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여가와 가족이야기 (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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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여가와 가족이야기 (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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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와 가족이야기 (31회)

  제5장 텔레비전방송 시대의 개막




마작(麻雀) 멤버들


1965년이 되면서 아나운서실장으로 방송 일도 바빴지만, 대한뉴스 일도 만만치가 않아서 나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강행군의 연속으로 도무지 휴식이 없는 생활 속에서 나는 주변의 몇 사람과 작으나마 삶의 여유를 찾기로 했다. 국립영화제작소 감독이었다가 동양TV 개국 때 영화과장으로 나와 함께 참여한 김행오 씨와 제작소 영어 해설을 맡고 있던 박익순 씨, 음악녹음을 담당하고 있던 백명제 씨 등과 가끔씩 만나 마작을 하기로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마작을 하시는 것을 옆에 앉아 보기도 하고, 몰래 가지고 나가 동네 형들과 놀기도 해서 낮설지 않았지만, 정식으로 게임을 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멤버가 처음 마작을 시작한 것이 누하동 시절의 우리 집이었으니 우리의 마작 역사는 어언 40년을 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원칙을 중시하고 시간 관념이 강한 김행오 형이 리드하면서 시작해서 그런지 한 달에 한번 토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해서 약속된 8시를 넘긴 적이 없으며, 따도 2만원, 잃어도 2만원 선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마작이 끝나면 그 댁에서 차린 저녁을 들고 집안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지곤 했는데, 이제는 문안에 살던 마작꾼들이 모두 위성도시로 이사를 가서 한번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멤버도 변해서 김행오 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빠지고, 지금은 백명제, 박익순 씨 그리고 나 외에 김인권 원로 아나운서가 새로 가입을 했고, 어쩌다 김기풍 감독이 참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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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작(麻雀) 멤버들 / 목포에서


작은 누이동생 경순이


작은 누이동생 경순이는 배화여고를 거쳐 이화여대를 졸업했는데, 졸업과 함께 서울시청 비서실에 취직이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이종선(李鍾善) 국장에게 부탁을 해서 산업국장실 비서로 들어갔는데, 붙임성이 좋고 활동적인 동생을 좋게 본 시장실에서 스카우트를 하는 바람에 시장실 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경순이는 여기서 내 작은 매부 고황(高皇)을 만났다. 작은 매부는 당시 체신부 고웅 국장님의 아드님으로 내무부 공무원이었는데, 이후 경기도와 강원도의 시장, 군수를 두루 지내고 이북오도청의 함경남도 지사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했다.


경순이는 듬직한 남편과 슬하에 고위, 고선희 남매를 두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데, 요즘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다. 두 손 모아 완쾌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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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누이동생 내외


누하동에서 얻은 큰 아들


누하동 집의 마지막은 내 큰아들 준수(俊洙)가 장식하였다. 그때로는 늦장가를 간 나의 첫 아이 준수가, 구석구석 어머니의 손때와 눈물이 묻어 있는 누하동 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나는 감격했고, 시집와서 고생만 하다가 건강한 아들을 낳아준 아내가 고맙기만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잡지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그 작은 누하동 집에서 아이 사진을 찍는가 하면, 우리 내외를 따로 삼청동 공원 등으로 안내해 촬영을 하면서 축하해주었다.


나는 훗날 아들 준수를 누하동 옛 집으로 데리고 가, 태어난 곳임을 일러주면서 검소하게,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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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아들 졸업식에서


옥인동(玉仁洞)에 마련한 새 보금자리


작은 누이동생이 결혼을 할 때는 우리 집이 종로구 옥인동으로 이사를 했을 때이다.


어머니가 마련하신 집에다 우리 내외의 힘이 보태져서 제법 집 같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양만 ICA주택 형태를 취했을 뿐 변소도 옛날 식이고 부엌도 사람 한 키는 들어갈 정도로 깊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집사람의 고충이 여간 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마련한 집이고, 어쨌거나 집 모양을 갖춘 집에 살게 된 우리는 너무나 좋았다.


또한 이웃에 명사(名士)들이 많이 사는 것도 우리를 기분 좋게 했다. 몇 집 건너에 여류화가 천경자(千鏡子) 씨가, 가까운 누상동 골짜기에는 아버지 친구이기도 하셨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선생이 사셨으며, 그 아래쪽 한옥에는 ‘렌의 애가’로 이름을 떨치던 시인 모윤숙(毛允淑) 여사가 사셨다. 또 옥인동 초입 삼거리에는 ‘내 고향 남쪽 바다’의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선생의 집이 있었다.


옥인동 마루턱, 한말 윤비의 인척인 윤덕영(尹德榮) 별장 근처에는 중앙일보의 칼럼 분수대 필자로 유명한 홍사중(洪思重) 위원이 살아서, 자하문 밖에서 오는 최당(崔塘) 기술이사와 홍사중 위원 그리고 나 세 사람은 한동안 한 차로 출근했다.   


어떤 때는 퇴근 길에 홍사중 위원이 최당 이사와 나를 삼성빌딩 뒤에 있는 ‘개스라이트’라는 유명한 살롱으로 안내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홍 위원과 그 집 마담 간의 가벼운 염문이 신문 가십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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