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동아방송과 동양TV (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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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동아방송과 동양TV (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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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방송과 동양TV (29회)

  제5장 텔레비전방송 시대의 개막




동아방송(東亞放送)과 나


1964년 5월,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나에게 동아방송(DBS)의 최창봉(崔彰鳳) 국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최 국장은 방송계에서 평소에 내가 존경하는 선배였는데, 만나자마나 동아방송 아나운서실로 당장 옮기라고 반강제적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했다. 최 선배는 성격이 워낙 그런 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어떨결에 동아방송으로 자리를 옯기게 되었는데, 최 선배와 면담을 끝내고 나오다보니 <박종세, 아나운서 실장 대우 차장>이라는 파격대우로 미리 발령을 낸 방(榜)이 복도에 붙어 있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리 발령이 나는 일은 동아일보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최창봉 국장과 전영우 아나운서 실장이 나를 끌어오기 위해 이 같은 파격인사를 단행했는데, 이 처럼 선배들에게 은헤를 입을 때마다 나는 인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곤 했다.


동아방송으로 옮긴 나는 전 선배와 정오뉴스에 이어 1시 뉴스를 진행했다. 당시 동아방송의 뉴스는 타 방송사보다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 동아방송의 뉴스는 그 당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반정부 데모가 매일같이 일어나 광화문 네거리가 하루 종일 경찰의 최루탄으로 뒤덮일 때여서, 뉴스의 내용이 그만큼 급박해지고 그에 따라 정부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정부당국에서는 동아방송 뉴스에는 의도적인 가시가 돋혀 있다는 판단 아래 이런저런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5.16혁명을 방송했던 박종세 아나운서가 ‘박 정권, 박 정권’ 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탓하고 데모대를 옹호하는 듯한 방송을 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박종세의 사표를 받으라는 노골적인 압력이 가해져 왔고, 나는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동아일보 이희승(李熙昇) 사장님은 나를 사장실로 따로 불러 위로하고 등을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었다.


결국 나는 6월 말로 동아방송에 사직원을 내고 동양TV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물론 동양TV가 개국하기 전의 일이다.  


동양TV에서 방송 제2기가 시작되다


동아방송에서 당국으로부터 사직압력을 받으며 두 달 가량을 버티고 있는데, 하루는 <아리랑>, <명랑>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는 잡지사의 최학준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내 방송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를 많이 쓴 기자로 평소 친분이 있던 터라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최 기자는 그 자리에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나에게 동양TV 개국 멤버로 참가하라면서, 개국 준비 책임자인 김규(金圭) 씨를 만나러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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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 방송부장과


나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설명을 하고 TV에 참여하라는 것이 무리라는 말을 했으나, 최 기자는 그것과 이것은 별개이니,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키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며 나를 채근했다. 우리는 술잔을 주고 받으며 격론을 벌인 끝에 김규 부장을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결국 나는 1964년 7월 1일, 국내 첫 민영 텔레비전 방송으로 출발하는 TBC-TV(동양텔레비전방송 주식회사) 개국 준비 멤버에 아나운서 과장이라는 타이틀로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출근은 신세계백화점 옥상에 차려진 동양TV로 했지만 TV방송국이 개국전이어서, 막상 방송은 광화문과 시청 중간에 있었던 동양화재(東洋火災) 빌딩의 <라디오 서울>에서 했다.


나는 그곳에서 최계환 선배의 정오 뉴스에 이은 1시 뉴스를 담당했으며, 야구 중계방송도 계속했다. 그렇게 나는 1964년이라는 내 인생의 격변기를 지나면서도, 단 하루의 끊김도 없이 방송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64년 12월 7일, TBC-TV의 개국과 함께 드디어 나의 방송 제 2기가 시작되었다. TV아나운서실에는 미스탐라 출신인 제주방송의 고려진 아나운서, 동아방송의 김동건, 윤미자 아나운서, 라디오서울의 주수광, 민창기, 이장우, 유옥자 아나운서 등 낮 익은 얼굴들이 모였다. 또 1기 아나운서로 성대석, 박혜자, 이강자, 조문자 등이 선발되어 방송에 임했다. 그리고 라디오 서울에서 최계환 선배, 박노설, 원종관, 이성화, 서기원, 박병학, 구박, 남정우 아나운서 등이 지원을 해주었다.


동양TV가 개국하기 전까지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방송장비가 문제였다. 방송법 때문에 장비 일체를 외국에서 들여오지 못하게 되자, 연주소는 물론 송신소의 장비까지 모두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강진구 기술담당 이사를 비롯한 모든 기술원들은 매일같이 청계천 공구상을 뒤져 기계를 두드리는 일이었다. 스튜디오 카메라도 RCA-TV 때 버렸던 것을 다시 구해오고, 그러려니 조명기구도 두 배는 더 밝게 해야 그림이 나올 정도였다. 중계방송차도 일본에서 쓰다버린 것을 얻어서 사용했다.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 끝에 12월 개국날짜는 맞추기는 했다. 개국 준비가 얼추 마무리 된 날, 개국 준비인력 40여명은 이제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회식을 했다.   

    

신세계 백화점 뒤 불고기 집에서 벌어진 회식에서 나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다가 완전히 취하고 말았다. 어떻게 택시를 타고 누하동 집으로 오긴 왔는데, 그때부터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식구들이 의사들을 불러오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는데, 그렇게 혼이 난 이후 나는 술을 조심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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