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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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아나운서 박종세 회고록 -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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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37회)

  제6장 멕시코 올림픽과 고교야구




멕시코 관광


나는 중계방송 틈틈이 짬을 내어 멕시코 고원지대에 산재한 유적과 유카탄반도에 있는 신비스런 신전(神殿), 그리고 마야문명이 남겨놓은 수많은 조각품 등을 두루 돌아보았다. 돼지 비개를 사각형으로 잘라 잔뜩 넣고 끓인 국물에다 고춧가루 같은 것을 쳐서 먹는 이상한 국도 먹어봤고,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따코’등 멕시칸 음식도 맛보았다.


끔찍한 투우 경기도 관람했고, 멕시코시티에서 비행기를 탄 후 위로 나는 것이 아니라 줄곧 아래로 날아서 도착한 멕시코의 최대 휴양지 아카풀코(Acapulco)에서는 드높은 절벽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다이빙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올림픽이 끝나자 우리 방송단은 모두 흩어져서 제각기 귀국하기로 했다. 나는 멕시코의 제2도시 과달라하라(Guadalajara)를 거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다시 동부로 방향을 돌려 뉴욕과 워싱턴을 관광하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일본 도쿄로 왔다. 일본에서는 NHK방송국의 히구치 주간을 찾아가 다시 한 번 고마운 인사를 하고 귀국했다.


그때 우리 일행 중 어떤 사람은 위싱턴에 있는 미국의 소리(VOA)에 들러 전직(轉職)을 부탁했다 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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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시 중심부 소칼라광장에서


일본에서 만난 종혁이 형님


도쿄에서 NHK방문을 마친 나는 6촌 형님인 종혁이 형님을 찾아보기로 했다. 종혁이 형님은 일제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NHK방송국에 기술직원으로 입사를 하여 장기간 근무를 하다가, 그 당시에는 직장을 옮겨 나가노현[長野県] 마스모도[松本] 시에 살면서 세계적인 종합가전 기기 제조회사인 산요전기[三洋電機, SANYO Electric Co., Ltd.]에 다니고 있었다.


종혁이 형님은 연락이 되자마자 밤기차로 6시간을 달려 새벽에 도쿄에 도착, 나를 찾아오셨다. 형님은 그날 하루를 완전히 나를 위해 보내셨는데, 나는 형님을 따라다니며 어렸을 때 맛보았던 ‘스키야키’도 배불리 먹었고, 백화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바바리코트도 선물로 받았으며, 오후에는 사무라이 영화도 함께 보았다.


형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도쿄의 산요 대리점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장롱같이 생긴, 14인치 화면에다 오디오가 양쪽에 달린 커다란 TV세트를 사주었다.


나를 위해 꼬박 하루를 봉사한 고마운 종혁이 형님은 마스모도로 돌아가고 나는 그 큰 TV세트를 끌고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TV세트를 김포세관에 맡겼다가 나중에 찾아서 우리 옥인동 집에 갖다놨지만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후일 종혁이 형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문제의 TV세트를 보시고 껄껄 웃던 일이 생각난다.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969년 우리나라 야구는 아시아에 바닥을 헤멨다. 자유중국 타이페이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필리핀에게도 패하고 최하위를 함으로써 그동안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까지 했던 우리나라 야구는 말이 아니게 체면이 구겨졌다.


그렇지만 고교야구는 전성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는데, 선린상고와 경북고, 성남고 등이 우승을 나눠가지며 팬들을 열광시켰다. 나의 야구중계방송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계속 열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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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준 해설위원과


그런데 1971년에 들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다시 한 번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때 감독은 김영조, 코치는 김영덕 씨가 맡았으며 선수로는 투수 김호중(재일교포), 유백만, 포수 정동진, 우용득, 내야수 김응룡, 한동화, 강병철, 외야수 김우열, 박영길, 하갑득 등이 활약했다. 이 대회에는 새로이 호주가 참가해서 5개국이 경기를 했는데, 1차 리그에서는 일본에게 2대3으로 패하는 등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쇼크를 받은 김영조 감독이 쓰러져 입원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김영덕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2차 리그를 맡았는데, 심기일전으로 분발한 한국팀은 마지막 날 결승에서 3만 관중의 응원 속에 마침내 일본을 8대 3으로 물리치고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 날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물론 전 국민이 환호했는데, 나도 중계방송 마이크를 붙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군산상고(群山商高)의 등장


이때 동양방송은 군산에 있는 서해방송(西海放送)과 광주에 있는 전일방송(全一放送)과 제휴를 해서 가청(可聽) 지역이 서울, 경기, 충청에서 호남지방까지로 넓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나의 중계방송도 전남북의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게 되었고, 이것은 이 지역의 잠자던 야구 열풍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전북지방에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군산상고가 야구부를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군산상고 야구부 재건에는 당시 경성고무의 이용일(李容一) 사장이 적극적으로 후원을 했는데, 나는 이 사장의 성화를 못 이겨 몇 차례 군산에서 벌어지는 야구 경기를 중계방송하기로 했다. 그렇게 호남 지역 상징으로 일어선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얻을 만큼 강력한 팀으로 자라나면서 전국대회 우승을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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