룬 라인업이 소개되자 관중석의 열광은 시작되었다. 경기는 투수전의 양상으로 종반을 향해 치달았다.


신용균 투수가 일본의 막강타선을 꽁꽁 묶어 둔 가운데 1:0으로 이기고 있는 8회 초, 포볼로 나간 박현식 선수를 1루에 놓아두고 김응룡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앞 타석에서도 빨래줄 같은 타격으로 상대 투수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그는 유리한 볼 카운트를 만든 뒤 큼지막한 두 점짜리 홈런을 날리고 말았다.


나는 목청이 터져나갈 정도로 “홈런!”을 외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관중들의 환호는 그칠 줄을 몰랐다. 마침내 우리나라 야구가 일본을 물리치고 아시아의 패자가 되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이날 결승전은 3대 0으로 일본을 제압하고 우리나라가 우승을 했다.


나는 중계방송이라는 수단을 통해 방송이 일으킨 고교야구 붐이 대학야구, 실업야구로 이어지고 마침내 아시아 야구 우승까지 거머쥐는 결과를 낳은 것 같아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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