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갑자기 쓰러져 병원행 (35회)

종친칼럼 Wide & General Knowledges
홈 > 이야기마당 > 종친컬럼 > 문화예술
종친컬럼

※ 회원 가입한 종친들의 이야기 공간입니다. 

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갑자기 쓰러져 병원행 (35회)

관리자 0 281

갑자기 쓰러져 병원행 (35회)

  제6장 멕시코 올림픽과 고교야구




한일병원 입원소동


옥인동 전화가 다급하게 울린 일이 한 번 더 있었다. 1967년 총선거가 있었고, 나는 아나운서실장으로 라디오와 TV 양쪽 선거방송을 담당하느라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몇만 몇천 몇표’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밤을 꼬박 새면서 떠들어대고는, 다음날 소공동 상업은행 뒤에 있는 <국제그릴>에서 박승서 선배님 등 몇 분과 점심식사를 했다.


잠을 못자서 몹시 지쳐 있었지만 시장하던 터라 ‘비프스테이크’를 서둘러 먹었는데, 그것이 탈이었다. 나는 서소문의 방송국 정문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 앞에 이르러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다행히 파출소 정문 콘크리트 기둥에 얼굴을 스치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충격이 덜했는데, 마침 점심 식사를 하고 들어오던 박노설 아나운서 차장이 나를 발견하고 길 건너편에 있는 한일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나는 쓰러진 순간 정신이 번쩍 났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데다 속으로는 겁도 났으므로, 박 차장의 부추김에 의지해 병원까지 갔다.


이 상황에서 우리 옥인동 집의 전화벨이 울렸던 것이다. 집사람은 마침 둘째를 잠재우고 잠깐 잠에 들었는데 꿈에 나를 봤다고 한다. 내가 저쪽에서 자기에게 다가오는데, 잠옷 바지가 너무 크고 늘어져서 흉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옷 바지 아래쪽을 접어서 숭덩숭덩 꿰매줬는데, 그때 전화벨이 울려댔다는 것이다.


집사람은 전화를 받고 놀란 나머지 한 걸음에 한일병원 응급실로 달려왔다. 건물 기둥을 스치는 바람에 충격이 완화되어 뇌진탕은 일으키지 않았고, 그밖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찰결과가 나왔지만 왼쪽 이마와 얼굴에 찰과상이 생겨 나는 하루 이틀 병원에 입원하길 권했다.


나의 이 한일병원 입원소동에는 지금도 우리 집사람의 큰소리가 따라다닌다. 꿈에 자기가 잠옷을 줄여주지 않았으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며, 그러니 자기에게 잘하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84be0d4aff73533486da64f1bf312c3e_1623415907_6557.jpg
▲ 최계환, 전응덕 국장, 봉두완 위원, 박노설, 남정우, 신화철 아나운서와 함께 


안경을 쓰게 된 사연


그런데 이 입원기간 중에 나는 눈이 형편없이 나빠져서 근시(近視)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들은 내가 그 시력으로 뉴스를 진행하고 더구나 중계방송까지 한데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결국 이 사건을 게기로 나는 안경을 쓰게 되었고, 머리의 가르마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꾸게 되었다. 안경 모양은 이병철 회장님, 홍진기 회장님, 김덕보 사장님이 한 자리에 모여 이것저것을 내 얼굴에 씌워보시고 의논 끝에 결정을 해주셨다.


아나운서 실장이면 중앙 매스컴의 얼굴인데 함부로 해서야 되겠느냐며 신경을 써주신 것이다. 이제 고물로 변한 그 안경모양을 나는 지금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84be0d4aff73533486da64f1bf312c3e_1623415916_5714.jpg 

▲ 안경을 쓰기 전 '퀴즈 버라이어티' 방송장면


옥인동에서 만난 1.21사태


1968년은 신년 벽두부터 1.21사태로 온 나라가 뒤집힌 해이다. 1.21사태란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세검정 고개를 넘어 침투하였던 사건이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정체가 드러나자, 경복고 뒤 북악산 기슭에서 버스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여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도 이곳에서 순직하였다.


군과 경찰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 자하문 밖으로 도주하던 일당을 모두 사살했는데, 이때 유일하게 김신조만 생포되었다.


그 당시 우리집은 사건현장이나 다름없는 옥인동이어서 우리 식구들은 수류탄폭발음과 난사되는 기관총 소리를 그대로 들으며 영낙없이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터진 것으로 알았다.


멕시코 올림픽


이렇게 시끄럽게 먁을 연 1968년 10월에 나는 멕시코올림픽 중계방송단의 일원이 되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멕시코시는 해발 2,500m가 넘는 고지에 있는 관계로 살찐 사람은 숨이 차서 중계방송을 하기 힘들 거라는 말에 나는 그동안 몸무게를 줄이려고 애를 썼다.


사직공원에서 인왕산 중턱까지를 하루에 두 번씩 오가기로 하고 몇 달 동안 노력한 끝에 70kg이던 몸무게를 66kg까지 줄일 수 있었다.


중계방송 아나운서는, TBC에서 내가 나섰고 MBC에서 임택근 선배, KBS에서 이광재 아나운서가 합류했다. 우리는 도중에 하와이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카라일 힐튼’이라는 최고급 호텔이라는 호텔이 숙소로 정해져, 마침 이 호텔에서 공연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호’의 쇼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임택근 선배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타이핀’을 태평양에 연결된 호수에 떨어뜨려 잃어버리는 바람에 우리 모두의 기분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0 Comments

Social Login

빠른 링크 Quick Links
사이트 현황 State 20180805
  • 현재 접속자 0 명
  • 오늘 방문자 1,444 명
  • 어제 방문자 608 명
  • 전체 방문자 665,248 명
  • 전체 게시물 798 개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